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건축’이란 이런 것일까. 도동서원 강당에 삼각대를 설치하고 24밀리 P/S렌즈로 건축물의
직각을 맞추었다. 곧게 선 두 개의 기둥 사이로 정료대, 환주문, 수월루가 일직선으로 늘어서고 기
둥 밖으로는 동·서재 두 건물의 지붕이 같은 길이로 들어온다.
흔들림을 막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2초 간격의 타이머로 조정하는 동안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엄격한 질서는 인공적인 건축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멀리 낙동강 건너 북쪽에 있는 안산(案山)
이 수월루 용마루 중심에, 잠미나루 양쪽의 나지막한 산들까지 강당 기둥에 거의 대칭으로 걸려 있었
다.
… 도동서원은 엄격한 도학자 한훤당 김굉필을 기념하여 창건되었다. 그는 도학정치의 실현을 위해
연산군의 사약을 달게 받은 전형적인 사림으로 숭앙된다. 창건주는 김굉필의 외증손이며, 영남학파
예론(禮論)의 최고봉인 한강 정구였다. 그 인물에 그 건축이라 할까?
<도동서원 리학의="" 건축적="" 담론="">. 김봉렬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5년에 건립된 도동서원이 주목을 받는 것은 서원이 가져야 할 성리학적 질서, 건
축적 규범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전사청 옆문을 통해 서원 앞마당으로 들어오게 돼 있지만, 예전에 유학자들이 출입하던 동선
을 따라 수월루에서 중정당(강당)으로 올라와보면 도동서원이 구현하고 있는 성리학적 건축규범이
어떤 것인지 금방 깨닫게 된다.
수월루 누각 밑에 서서 환주문을 바라보면 강당 앞을 밝히는 조명대인 ‘정료대’, 그 위의 ‘중정
당’과 ‘도동서원’ 현판 등이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좁은 돌층계를 오르면 환주문, 갓을 쓴 선비
라면 아무리 키가 작아도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는 높이다.
고개를 숙이면 환주문 문설주에 있는 꽃봉오리 모양의 돌조각이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내딛게 하고,
강당 앞마당으로 다시 좁은 포장로가 나타난다. 박석을 일렬로 깔아 만든 포장로 끝에는 해태인지 거
북인지 모를 우스꽝스러운 표정의 돌조각이 좁은 길을 두 갈래로 나눈다. 그 양쪽에는 강당으로 오르
는 좁은 돌층계가 놓였다.
중정당은 상당히 화려하고 높은 기단을 갖고 있다. 기단 아래 서서 강당을 올려다보면 고개를 완전
히 뒤로 젖혀야 할 정도로 높은 처마 밑에 ‘도동서원(道東書院)’이란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공
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의 이 현판은 아예 기단 밑에서 보라는 듯 거의 수평에 가깝게 붙어
있다.
강당 뒤편으로는 사당 영역이 자리잡았다. 강당 대청에서 뒷문을 열고 보면 사당으로 오르는 돌층계
와 사당 입구인 내삼문이 흐트러짐 없는 대칭을 이루고 있다.
“죽음으로써 도학의 기치를 세웠다”
한훤당 김굉필은 21세 때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글을 배웠으며, 이로써 정몽주김종직으로
이어진 성리학의 맥을 계승했다.
김종직은 수제자인 김굉필에게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마땅히 <소학>부터 배워야 하며, 광풍재
월(光風齎月)이 모두 이 책 속에 있다”며 <소학> 읽기를 권했다. 스승의 말대로 그는 35세까지 어린
이의 행실을 가르친 <소학>만을 읽었고,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했다.
26세에 과거에 급제한 그는 사림 출신의 관리답게 홍문관 등 주로 언론계통의 벼슬을 역임했다.
1498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도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었고, 1504년 갑자사화 때 끝
내 사약을 받았다. 그는 생전에 많은 후학들의 존경을 받아 조광조 김안국 성세창 등의 걸출한 제자
들을 길러냈으며, 이들은 조선조 사림파의 본류를 이루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난 뒤 김굉필은 당당하게 복권되었다. 이후 김굉필은 이언적, 이황, 정여
창, 조광조와 함께 ‘동방오현’으로 추앙되어 문묘에 배향되기에 이른다. 도동서원 앞에 있는 ‘신
도비명’은 그의 생애를 이렇게 평가한다.
