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연수생으로 한국 온 지 12년째 … 통역하며 한-베트남 이해 증진 노력
중소기업중앙회 1층에는 일자리를 찾아 한국에 온 외국인들로 북적거린다. 이들은 대부분 산업연수생으로 회사에 취업하기 전 필요한 교육을 받기 위해 이곳을 거쳐야 한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이들을 위해 통역관은 필수. 통역관은 대화의 내용을 전달해주는 단순한 통역에 머무르지 않고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바다를 건너 온 이들의 한국생활 정착을 돕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통역관은 한국에 정착한 외국인 출신이 맡고 있다.
원주희(32)씨는 중소기업중앙회에서 베트남 통역관으로 일하고 있다. 베트남 정치도시인 하노이 인근 하이정이 고향인 원씨가 한국에 온 지도 벌써 12년째다. 원씨는 이제 한국 이름을 갖고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원씨의 베트남 이름은 ‘웬티드 앗’이다.
“정말 행복합니다. 한국에서 결혼하고, 어엿한 직장도 갖고 있죠. 큰 어려움 없이 짧은 기간에 한국에 정착했다는 사실이 꿈만 같습니다.”
원씨의 행복지수는 100점 만점에 100점이다. 그는 1996년도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때 나이가 21세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준비하던 중 산업연수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돈도 벌고, 외국에 나가고 싶어 대학진학을 포기한 채 한국행을 선택했다.
첫 직장은 인천 남동공단의 가스렌즈 부품을 만드는 회사였다. 원씨는 이곳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회사 관리자였던 남편을 만나 1년여의 열애 끝에 결혼하기에 이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승민이도 낳았다. 한국국적을 획득, ‘원주희’라는 이름도 갖게 됐다.
원씨는 결혼 후 시어머니로부터 한국음식을 비롯한 집안 살림을 배우면서 자연스레 한국말도 익혔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할 수 있자 안정적이고 전문적인 직장을 갖게 됐다.
하지만 그에게도 순탄한 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결혼은 양가 부모님들의 반대에 부닥쳤다. 외국인 사위와 며느리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 서로 사귄다는 사실을 알자 회사에서도 제동을 걸었다. 회사에서는 ‘헤어지지 않으면 출국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친딸처럼 보살펴 주던 공장장조차 헤어질 것을 권유했다.
“매우 힘들었어요. 누구하나 우리의 사랑을 믿지 않았어요. 남편에게는 베트남 나이 어린 여자와의 불장난으로, 나에게는 불행해질까봐 걱정한 거지요. 이 어려움을 남편에 대한 믿음으로 견디었습니다.”
결국 양가의 축하 속에 웨딩마치를 울렸다. 결혼한 다음해 아들 승민이를 얻었다. 변함없는 사랑이 이어지자 회사에서도 축하를 해줬다. 헤어질 것을 권유했던 공장장은 원씨를 ‘수양딸’로 삼았다.
기쁨도 잠시 당시 한국말을 못했던 원씨는 아이와의 관계에서 가슴앓이를 했다. 아이와 대화를 하고, 동화책도 읽어주고 싶은데 마음뿐이었다. 떠들며 함께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했다.
승민이는 말이 없는 아이로 커갔다. 다행히 유치원에서 엄마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관심을 보여주면서 승민이는 활발해졌다.
언어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한 원씨는 시어머니의 지도로 한국어를 거의 완벽히 구사하게 됐다. 이 덕분에 안전한 직장도 얻었다.
원씨는 한국에 온 베트남인들이 정착하지 못하거나 불행한 일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수십년간 서로가 다른 생활문화 속에서 살아왔잖아요. 생각이나 행동에 차이가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 하지요.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면 한국인이나 외국인들이 서로 상처 주는 일이 줄어들 겁니다.”
원씨는 통역을 하면서 베트남인들에게 한국문화를 이해시키는 데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베트남 근로자가 회사의 음식이 먹을 게 없다며 불평을 토로하자 오히려 근로자를 꾸짖었다. 한국에 왔으면 한국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한국말을 빨리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화가 다른데다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생기는 오해도 많기 때문이다.
“한국인과 결혼하려면 소개회사 통하지 말고 직접 사귀었으면 합니다. 평생을 함께 살 사람인데 제대로 알고 결혼해야 불행하지 않죠.” 원씨는 베트남 원정결혼 소식을 접할 때마다 자신을 더욱 다그친다. 베트남인들이 한국에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어서다.
“사람을 학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서로의 차이는 도와주면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결혼했으면 며느리로 아내로 생각하고 하나 하나씩 도와주기를 부탁합니다.”
베트남이 한국처럼 경제발전이 되기를 기대하는 원씨. 통역을 통해 한국과 베트남의 이해를 높이는 민간외교를 하고 있다.
