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시 백두대간인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1625km의 산줄기로 이어져
10세기부터 나타난 전통 지리관 … 한반도의 등뼈이자 생태축
백두대간(白頭大幹)을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백두산에서 비롯된 큰 산줄기’라는 뜻이다. 이 산줄기는 백두산에서 남으로 낭림산-금강산-설악산-오대산을 거쳐 태백산에 이른 뒤 다시 남서쪽으로 소백산-월악산-속리산-덕유산을 거쳐 지리산에 이른다.
이 땅의 대표적인 산들을 망라하는 이 산줄기는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장장 1625km, 남한 구간인 지리산에서 향로봉까지만 해도 690km에 달한다. 백두대간은 두만강·압록강·한강·낙동강 등 주요 강의 발원지이며 한반도의 생활권을 동과 서로 나누는 경계이자 생태계의 중심축이다.
백두산에서 지리산을 잇는 산줄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10세기 도선대사가 지은 ‘옥룡기’에서 이미 나타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 가운데 하나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권 근·1402년·조선 초의 세계지도)의 한반도에는 백두대간이 선명하게 표시돼 있다. 이후 그려진 여러 지도에서 그 흐름이 이어진다. 물론 백두대간을 가장 잘 표현한 지도는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이다.
‘백두대간’이란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이 익의 ‘성호사설’이며 이 개념이 ‘1대간 1정간 13정맥’의 모습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은 1800년대 초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산경표’에 이르러서이다.
산은 늘 하나의 ‘흐름’이다 000
백두대간은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즉 산을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로 설명된다. 더 쉽게 표현하면 우리집 앞마당에서 물을 건너지 않고 백두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얘기다.
이 개념을 조금만 확대해 보면 육지로 이어져 있는 대륙의 모든 산들이 에베레스트산과 하나의 유기체적 계통을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리산과 히말라야, 알프스가 결코 단절된 산군이 아닌 것이다.
우리 전통의 산수관으로 보면 산은 늘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된다. 산을 흐름으로 파악하게 한 철학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본다. 길 내는 것을 조심하고, 집터를 잡고 집의 크기를 정하는 데 심려를 다 했던 것도 이런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고산자 김정호 선생이 애국을 뭐라고 그랬는지 아십니까? 첫째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고산자는 당시 6m도 넘는 ‘대동여지도’를 만들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의 고산자, 고 이우형 선생(산악인·고지도연구가)의 말이다.
일제 강점기 때 도입된 ‘산맥’ 개념 000
‘산은 물을 건너지 않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우리 전래의 산줄기 개념이 ‘산맥’으로 바뀐 것은 1908년 일제 통감부 치하에서다. ‘한반도 토끼 형국론’으로 유명한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가 14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조선 땅을 답사한 뒤 탐사보고서를 펴냈고 이 내용이 그대로 조선 지리 교과서에 실리게 된 것이다.
역사 속에 묻혀버릴 뻔했던 백두대간 개념은 고 이우형 선생이 1980년대 초 인사동 헌책방에서 1913년 조선광문회가 활자본으로 간행한 ‘산경표’를 발견한 이후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인의 지론은 “우리 전래의 과학적 지리인식 체계를 버리고 일제가 강요한 산맥 개념만 학생들에게 가르쳐서야 되겠는가’라는 것이었다. 고산자 김정호에 대한 왜곡된 역사를 교과서에서 바로잡기도 했던 이우형 선생은 백두대간이 교과서에 실리는 것을 보지 못하고 지난 2001년 세상을 떠났다.
백두대간은 오랜 세월 이 땅을 살다간 선조들의 전통적인 지리관이었다. 이는 어느 전문 학자에 의해 발표된 이론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실생활에서 쌓인 문화적, 지리적 경험이 쌓인 개념인 것이다.
백두대간이라는 자연 인식 체계는 산을 생명이 있는 나무에 비유하여 큰 줄기(대간)와 작은 줄기(정간), 그리고 가지(정맥)로 나누어 국토 전체를 유기적으로 바라본다.
태백산맥의 생태적 중요성도 높아 000
서양식 지리학으로 볼 때 백두대간이 완벽한 지리학적 개념은 아니다. 분수령(分水嶺)을 중심으로 지형을 해석하기 때문에 수계(水系)를 나타내는 데는 뛰어나지만 지질사적인 관점이 없어 한반도의 산들 중에서 제일 젊은 백두산을 ‘모든 산의 뿌리’로 여기는 등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또 백두대간이 지나치게 강조된 나머지 ‘태백산맥’의 생태적 중요성이 간과되고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태백산맥은 백두대간 일부와 낙동정맥으로 구성되며 빙하기 때는 부산 금정산에서 오륙도, 대마도를 거쳐 일본 본토를 이었던 분수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두대간의 중요성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다. 백두대간이 가진 간단하고 정연한 논리, 천년을 이어온 지리 인식체계, 땅에 대한 유기체적 사고에 현대 지리학자들도 감탄해마지 않는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이도원 교수는 이를 “줄기가 땅으로 이어지면 뿌리가 위계를 이루며 나누어지고 영영소와 물을 흡수하는 기능으로 이어진다’며 ‘결국 핵심은 줄기가 아니라 줄기를 지탱하고 있는 뿌리와 땅’이라고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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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1625km의 산줄기로 이어져
10세기부터 나타난 전통 지리관 … 한반도의 등뼈이자 생태축
백두대간(白頭大幹)을 글자 그대로 풀어보면 ‘백두산에서 비롯된 큰 산줄기’라는 뜻이다. 이 산줄기는 백두산에서 남으로 낭림산-금강산-설악산-오대산을 거쳐 태백산에 이른 뒤 다시 남서쪽으로 소백산-월악산-속리산-덕유산을 거쳐 지리산에 이른다.
