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근대의 독도수호자들
신라 이사부- 우산국 정복 신라 영토 배속
독도역사에 대한 연대기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이사부(異斯夫)다.
신라인 이사부는 내물왕의 4대 손으로 지증왕 6년(서기 505년) 지금의 강원도 삼척인 실직(悉直)주의 군주가 되었다가 지증왕 13년인 서기 512년 아슬라(阿瑟羅)주(현재의 강원도 강릉)의 군주로 있을 때 현재의 울릉도와 독도인 우산국을 정복하고 신라 영토에 배속시킨 장군이다.
신라 진흥왕 때의 장군이자 정치가이면서 병부령(兵部令)으로 실권을 장악했으며 신라의 영토확장과 국사 편찬을 제안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명 태종(苔宗)으로 불려졌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신라본기 등에 따르면 이사부는 성질이 사납고 거친 것으로 알려진 우산국을 공격하면서 나무로 된 사자를 배에 싣고 우산국 해안에 이른 후 허수아비 사자입으로 불을 내뿜으며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사나운 사자를 풀어 모조리 밝혀 죽게 하리라’며 위협했다.
‘신당서’ ‘신라전’ 등에는 우산국 사람들은 “톱니같은 이빨과 갈퀴처럼 신 손톱을 가지고 있고 사람을 잡아 먹기도 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또 이사부 장군이 당시 우리나라에 살 지도 않는 사자를 나무로 만들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범과 곰이 아닌 사자 형상을 나무로 제작한 이유는 당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이사부가 우산국을 한번 공격으로 항복받았다고 적고 있으나 ‘우산국이 지형이 험한 것을 믿고 쉽게 항복하지 않는다’는 기록도 있는 만큼 2차 공격때 우산국의 우해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는 주장도 있다. 우산국 군사들은 불을 뿜는 괴상한 짐승(나무사자)을 보고 혼비백산했다는 해석이다. 우산국에는 당시 짐승이라고 찾아 볼 수 없는 지역으로 우산국 백성들은 불을 뿜는 사자에 질렸을 것이라는 것.
현재 울릉군 남양 포구에 있는 사자바위 전설은 우산국의 최후를 전해주고 있다.
우산국의 우해왕은 이사부에게 항복하며 ‘데리고 온 괴상한 짐승(나무사자)을 바다에 내렸는데 이것이 훗날 사자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심흥택-대한제국 신진관료 ‘독도’ 첫 사용
독도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심흥택은 1855년 서울에서 태어나 대한제국의 신진관료로 1903년부터 약 3년여동안 울도(울릉)군수로 재직했다.
1906년 심흥택은 관찰사에게 작성한 보고서에 처음으로 ‘독도’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그 이전까지 독도는 조선 성종때 삼봉도, 정조때 가지도, 고종 석도 등으로 불려왔다. 일본도 울릉도를 죽도로 불러오다 최근에 독도를 죽도(다케시마)로 부르고 있다.
심흥택은 1906년 3월 28일 울릉도로 찾아온 시마네현 조사단 일행을 맞고 ‘일본이 다케시마 즉 독도를 일본국 영토로 편입하고 그 섬을 둘러보고 온다’는 말을 들었다.
심 군수는 그 이튿날 강원도 관찰사 서리 이명래 춘천군수에게 즉보했다. 심군수의 보고가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일본의 부당한 침략에 대해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평가다.
울도군수 심흥택은 이 보고서에서 “본군 소속 독도(獨島)가”라며 독도가 자신이 통치하는 영토임을 밝혀 항의했고, 내부대신은 “독도를 일본의 속지라고 말한 것은 전혀 이치가 없는 것이며, 아연 실색할 일”이라며 일본측 주장을 항의 비판했다.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은 1906년 4월 29일의 지령 제3호에서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며, 독도의 형편과 일본인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다시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당시는 이미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있어 한국은 외교권을 상실한 상태라 외교적으로 항의할 방법은 없었다. 이미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체결로 외교권을 상실했고1906년 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부(外部)가 폐지됐고 같은 해 1906년 2월 1일 통감부가 서울에 설치돼 업무를 개시하고 있었다.
그후 독도는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경상북도에 편입되었고, 2000년 4월 7일을 기점으로 행정구역상 주소를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리 산1~산37로 정해졌다.
대구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
후원
대구한의대학교 산학협력단
대구한의대학교 안용복연구소
사진설명
1906년 심흥택 울릉군수가 강원도 관찰사에게 보낸 보고서에 처음으로 '독도'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신라 이사부- 우산국 정복 신라 영토 배속
독도역사에 대한 연대기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이사부(異斯夫)다.