김형수 기자 hskim@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중소기업중앙회 1층에는 일자리를 찾아 한국에 온 외국인들로 북적거린다. 이들은 대부분 산업연수생으로 회사에 취업하기 전 필요한 교육을 받기 위해 이곳을 거쳐야 한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이들을 위해 통역관은 필수. 통역관은 대화의 내용을 전달해주는 단순한 통역에 머무르지 않고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바다를 건너 온 이들의 한국생활 정착을 돕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통역관은 한국에 정착한 외국인 출신이 맡고 있다.
원주희(32)씨는 중소기업중앙회에서 베트남 통역관으로 일하고 있다. 베트남 정치도시인 하노이 인근 하이정이 고향인 원씨가 한국에 온 지도 벌써 12년째다. 원씨는 이제 한국 이름을 갖고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원씨의 베트남 이름은 ‘웬티드 앗’이다.
“정말 행복합니다. 한국에서 결혼하고, 어엿한 직장도 갖고 있죠. 큰 어려움 없이 짧은 기간에 한국에 정착했다는 사실이 꿈만 같습니다.”
원씨의 행복지수는 100점 만점에 100점이다. 그는 1996년도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때 나이가 21세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준비하던 중 산업연수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돈도 벌고, 외국에 나가고 싶어 대학진학을 포기한 채 한국행을 선택했다.
첫 직장은 인천 남동공단의 가스렌즈 부품을 만드는 회사였다. 원씨는 이곳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회사 관리자였던 남편을 만나 1년여의 열애 끝에 결혼하기에 이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승민이도 낳았다. 한국국적을 획득, ‘원주희’라는 이름도 갖게 됐다.
원씨는 결혼 후 시어머니로부터 한국음식을 비롯한 집안 살림을 배우면서 자연스레 한국말도 익혔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할 수 있자 안정적이고 전문적인 직장을 갖게 됐다.
하지만 그에게도 순탄한 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결혼은 양가 부모님들의 반대에 부닥쳤다. 외국인 사위와 며느리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 서로 사귄다는 사실을 알자 회사에서도 제동을 걸었다. 회사에서는 ‘헤어지지 않으면 출국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친딸처럼 보살펴 주던 공장장조차 헤어질 것을 권유했다.
“매우 힘들었어요. 누구하나 우리의 사랑을 믿지 않았어요. 남편에게는 베트남 나이 어린 여자와의 불장난으로, 나에게는 불행해질까봐 걱정한 거지요. 이 어려움을 남편에 대한 믿음으로 견디었습니다.”
결국 양가의 축하 속에 웨딩마치를 울렸다. 결혼한 다음해 아들 승민이를 얻었다. 변함없는 사랑이 이어지자 회사에서도 축하를 해줬다. 헤어질 것을 권유했던 공장장은 원씨를 ‘수양딸’로 삼았다.
기쁨도 잠시 당시 한국말을 못했던 원씨는 아이와의 관계에서 가슴앓이를 했다. 아이와 대화를 하고, 동화책도 읽어주고 싶은데 마음뿐이었다. 떠들며 함께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했다.
승민이는 말이 없는 아이로 커갔다. 다행히 유치원에서 엄마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관심을 보여주면서 승민이는 활발해졌다.
언어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한 원씨는 시어머니의 지도로 한국어를 거의 완벽히 구사하게 됐다. 이 덕분에 안전한 직장도 얻었다.
원씨는 한국에 온 베트남인들이 정착하지 못하거나 불행한 일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
“수십년간 서로가 다른 생활문화 속에서 살아왔잖아요. 생각이나 행동에 차이가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 하지요.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면 한국인이나 외국인들이 서로 상처 주는 일이 줄어들 겁니다.”
원씨는 통역을 하면서 베트남인들에게 한국문화를 이해시키는 데 노력하고 있다. 최근에는 베트남 근로자가 회사의 음식이 먹을 게 없다며 불평을 토로하자 오히려 근로자를 꾸짖었다. 한국에 왔으면 한국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한국말을 빨리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화가 다른데다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생기는 오해도 많기 때문이다.
“한국인과 결혼하려면 소개회사 통하지 말고 직접 사귀었으면 합니다. 평생을 함께 살 사람인데 제대로 알고 결혼해야 불행하지 않죠.” 원씨는 베트남 원정결혼 소식을 접할 때마다 자신을 더욱 다그친다. 베트남인들이 한국에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어서다.
“사람을 학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서로의 차이는 도와주면 쉽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결혼했으면 며느리로 아내로 생각하고 하나 하나씩 도와주기를 부탁합니다.”
베트남이 한국처럼 경제발전이 되기를 기대하는 원씨. 통역을 통해 한국과 베트남의 이해를 높이는 민간외교를 하고 있다.
김형수 기자 hskim@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