“선생은 비록 높은 지위를 얻어서 도를 행하지 못하였고, 미처 책을 저술하여 가르침을 남기지는 못
하였으나, 능히 한 세상 유림의 으뜸 스승이 되었고, 죽음으로써 도학의 기치를 세웠다.”
유생들의 당쟁을 위한 아지트로 전락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순흥에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이후, 사학(私學)기관인
서원은 관학(官學)기관인 향교를 제치고 우후죽순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숙종(1674~1720)대에는 무려 650개에 이르게 되는데, 향교는 공자의 위패만을 모셨지만 서원은 그 지방
의 명유(名儒) 현인(賢人)들의 위패를 모실 수 있어 후손들의 명예를 높이는 데 훨씬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서원에는 면세 면역(免役) 등의 특권이 부여되었다. 마침내 서원은 고려시대의 사원(寺院)이 그랬듯
이 막대한 농장과 노비를 소유하고 주어진 특권을 남용해서 인근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는 탈법기
관, 양반 유생들의 당쟁을 위한 아지트로 전락하고 말았다.
어떤 이데올로기도 활력이랄까, 생명력은 기껏해야 100년을 가지 못해요. 그 이후는 방치하면 허물어
지고, 지키려고 하면 교조화되지요. … 조선이 개국하고 얼마 되지 않은 제3대 태종 때, 그러니 15세
기 초에는 무반(武班)은 이미 몰락한 상태였습니다.
윤학준. 《나의 양반문화 탐방기 1》
송시열(宋時烈)의 위패를 모신 화양서원(華陽書院)은 봄 가을로 지내는 향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화양묵패(華陽墨牌)라는 고지서를 발행했는데, 이를 받은 토호(土豪)나 백성들은 두려움에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고 한다. 소학>소학>소학>도동서원>
직각을 맞추었다. 곧게 선 두 개의 기둥 사이로 정료대, 환주문, 수월루가 일직선으로 늘어서고 기
둥 밖으로는 동·서재 두 건물의 지붕이 같은 길이로 들어온다.
흔들림을 막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2초 간격의 타이머로 조정하는 동안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엄격한 질서는 인공적인 건축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멀리 낙동강 건너 북쪽에 있는 안산(案山)
이 수월루 용마루 중심에, 잠미나루 양쪽의 나지막한 산들까지 강당 기둥에 거의 대칭으로 걸려 있었
다.
… 도동서원은 엄격한 도학자 한훤당 김굉필을 기념하여 창건되었다. 그는 도학정치의 실현을 위해
연산군의 사약을 달게 받은 전형적인 사림으로 숭앙된다. 창건주는 김굉필의 외증손이며, 영남학파
예론(禮論)의 최고봉인 한강 정구였다. 그 인물에 그 건축이라 할까?
<도동서원 리학의="" 건축적="" 담론="">. 김봉렬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5년에 건립된 도동서원이 주목을 받는 것은 서원이 가져야 할 성리학적 질서, 건
축적 규범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전사청 옆문을 통해 서원 앞마당으로 들어오게 돼 있지만, 예전에 유학자들이 출입하던 동선
을 따라 수월루에서 중정당(강당)으로 올라와보면 도동서원이 구현하고 있는 성리학적 건축규범이
어떤 것인지 금방 깨닫게 된다.
수월루 누각 밑에 서서 환주문을 바라보면 강당 앞을 밝히는 조명대인 ‘정료대’, 그 위의 ‘중정
당’과 ‘도동서원’ 현판 등이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좁은 돌층계를 오르면 환주문, 갓을 쓴 선비
라면 아무리 키가 작아도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는 높이다.