신라인 이사부는 내물왕의 4대 손으로 지증왕 6년(서기 505년) 지금의 강원도 삼척인 실직(悉直)주의 군주가 되었다가 지증왕 13년인 서기 512년 아슬라(阿瑟羅)주(현재의 강원도 강릉)의 군주로 있을 때 현재의 울릉도와 독도인 우산국을 정복하고 신라 영토에 배속시킨 장군이다.
신라 진흥왕 때의 장군이자 정치가이면서 병부령(兵部令)으로 실권을 장악했으며 신라의 영토확장과 국사 편찬을 제안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명 태종(苔宗)으로 불려졌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신라본기 등에 따르면 이사부는 성질이 사납고 거친 것으로 알려진 우산국을 공격하면서 나무로 된 사자를 배에 싣고 우산국 해안에 이른 후 허수아비 사자입으로 불을 내뿜으며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사나운 사자를 풀어 모조리 밝혀 죽게 하리라’며 위협했다.
‘신당서’ ‘신라전’ 등에는 우산국 사람들은 “톱니같은 이빨과 갈퀴처럼 신 손톱을 가지고 있고 사람을 잡아 먹기도 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또 이사부 장군이 당시 우리나라에 살 지도 않는 사자를 나무로 만들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범과 곰이 아닌 사자 형상을 나무로 제작한 이유는 당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이사부가 우산국을 한번 공격으로 항복받았다고 적고 있으나 ‘우산국이 지형이 험한 것을 믿고 쉽게 항복하지 않는다’는 기록도 있는 만큼 2차 공격때 우산국의 우해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는 주장도 있다. 우산국 군사들은 불을 뿜는 괴상한 짐승(나무사자)을 보고 혼비백산했다는 해석이다. 우산국에는 당시 짐승이라고 찾아 볼 수 없는 지역으로 우산국 백성들은 불을 뿜는 사자에 질렸을 것이라는 것.
현재 울릉군 남양 포구에 있는 사자바위 전설은 우산국의 최후를 전해주고 있다.
우산국의 우해왕은 이사부에게 항복하며 ‘데리고 온 괴상한 짐승(나무사자)을 바다에 내렸는데 이것이 훗날 사자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심흥택-대한제국 신진관료 ‘독도’ 첫 사용
독도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심흥택은 1855년 서울에서 태어나 대한제국의 신진관료로 1903년부터 약 3년여동안 울도(울릉)군수로 재직했다.
1906년 심흥택은 관찰사에게 작성한 보고서에 처음으로 ‘독도’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그 이전까지 독도는 조선 성종때 삼봉도, 정조때 가지도, 고종 석도 등으로 불려왔다. 일본도 울릉도를 죽도로 불러오다 최근에 독도를 죽도(다케시마)로 부르고 있다.
심흥택은 1906년 3월 28일 울릉도로 찾아온 시마네현 조사단 일행을 맞고 ‘일본이 다케시마 즉 독도를 일본국 영토로 편입하고 그 섬을 둘러보고 온다’는 말을 들었다.
심 군수는 그 이튿날 강원도 관찰사 서리 이명래 춘천군수에게 즉보했다. 심군수의 보고가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일본의 부당한 침략에 대해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평가다.
울도군수 심흥택은 이 보고서에서 “본군 소속 독도(獨島)가”라며 독도가 자신이 통치하는 영토임을 밝혀 항의했고, 내부대신은 “독도를 일본의 속지라고 말한 것은 전혀 이치가 없는 것이며, 아연 실색할 일”이라며 일본측 주장을 항의 비판했다.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은 1906년 4월 29일의 지령 제3호에서 “독도가 일본의 영토라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며, 독도의 형편과 일본인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다시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당시는 이미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되어 있어 한국은 외교권을 상실한 상태라 외교적으로 항의할 방법은 없었다. 이미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체결로 외교권을 상실했고1906년 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부(外部)가 폐지됐고 같은 해 1906년 2월 1일 통감부가 서울에 설치돼 업무를 개시하고 있었다.
그후 독도는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경상북도에 편입되었고, 2000년 4월 7일을 기점으로 행정구역상 주소를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리 산1~산37로 정해졌다.
대구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
후원
대구한의대학교 산학협력단
대구한의대학교 안용복연구소
사진설명
1906년 심흥택 울릉군수가 강원도 관찰사에게 보낸 보고서에 처음으로 '독도'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