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기둥의 이야기
숭례문 화재로 610년 역사가 불탔다. 그러나 화마에 앗긴 기둥이나 들보의 입장에서는 천년의 세월을 잃은 셈이다. 재목이 되기까지 버텨온 400년 세월을 보태서다. 숭례문 누각의 기둥이 된 재목 한 점은 천년 전에 싹을 틔운 나무였다. 그 조상 나무는 태고 이후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주변에 뿌리를 내렸다. 이름하여 금강송. 이 소나무는 몸체가 곧고 재질이 단단하며 빛깔마저 고왔다. 그래서 최상품의 재목으로 꼽혔다. 숭례문 기둥목도 바로 금강송의 씨에서 태어났다. 고려 창건 90년(1008년), 낙동정맥 자락에서 솔방울에 맺혔던 솔씨 하나가 어느날 바람에 실려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백두대간을 넘어 날아갔다.
사뿐히 내려앉은 곳은 남한강 상류 골짜기. 산나물을 캐는 아낙네와 사냥꾼이나 가끔 드나드는 심심산골 오지였다. 거기 낙엽이 썩은 부토 속에서 솔씨는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렸다. 온갖 야생화가 철마다 옷을 갈아입는 아름다운 숲, 햇볕이 스미는 양지바른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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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속에 갖가지 짐승이 숱하게 태어나고 스러져갔지만 그는 갈수록 장대해지기만 했다. 살을 에는 매서운 추위와 작열하는 뙤약볕도 그를 굽히지 못했다. 그렇게 400년 세월을 꼿꼿이 자랐다. 몸통은 붉고 윤기가 흘렀으며 100척의 키에 밑동의 둘레는 두 아름이나 됐다. 조선 최대 건물의 기둥이나 대들보 감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늠름했다.
그의 자태가 변한만큼 세상도 변했다. 그가 세상을 본지 400년 만에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조선 왕조가 들어섰다. 조선은 새 도읍으로 한양을 정하고 도성과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 많은 재목이 필요했다. 방방곡곡에 수령 수백 년 되는 기둥과 대들보 감 재목의 수배령이 내려졌다. 이 때 그도 뽑혀 뿌리와 가지가 잘리고 몸통만 남는 아픔을 겪었다. 그래도 큰 재목으로 쓰인다는 기대감에 설렜다. 그는 주변에서 베어진 나무들과 함께 뗏목으로 엮여 한강 물에 실려 갔다. 얼마 후 한양 동작나루에 이르렀고, 오랜 건조과정을 거친 뒤 남산 기슭 작업장으로 실려 갔다. 목재를 다듬는 곳이었다. 거기에서 도편수를 만났고 비로소 자신이 숭례문 누각의 기둥감으로 뽑혔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랑스러웠다. 손발이 잘린 몸통이나마 새 도읍을 방비하는 도성의 관문 위에 서게 되다니 꿈만 같았다. 숭례문 2층 누각의 기둥으로 자리한 뒤에는 “여기서 천년만년 버티자”고 생각했다. 도성에서의 세월은 산속보다 빠르게 흘렀다. 늘 많은 사람이 오가고 시끌벅적했다. 기쁘고 슬픈 온갖 세상사가 눈앞에 펼쳐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세의 침략도 지켜봤다. 당시 일부 궁궐이 불타는 것을 목격했지만 자신이 서있는 숭례문은 피해를 면했다.
일제 때 성곽 일부가 잘려 나가고 주변 도로에 갇히는 신세가 됐을 때도 애통했으나 자리를 지킨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한국전쟁으로 서울시가지가 초토화됐을 때도 무사히 국보 1호의 자리를 지켰다. 그 후 여러 번 수리와 단장이 따랐고 2년 전에는 시민들이 접근하는 통로까지 생겼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사람들의 숨결이던가? 반가웠다. 그러나 왠지 불안했다. 가끔 노숙자들이 누각을 드나들며 잠도 자고 불도 지폈다. 화재가 염려스러웠다. 국보 1호라면서 이렇게 방치해도 되는지 의아했다.
지난 2월10일 밤. 어두운 그림자가 서쪽 벽을 타고 2층 누각으로 침입했다. 또 노숙자가 추위를 피해 들어왔나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침입자는 마루바닥에 무언가 쏟아 붓고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누각 안이 훤해지며 불길이 치솟았다. 무서웠다. 그러나 한 구석에 믿음이 있었다. “국보 1호이니 필경 경보가 울릴 것이다. 소방대가 닥치고 즉시 진화에 나서겠지. 그러면 마루와 천장은 약간 그을리겠지만 곧 꺼지겠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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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판이었다. 경보가 아닌 목격자 신고로 소방대가 출동하고 소방대는 건물 구조를 몰라 엉뚱한 곳에 호스의 물길을 뿜었다. 그동안 불길은 취약한 천장 속으로 스며들어 2층 누각 전체를 태우고 붕괴시켰다. 이 어처구니없는 일은 안전 불감(不感)과 무방비(無防備)에서 생겨났다. 안전 불감과 무방비는 결국 국보를 태우고 국민적 자존심마저 짓밟았다. 천년 세월을 살아온 숭례문 기둥은 이제 아래만 조금 남아 복원 재목으로도 쓸 수 없는 불구가 됐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 그의 흉한 모습은 숭례문 옆 빈터에 그대로 보존돼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방비’임을 일깨우는 상징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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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화재로 610년 역사가 불탔다. 그러나 화마에 앗긴 기둥이나 들보의 입장에서는 천년의 세월을 잃은 셈이다. 재목이 되기까지 버텨온 400년 세월을 보태서다. 숭례문 누각의 기둥이 된 재목 한 점은 천년 전에 싹을 틔운 나무였다. 그 조상 나무는 태고 이후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주변에 뿌리를 내렸다. 이름하여 금강송. 이 소나무는 몸체가 곧고 재질이 단단하며 빛깔마저 고왔다. 그래서 최상품의 재목으로 꼽혔다. 숭례문 기둥목도 바로 금강송의 씨에서 태어났다. 고려 창건 90년(1008년), 낙동정맥 자락에서 솔방울에 맺혔던 솔씨 하나가 어느날 바람에 실려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백두대간을 넘어 날아갔다.