고개를 숙이면 환주문 문설주에 있는 꽃봉오리 모양의 돌조각이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내딛게 하고,
강당 앞마당으로 다시 좁은 포장로가 나타난다. 박석을 일렬로 깔아 만든 포장로 끝에는 해태인지 거
북인지 모를 우스꽝스러운 표정의 돌조각이 좁은 길을 두 갈래로 나눈다. 그 양쪽에는 강당으로 오르
는 좁은 돌층계가 놓였다.
중정당은 상당히 화려하고 높은 기단을 갖고 있다. 기단 아래 서서 강당을 올려다보면 고개를 완전
히 뒤로 젖혀야 할 정도로 높은 처마 밑에 ‘도동서원(道東書院)’이란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공
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의 이 현판은 아예 기단 밑에서 보라는 듯 거의 수평에 가깝게 붙어
있다.
강당 뒤편으로는 사당 영역이 자리잡았다. 강당 대청에서 뒷문을 열고 보면 사당으로 오르는 돌층계
와 사당 입구인 내삼문이 흐트러짐 없는 대칭을 이루고 있다.
“죽음으로써 도학의 기치를 세웠다”
한훤당 김굉필은 21세 때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글을 배웠으며, 이로써 정몽주김종직으로
이어진 성리학의 맥을 계승했다.
김종직은 수제자인 김굉필에게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둔다면 마땅히 <소학>부터 배워야 하며, 광풍재
월(光風齎月)이 모두 이 책 속에 있다”며 <소학> 읽기를 권했다. 스승의 말대로 그는 35세까지 어린
이의 행실을 가르친 <소학>만을 읽었고,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했다.
26세에 과거에 급제한 그는 사림 출신의 관리답게 홍문관 등 주로 언론계통의 벼슬을 역임했다.
1498년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도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었고, 1504년 갑자사화 때 끝
내 사약을 받았다. 그는 생전에 많은 후학들의 존경을 받아 조광조 김안국 성세창 등의 걸출한 제자
들을 길러냈으며, 이들은 조선조 사림파의 본류를 이루었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난 뒤 김굉필은 당당하게 복권되었다. 이후 김굉필은 이언적, 이황, 정여
창, 조광조와 함께 ‘동방오현’으로 추앙되어 문묘에 배향되기에 이른다. 도동서원 앞에 있는 ‘신
도비명’은 그의 생애를 이렇게 평가한다.
“선생은 비록 높은 지위를 얻어서 도를 행하지 못하였고, 미처 책을 저술하여 가르침을 남기지는 못
하였으나, 능히 한 세상 유림의 으뜸 스승이 되었고, 죽음으로써 도학의 기치를 세웠다.”
유생들의 당쟁을 위한 아지트로 전락
1542년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순흥에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이후, 사학(私學)기관인
서원은 관학(官學)기관인 향교를 제치고 우후죽순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숙종(1674~1720)대에는 무려 650개에 이르게 되는데, 향교는 공자의 위패만을 모셨지만 서원은 그 지방
의 명유(名儒) 현인(賢人)들의 위패를 모실 수 있어 후손들의 명예를 높이는 데 훨씬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서원에는 면세 면역(免役) 등의 특권이 부여되었다. 마침내 서원은 고려시대의 사원(寺院)이 그랬듯
이 막대한 농장과 노비를 소유하고 주어진 특권을 남용해서 인근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는 탈법기
관, 양반 유생들의 당쟁을 위한 아지트로 전락하고 말았다.
어떤 이데올로기도 활력이랄까, 생명력은 기껏해야 100년을 가지 못해요. 그 이후는 방치하면 허물어
지고, 지키려고 하면 교조화되지요. … 조선이 개국하고 얼마 되지 않은 제3대 태종 때, 그러니 15세
기 초에는 무반(武班)은 이미 몰락한 상태였습니다.
윤학준. 《나의 양반문화 탐방기 1》
송시열(宋時烈)의 위패를 모신 화양서원(華陽書院)은 봄 가을로 지내는 향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화양묵패(華陽墨牌)라는 고지서를 발행했는데, 이를 받은 토호(土豪)나 백성들은 두려움에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고 한다. 소학>소학>소학>도동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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