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는 베트남전 교훈도 잊었나
명분부족·장기화·경제 발목잡기 … 40년전 전쟁과 판박기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40년전 미국이 무리하게 정치적으로 시작한 베트남전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라크전쟁의 정치·경제적 양상과 몹시 닮았다.
통킹만 사건(미국이 일부러 월맹을 자극, 전쟁을 유도했다는 설이 다수)으로 1964년 시작된 베트남전은 1972년까지 8년간 이어졌다. 부시 대통령도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WMD)를 갖고 있다며 전쟁을 시작했지만 후세인 사형집행까지 이뤄진 지금까지도 그런 무기는 찾지 못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단기 군사작전으로 끝낼 거라며 시작한 베트남전은 최대 주둔병력 50만명, 연인원 874만4000명이 투입된 ‘수렁에 가까운 전쟁’이었다. 현재 이라크전도 언제 철군할 수 있을지 누구도 모르는 수렁에 빠져 있다. 하지만 두 전쟁은 정치적 양상에 비하면 경제양상은 판박이에 가깝다. 미 국무부가 분석한 베트남전의 경제적 영향(usinfo.state.gov)을 토대로 이라크전과 비교해 보자.
◆전쟁+고유가→인플레 압력 가중 =
1963년 암살된 케네디에 이어 취임한 존슨 대통령은 메디케어(고령자 의료보장), 푸드 스탬프(저소득층 식량지원), 교육지원 등 다양한 정책을 도입했다. 모두 예산의 추가집행을 필요로 하는 ‘돈이 드는’ 사업이었다.
그로부터 1년뒤. 베트남전이 터지고 주둔미군이 늘면서 전비지출도 늘었다. 선심성 정책에 돈을 쓰고 전쟁비용이 풀려나면서 단기적으로 경기는 부양되는 듯했다. (이라크전 초기에도 ‘전쟁은 오히려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잔치는 곧 악몽이 됐다. 1960년대 말이 되면 선심성 정책과 전비마련을 위해 세금을 올려야 했는데 미 정부는 그러지 못했다. 인플레이션이 왔다.
1973~1974년 석유생산국기구(OPEC)가 석유수출을 통제하자 기름값은 치솟았고 공급부족이 찾아왔다. 석유파동은 인플레에 기름을 끼얹었다. 석유수출통제가 풀렸는데도 기름값은 내려갈 줄 몰랐다. 인플레 압력이 가중되는 가운데 급기야 실업률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부 재정적자는 늘고 해외시장에서의 경쟁은 격화됐으며 주가는 미끄러져 갔다.
◆스테그플레이션 단어의 등장 =
1975년까지 베트남전이 계속되는 사이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에 휘말리면서 중도 낙마(1973년)했지만 1975년까지 이어지는 전쟁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는 수십명이 인질로 붙잡히는 사태가 벌어지는 등 미국이 총체적 위기에 빠진 듯했다. 고급기술과 가격경쟁력을 갖춘 자동차, 철강, 반도체가 물밀 듯 들어오면서 미국의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갔다.
‘스테그플레이션’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했다. 경제성장은 정체되는데(스테그네이션) 물가는 가파르게 인상하는(인플레이션)을 합친 ‘스테그네이션’은 실업률 인상과 같이 와 그 파장을 더했다. 사람들은 물가가 더 오를 것이라 예상하면서 사재기 시작했다. 고물가가 더 높은 물가를 불러 임금인상을 촉발하고 임금이 높아지자 물가는 더 오르는, 상승의 나선형이 계속 됐다. 급기야 사회보장(Social Security), 소비자 가격지수 등을 동원해 정부가 임금체결시 상한선을 넘지 못하도록 직접 개입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재정적자에 허덕이는 정부가 기금조성을 통해 재원마련에 나서자 정부부채가 늘게 되고 이는 곧 금리인상이 돼 돌아왔다. 기업과 가계의 고통은 가중됐다. 치솟는 에너지가격과 금리 앞에 기업투자는 생기를 잃고 실업률은 높아만 갔다.
◆가까스로 인플레 잡았지만 경기후퇴 불러와 =
전쟁은 끝났지만 1977년 취임한 카터 대통령에겐 국내 상황이 전쟁터보다 나을 게 없었다. 카터는 정부 지출을 늘려 경기침체와 실업을 잡으려 했다. 인플레를 잡는데는 ‘자발적 임금·가격’을 동원했다. 하지만 두 방법 모두 실패에 가까웠다. 차라리 노선과 운임을 강력 통제하던 항공, 운송 등 산업에서 규제완화를 도입한 것이 부분적으로 도움이 됐다. 하지만 인플레를 잡는 무엇보다 강력한 도구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로 1979년 FRB는 강력하게 자금지원 통제를 시작했다. FRB가 금리를 올리자 뜻밖에 소비와 자금대출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경제는 재빨리 깊은 경기후퇴(recession)으로 빠져들었다. 전년 대비 기업도산비율은 50%를 넘어섰다. 농산물 가격은 떨어지고 수출은 안되는 가운데 금리는 오르면서 특히 농가의 피해가 컸다. 미국 경제는 3년간이나 경기후퇴에 빠져 있었다.
