지난 2000년 1차 남북정상회담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6·15 공동선언’을 통해 남과 북의 통일방안에 대해 초보적인 합의를 했다. 선언문 제2항은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북측이 제안한 것으로 명시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이미 1989년 3월 북한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가 당시 김일성 주석에게 제안한 내용으로 알려졌다. 문 목사는 김 주석과 회담에서 연방제 통일의 단계적 추진을 강조하면서 1단계로 남과 북의 정부가 군사와 외교권까지 독립적으로 행사하도록 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때까지 북한은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제기하면서 남과 북의 연방정부가 군사·외교권을 행사하는 높은 단계의 연방제를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문 목사의 단계적 연방제 방안은 실제로 김 주석이 91년 신년사에서 ‘느슨한 연방제’를 제기하면서 북한의 공식적인 통일방안으로 자리 잡았다. ‘느슨한 연방제’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서 제기한 남과 북 지방정부의 군사와 외교권을 인정한 것이다.
실제로 문 목사는 당시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김 주석에게 ‘고려연방제만 주장하다가는 통일은 부지하세월인데 분단의 치욕이 50년을 넘으면 안된다’고 말했다”며 “김 주석은 한참 생각하더니 ‘좋습니다’라는 한마디로 나의 통일 ‘1단계’를 수용할 뜻을 비쳤다”고 말했다.
이처럼 문 목사는 방북과정에서 북측의 지도부가 경직된 대남 통일노선을 수정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문 목사와 함께 방북했던 유원호(77)씨는 “문 목사가 김 주석과 만나서 ‘나는 개인자격으로 온 것 아니냐, 통일에 대한 열의가 있다면 남쪽의 대통령과 직접 만나라’라고 조언했다”며 “이에 김 주석이 ‘좋다. 지금까지 대통령으로 인정해 본 적이 없는데 노태우를 노 대통령으로 부르고 통일에 대한 협상을 하겠다’고 답하더라”며 두사람의 회담 뒷얘기를 전했다.
역시 북한은 문 목사와의 회담이후 남쪽 노태우정권과 여섯 차례의 총리급 고위회담을 통해 91년 12월 남과 북 사이 화해와 불가침 등의 내용을 담은 ‘남북 기본합의서’에 합의하고 국회(최고인민회의)의 비준까지 받았다.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은 문 목사의 방북은 당시 한국사회를 크게 흔들었다. 1988년 ‘남북청년학생회담’을 둘러싼 통일논의와 함께 서경원 의원과 소설가 황석영씨의 방북으로 통일문제를 둘러싼 긴장감이 팽배한 때에 터져 나온 문 목사의 방북은 남한사회에 통일문제가 현실적 과제임을 인식시켰다. 또한 노태우 정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당시 터져 나오던 노동자와 농민의 생존권투쟁을 탄압하는 ‘공안정국’을 조성하기도 했다.
한편 문익환 목사는 김 주석과의 회담에 이어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과 9개항의 ‘4·2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4·2 공동성명의 주요내용인 △7·4 남북공동성명의 기본 정신인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원칙 확인 △2개의 조선정책 반대와 통일조국 지향 △정치·군사적 대결 해소와 다방면의 민간교류 실현 △남북공존 원칙에 기초한 합리적 통일방안 모색 등은 이후 남북기본합의서 등에 적극 반영됐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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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시 북측이 제안한 것으로 명시한 ‘낮은 단계의 연방제’는 이미 1989년 3월 북한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가 당시 김일성 주석에게 제안한 내용으로 알려졌다. 문 목사는 김 주석과 회담에서 연방제 통일의 단계적 추진을 강조하면서 1단계로 남과 북의 정부가 군사와 외교권까지 독립적으로 행사하도록 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때까지 북한은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제기하면서 남과 북의 연방정부가 군사·외교권을 행사하는 높은 단계의 연방제를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문 목사의 단계적 연방제 방안은 실제로 김 주석이 91년 신년사에서 ‘느슨한 연방제’를 제기하면서 북한의 공식적인 통일방안으로 자리 잡았다. ‘느슨한 연방제’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서 제기한 남과 북 지방정부의 군사와 외교권을 인정한 것이다.
실제로 문 목사는 당시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김 주석에게 ‘고려연방제만 주장하다가는 통일은 부지하세월인데 분단의 치욕이 50년을 넘으면 안된다’고 말했다”며 “김 주석은 한참 생각하더니 ‘좋습니다’라는 한마디로 나의 통일 ‘1단계’를 수용할 뜻을 비쳤다”고 말했다.
이처럼 문 목사는 방북과정에서 북측의 지도부가 경직된 대남 통일노선을 수정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문 목사와 함께 방북했던 유원호(77)씨는 “문 목사가 김 주석과 만나서 ‘나는 개인자격으로 온 것 아니냐, 통일에 대한 열의가 있다면 남쪽의 대통령과 직접 만나라’라고 조언했다”며 “이에 김 주석이 ‘좋다. 지금까지 대통령으로 인정해 본 적이 없는데 노태우를 노 대통령으로 부르고 통일에 대한 협상을 하겠다’고 답하더라”며 두사람의 회담 뒷얘기를 전했다.
역시 북한은 문 목사와의 회담이후 남쪽 노태우정권과 여섯 차례의 총리급 고위회담을 통해 91년 12월 남과 북 사이 화해와 불가침 등의 내용을 담은 ‘남북 기본합의서’에 합의하고 국회(최고인민회의)의 비준까지 받았다.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은 문 목사의 방북은 당시 한국사회를 크게 흔들었다. 1988년 ‘남북청년학생회담’을 둘러싼 통일논의와 함께 서경원 의원과 소설가 황석영씨의 방북으로 통일문제를 둘러싼 긴장감이 팽배한 때에 터져 나온 문 목사의 방북은 남한사회에 통일문제가 현실적 과제임을 인식시켰다. 또한 노태우 정부는 이 사건을 빌미로 당시 터져 나오던 노동자와 농민의 생존권투쟁을 탄압하는 ‘공안정국’을 조성하기도 했다.
한편 문익환 목사는 김 주석과의 회담에 이어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과 9개항의 ‘4·2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4·2 공동성명의 주요내용인 △7·4 남북공동성명의 기본 정신인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원칙 확인 △2개의 조선정책 반대와 통일조국 지향 △정치·군사적 대결 해소와 다방면의 민간교류 실현 △남북공존 원칙에 기초한 합리적 통일방안 모색 등은 이후 남북기본합의서 등에 적극 반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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