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수 한국노총 비정규국장 심장마비 타계
87년 노동자대투쟁 주역으로 당시 경원세기노조 민주화를 주도한 현장노동운동가 장진수(한국노총 조직본부 비정규국장)씨가 4일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48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발인은 6일.
이날 그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여의도성모병원 장례식장엔 수백명의 오랜 동지와 벗들이 몰려와 눈물을 떨궜다.
고 장진수씨는 언제나 노동자 편에서 정의와 대의에 충실했다. 그는 ‘87년 7·8월 노동자투쟁’ 당시 부천지역 중견업체인 경원세기에서 민주노조 설립을 주도했다.
그는 당시 회사의 폭압적인 노무관리에 분노했다. 작업장 노동자들은 회사관리자로부터 ‘껌을 씹는다’는 이유로 주먹질을 당해야 했고, 긴머리를 가위질을 당해야 했다. 초과노동은 한달 130시간을 넘는 게 예사였다. 노조는 있었지만, 노동자의 고통을 외면했다.
경원세기에서 93년까지 노조활동을 함께 했던 장민석(러시아 연해주 농업지원센터 소장)씨는 “민주노조를 만드는 과정에서 해고자 문제가 생겼고, 이들의 복직을 원칙으로 세웠다”며 “일부에서는 다른 투쟁이 약화될 수 있다며 해고자 복직 요구를 철회하자고 했지만 장진수씨는 끝까지 원칙을 지켰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직전엔 회사가 어려워지자 자신의 집문서를 들고 사장을 찾아가 “개인재산을 담보로 돈을 빌려 회사를 살리자”고 제안한 것도 노동자의 편에서 대의를 따른 결과였다.
항상 원칙을 강조했던 그는 이번 대선에서 한국노총이 반노동자 의식을 가진 후보를 정책연대 파트너로 선정해 지지해야 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몹시 괴로워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장 국장은 말수가 적었지만, ‘어찌 우리가 노동자 반대편 후보의 당선 도와줄 수 있느냐’며 괴로와 했다”고 전했다.
고 장진수씨는 민주주의를 중시했다. 경원세기노조에서 사실상 처음 시작한 ‘노조 총회와 분임토의’ 방식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민주적 의결절차의 대명사가 됐다. 장남 기훈(25)씨는 “아버지는 식구끼리 대화를 강조하셨다”며 “가족신문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는 가정 민주주의때문이었다”고 말했다.
2004년 한국노총 본부에 몸을 담은 그는 비정규직 조직사업을 담당했다. 한국노총비정규노조연대회의 강정순 사무국장은 “자신의 월급이 얼마 되지도 않으면서 어려움에 처한 비정규직 노조들을 일일이 찾아 라면 몇 상자를 사주고 격려했다”며 “밤이 깊어도 조합원교육이라면 먼 곳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강경흠 기자 khk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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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노동자대투쟁 주역으로 당시 경원세기노조 민주화를 주도한 현장노동운동가 장진수(한국노총 조직본부 비정규국장)씨가 4일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48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발인은 6일.
이날 그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여의도성모병원 장례식장엔 수백명의 오랜 동지와 벗들이 몰려와 눈물을 떨궜다.
고 장진수씨는 언제나 노동자 편에서 정의와 대의에 충실했다. 그는 ‘87년 7·8월 노동자투쟁’ 당시 부천지역 중견업체인 경원세기에서 민주노조 설립을 주도했다.
그는 당시 회사의 폭압적인 노무관리에 분노했다. 작업장 노동자들은 회사관리자로부터 ‘껌을 씹는다’는 이유로 주먹질을 당해야 했고, 긴머리를 가위질을 당해야 했다. 초과노동은 한달 130시간을 넘는 게 예사였다. 노조는 있었지만, 노동자의 고통을 외면했다.
경원세기에서 93년까지 노조활동을 함께 했던 장민석(러시아 연해주 농업지원센터 소장)씨는 “민주노조를 만드는 과정에서 해고자 문제가 생겼고, 이들의 복직을 원칙으로 세웠다”며 “일부에서는 다른 투쟁이 약화될 수 있다며 해고자 복직 요구를 철회하자고 했지만 장진수씨는 끝까지 원칙을 지켰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직전엔 회사가 어려워지자 자신의 집문서를 들고 사장을 찾아가 “개인재산을 담보로 돈을 빌려 회사를 살리자”고 제안한 것도 노동자의 편에서 대의를 따른 결과였다.
항상 원칙을 강조했던 그는 이번 대선에서 한국노총이 반노동자 의식을 가진 후보를 정책연대 파트너로 선정해 지지해야 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몹시 괴로워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노총 관계자는 “장 국장은 말수가 적었지만, ‘어찌 우리가 노동자 반대편 후보의 당선 도와줄 수 있느냐’며 괴로와 했다”고 전했다.
고 장진수씨는 민주주의를 중시했다. 경원세기노조에서 사실상 처음 시작한 ‘노조 총회와 분임토의’ 방식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민주적 의결절차의 대명사가 됐다. 장남 기훈(25)씨는 “아버지는 식구끼리 대화를 강조하셨다”며 “가족신문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는 가정 민주주의때문이었다”고 말했다.
2004년 한국노총 본부에 몸을 담은 그는 비정규직 조직사업을 담당했다. 한국노총비정규노조연대회의 강정순 사무국장은 “자신의 월급이 얼마 되지도 않으면서 어려움에 처한 비정규직 노조들을 일일이 찾아 라면 몇 상자를 사주고 격려했다”며 “밤이 깊어도 조합원교육이라면 먼 곳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강경흠 기자 khk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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