이 땅의 대표적인 산들을 망라하는 이 산줄기는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장장 1625km, 남한 구간인 지리산에서 향로봉까지만 해도 690km에 달한다. 백두대간은 두만강·압록강·한강·낙동강 등 주요 강의 발원지이며 한반도의 생활권을 동과 서로 나누는 경계이자 생태계의 중심축이다.
백두산에서 지리산을 잇는 산줄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10세기 도선대사가 지은 ‘옥룡기’에서 이미 나타난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 가운데 하나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권 근·1402년·조선 초의 세계지도)의 한반도에는 백두대간이 선명하게 표시돼 있다. 이후 그려진 여러 지도에서 그 흐름이 이어진다. 물론 백두대간을 가장 잘 표현한 지도는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이다.
‘백두대간’이란 용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이 익의 ‘성호사설’이며 이 개념이 ‘1대간 1정간 13정맥’의 모습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된 것은 1800년대 초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산경표’에 이르러서이다.
산은 늘 하나의 ‘흐름’이다 000
백두대간은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즉 산을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로 설명된다. 더 쉽게 표현하면 우리집 앞마당에서 물을 건너지 않고 백두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얘기다.
이 개념을 조금만 확대해 보면 육지로 이어져 있는 대륙의 모든 산들이 에베레스트산과 하나의 유기체적 계통을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리산과 히말라야, 알프스가 결코 단절된 산군이 아닌 것이다.
우리 전통의 산수관으로 보면 산은 늘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된다. 산을 흐름으로 파악하게 한 철학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본다. 길 내는 것을 조심하고, 집터를 잡고 집의 크기를 정하는 데 심려를 다 했던 것도 이런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고산자 김정호 선생이 애국을 뭐라고 그랬는지 아십니까? 첫째는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고산자는 당시 6m도 넘는 ‘대동여지도’를 만들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 시대의 고산자, 고 이우형 선생(산악인·고지도연구가)의 말이다.
일제 강점기 때 도입된 ‘산맥’ 개념 000
‘산은 물을 건너지 않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우리 전래의 산줄기 개념이 ‘산맥’으로 바뀐 것은 1908년 일제 통감부 치하에서다. ‘한반도 토끼 형국론’으로 유명한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가 14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조선 땅을 답사한 뒤 탐사보고서를 펴냈고 이 내용이 그대로 조선 지리 교과서에 실리게 된 것이다.
역사 속에 묻혀버릴 뻔했던 백두대간 개념은 고 이우형 선생이 1980년대 초 인사동 헌책방에서 1913년 조선광문회가 활자본으로 간행한 ‘산경표’를 발견한 이후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고인의 지론은 “우리 전래의 과학적 지리인식 체계를 버리고 일제가 강요한 산맥 개념만 학생들에게 가르쳐서야 되겠는가’라는 것이었다. 고산자 김정호에 대한 왜곡된 역사를 교과서에서 바로잡기도 했던 이우형 선생은 백두대간이 교과서에 실리는 것을 보지 못하고 지난 2001년 세상을 떠났다.
백두대간은 오랜 세월 이 땅을 살다간 선조들의 전통적인 지리관이었다. 이는 어느 전문 학자에 의해 발표된 이론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실생활에서 쌓인 문화적, 지리적 경험이 쌓인 개념인 것이다.
백두대간이라는 자연 인식 체계는 산을 생명이 있는 나무에 비유하여 큰 줄기(대간)와 작은 줄기(정간), 그리고 가지(정맥)로 나누어 국토 전체를 유기적으로 바라본다.
태백산맥의 생태적 중요성도 높아 000
서양식 지리학으로 볼 때 백두대간이 완벽한 지리학적 개념은 아니다. 분수령(分水嶺)을 중심으로 지형을 해석하기 때문에 수계(水系)를 나타내는 데는 뛰어나지만 지질사적인 관점이 없어 한반도의 산들 중에서 제일 젊은 백두산을 ‘모든 산의 뿌리’로 여기는 등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또 백두대간이 지나치게 강조된 나머지 ‘태백산맥’의 생태적 중요성이 간과되고 있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태백산맥은 백두대간 일부와 낙동정맥으로 구성되며 빙하기 때는 부산 금정산에서 오륙도, 대마도를 거쳐 일본 본토를 이었던 분수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두대간의 중요성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다. 백두대간이 가진 간단하고 정연한 논리, 천년을 이어온 지리 인식체계, 땅에 대한 유기체적 사고에 현대 지리학자들도 감탄해마지 않는다.
서울대 환경대학원 이도원 교수는 이를 “줄기가 땅으로 이어지면 뿌리가 위계를 이루며 나누어지고 영영소와 물을 흡수하는 기능으로 이어진다’며 ‘결국 핵심은 줄기가 아니라 줄기를 지탱하고 있는 뿌리와 땅’이라고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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