사뿐히 내려앉은 곳은 남한강 상류 골짜기. 산나물을 캐는 아낙네와 사냥꾼이나 가끔 드나드는 심심산골 오지였다. 거기 낙엽이 썩은 부토 속에서 솔씨는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렸다. 온갖 야생화가 철마다 옷을 갈아입는 아름다운 숲, 햇볕이 스미는 양지바른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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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속에 갖가지 짐승이 숱하게 태어나고 스러져갔지만 그는 갈수록 장대해지기만 했다. 살을 에는 매서운 추위와 작열하는 뙤약볕도 그를 굽히지 못했다. 그렇게 400년 세월을 꼿꼿이 자랐다. 몸통은 붉고 윤기가 흘렀으며 100척의 키에 밑동의 둘레는 두 아름이나 됐다. 조선 최대 건물의 기둥이나 대들보 감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늠름했다.
그의 자태가 변한만큼 세상도 변했다. 그가 세상을 본지 400년 만에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조선 왕조가 들어섰다. 조선은 새 도읍으로 한양을 정하고 도성과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 많은 재목이 필요했다. 방방곡곡에 수령 수백 년 되는 기둥과 대들보 감 재목의 수배령이 내려졌다. 이 때 그도 뽑혀 뿌리와 가지가 잘리고 몸통만 남는 아픔을 겪었다. 그래도 큰 재목으로 쓰인다는 기대감에 설렜다. 그는 주변에서 베어진 나무들과 함께 뗏목으로 엮여 한강 물에 실려 갔다. 얼마 후 한양 동작나루에 이르렀고, 오랜 건조과정을 거친 뒤 남산 기슭 작업장으로 실려 갔다. 목재를 다듬는 곳이었다. 거기에서 도편수를 만났고 비로소 자신이 숭례문 누각의 기둥감으로 뽑혔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랑스러웠다. 손발이 잘린 몸통이나마 새 도읍을 방비하는 도성의 관문 위에 서게 되다니 꿈만 같았다. 숭례문 2층 누각의 기둥으로 자리한 뒤에는 “여기서 천년만년 버티자”고 생각했다. 도성에서의 세월은 산속보다 빠르게 흘렀다. 늘 많은 사람이 오가고 시끌벅적했다. 기쁘고 슬픈 온갖 세상사가 눈앞에 펼쳐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세의 침략도 지켜봤다. 당시 일부 궁궐이 불타는 것을 목격했지만 자신이 서있는 숭례문은 피해를 면했다.
일제 때 성곽 일부가 잘려 나가고 주변 도로에 갇히는 신세가 됐을 때도 애통했으나 자리를 지킨 것만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한국전쟁으로 서울시가지가 초토화됐을 때도 무사히 국보 1호의 자리를 지켰다. 그 후 여러 번 수리와 단장이 따랐고 2년 전에는 시민들이 접근하는 통로까지 생겼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사람들의 숨결이던가? 반가웠다. 그러나 왠지 불안했다. 가끔 노숙자들이 누각을 드나들며 잠도 자고 불도 지폈다. 화재가 염려스러웠다. 국보 1호라면서 이렇게 방치해도 되는지 의아했다.
지난 2월10일 밤. 어두운 그림자가 서쪽 벽을 타고 2층 누각으로 침입했다. 또 노숙자가 추위를 피해 들어왔나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침입자는 마루바닥에 무언가 쏟아 붓고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누각 안이 훤해지며 불길이 치솟았다. 무서웠다. 그러나 한 구석에 믿음이 있었다. “국보 1호이니 필경 경보가 울릴 것이다. 소방대가 닥치고 즉시 진화에 나서겠지. 그러면 마루와 천장은 약간 그을리겠지만 곧 꺼지겠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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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판이었다. 경보가 아닌 목격자 신고로 소방대가 출동하고 소방대는 건물 구조를 몰라 엉뚱한 곳에 호스의 물길을 뿜었다. 그동안 불길은 취약한 천장 속으로 스며들어 2층 누각 전체를 태우고 붕괴시켰다. 이 어처구니없는 일은 안전 불감(不感)과 무방비(無防備)에서 생겨났다. 안전 불감과 무방비는 결국 국보를 태우고 국민적 자존심마저 짓밟았다. 천년 세월을 살아온 숭례문 기둥은 이제 아래만 조금 남아 복원 재목으로도 쓸 수 없는 불구가 됐다. 그러나 그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 그의 흉한 모습은 숭례문 옆 빈터에 그대로 보존돼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방비’임을 일깨우는 상징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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