인플레가 잡히고 경제성장이 제궤도에 오른 것은 1983년에 와서야 가능했다. 베트남전쟁이 끝나고도 10년이 더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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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부족·장기화·경제 발목잡기 … 40년전 전쟁과 판박기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40년전 미국이 무리하게 정치적으로 시작한 베트남전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라크전쟁의 정치·경제적 양상과 몹시 닮았다.
통킹만 사건(미국이 일부러 월맹을 자극, 전쟁을 유도했다는 설이 다수)으로 1964년 시작된 베트남전은 1972년까지 8년간 이어졌다. 부시 대통령도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WMD)를 갖고 있다며 전쟁을 시작했지만 후세인 사형집행까지 이뤄진 지금까지도 그런 무기는 찾지 못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단기 군사작전으로 끝낼 거라며 시작한 베트남전은 최대 주둔병력 50만명, 연인원 874만4000명이 투입된 ‘수렁에 가까운 전쟁’이었다. 현재 이라크전도 언제 철군할 수 있을지 누구도 모르는 수렁에 빠져 있다. 하지만 두 전쟁은 정치적 양상에 비하면 경제양상은 판박이에 가깝다. 미 국무부가 분석한 베트남전의 경제적 영향(usinfo.state.gov)을 토대로 이라크전과 비교해 보자.
◆전쟁+고유가→인플레 압력 가중 =
1963년 암살된 케네디에 이어 취임한 존슨 대통령은 메디케어(고령자 의료보장), 푸드 스탬프(저소득층 식량지원), 교육지원 등 다양한 정책을 도입했다. 모두 예산의 추가집행을 필요로 하는 ‘돈이 드는’ 사업이었다.
그로부터 1년뒤. 베트남전이 터지고 주둔미군이 늘면서 전비지출도 늘었다. 선심성 정책에 돈을 쓰고 전쟁비용이 풀려나면서 단기적으로 경기는 부양되는 듯했다. (이라크전 초기에도 ‘전쟁은 오히려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잔치는 곧 악몽이 됐다. 1960년대 말이 되면 선심성 정책과 전비마련을 위해 세금을 올려야 했는데 미 정부는 그러지 못했다. 인플레이션이 왔다.
1973~1974년 석유생산국기구(OPEC)가 석유수출을 통제하자 기름값은 치솟았고 공급부족이 찾아왔다. 석유파동은 인플레에 기름을 끼얹었다. 석유수출통제가 풀렸는데도 기름값은 내려갈 줄 몰랐다. 인플레 압력이 가중되는 가운데 급기야 실업률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정부 재정적자는 늘고 해외시장에서의 경쟁은 격화됐으며 주가는 미끄러져 갔다.
◆스테그플레이션 단어의 등장 =
1975년까지 베트남전이 계속되는 사이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에 휘말리면서 중도 낙마(1973년)했지만 1975년까지 이어지는 전쟁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는 수십명이 인질로 붙잡히는 사태가 벌어지는 등 미국이 총체적 위기에 빠진 듯했다. 고급기술과 가격경쟁력을 갖춘 자동차, 철강, 반도체가 물밀 듯 들어오면서 미국의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갔다.
‘스테그플레이션’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했다. 경제성장은 정체되는데(스테그네이션) 물가는 가파르게 인상하는(인플레이션)을 합친 ‘스테그네이션’은 실업률 인상과 같이 와 그 파장을 더했다. 사람들은 물가가 더 오를 것이라 예상하면서 사재기 시작했다. 고물가가 더 높은 물가를 불러 임금인상을 촉발하고 임금이 높아지자 물가는 더 오르는, 상승의 나선형이 계속 됐다. 급기야 사회보장(Social Security), 소비자 가격지수 등을 동원해 정부가 임금체결시 상한선을 넘지 못하도록 직접 개입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재정적자에 허덕이는 정부가 기금조성을 통해 재원마련에 나서자 정부부채가 늘게 되고 이는 곧 금리인상이 돼 돌아왔다. 기업과 가계의 고통은 가중됐다. 치솟는 에너지가격과 금리 앞에 기업투자는 생기를 잃고 실업률은 높아만 갔다.
◆가까스로 인플레 잡았지만 경기후퇴 불러와 =
전쟁은 끝났지만 1977년 취임한 카터 대통령에겐 국내 상황이 전쟁터보다 나을 게 없었다. 카터는 정부 지출을 늘려 경기침체와 실업을 잡으려 했다. 인플레를 잡는데는 ‘자발적 임금·가격’을 동원했다. 하지만 두 방법 모두 실패에 가까웠다. 차라리 노선과 운임을 강력 통제하던 항공, 운송 등 산업에서 규제완화를 도입한 것이 부분적으로 도움이 됐다. 하지만 인플레를 잡는 무엇보다 강력한 도구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로 1979년 FRB는 강력하게 자금지원 통제를 시작했다. FRB가 금리를 올리자 뜻밖에 소비와 자금대출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경제는 재빨리 깊은 경기후퇴(recession)으로 빠져들었다. 전년 대비 기업도산비율은 50%를 넘어섰다. 농산물 가격은 떨어지고 수출은 안되는 가운데 금리는 오르면서 특히 농가의 피해가 컸다. 미국 경제는 3년간이나 경기후퇴에 빠져 있었다.
인플레가 잡히고 경제성장이 제궤도에 오른 것은 1983년에 와서야 가능했다. 베트남전쟁이 끝나고도 10년이 더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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