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월 Peter Kurer 같은 UBS 대부분 임원들은 휴가를 가도 되겠다고 느꼈다.
몇 달간의 소동 사이 인하우스 헤지펀드가 문을 닫고 당시 CEO가 퇴출된 후였다. 쿠러씨는 UBS가 위기를 헤쳐나왔다는 자신감 속에 지중해로 요트여행을 떠났다.
그가 Corsica에서 Zurich로 돌아왔을 때 (위기는)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걸 알게 됐다. 새 CEO인 Marcel Rohner와 급하게 잡힌 미팅을 갖고 서야 쿠러씨는 UBS가 처한 곤경의 상태를 알게 됐다.
IB 부문에서 문제가 된 미국 주택시장 관련 증권에 UBS는 750억달러 상당이 노출돼 있었다. 주택관련 증권시장이 말라버리면서 UBS는 이 자산을 팔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잘 운영돼 온 것으로 알려진 이 은행이 역사상 최악의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8개월 동안 쿠러씨는 휴가를 가지 못했으며 당분간도 갈 가능성이 높지 않다. 이제 위기에서 UBS를 구해내느냐 마느냐는 쿠러씨에게 달렸다. 이번주 주주총회에서 그는 Marcel Ospel의 뒤를 이어 그룹회장으로 인준될 예정이다. 그가 지난 10월 이후 370억달러의 신용자산을 상각하고 127억달러를 전략적 투자자로부터 유치했으며 앞으로 주주들에게 150억스위스프랑 상당을 추가발행하도록 요청할 예정인 UBS의 방향타를 잡게 된 것이다.
UBS는 신용위기 속에 유럽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금융기관이 됐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 은행이 갖고 있던 명성에 치명상을 입은 것이다. 이번주 UBS는 금융당국에 제출됐던 내부 보고서의 요약본을 공개해 이 문제에 대해 스스로 설명을 할 계획이다. 하지만 파이낸셜타임스는 취재를 통해 UBS의 이상한 위험관리(risk management), 역기능 관리구조, 일련의 부적절한 의사결정이 현재의 위기상황에 원인을 제공했으며 어느 누구도 상태가 심각해질 때까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UBS의 현재 손실은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이 녹아내리면서 촉발됐다. 하지만 이 은행의 몰락의 씨앗은 10년전에 이미 뿌려져 있었다. 그것은 1998년 헤지펀드인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 파산에 노출돼 10억 스위스프랑 손실을 입은 때였다. 이 사태로 UBS 임원들은 ‘앞으로 다시는 IB 부문이 UBS의 초고액 자산 PB 고객들의 신뢰를 잃어버릴만큼 위험에 노출되어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가졌다.
UBS는 은행의 위험노출 정도를 검사하기 위한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 취리히 소재 UBS 본사가 직접 관장한 이 조치를 통해 UBS는 세계에서 가장 신중한 대출기관이라는 명성을 얻게 됐다. 하지만 디자인(조치의 구조?)에 결함이 있었다. 이 조치는 거래 상대방 또는 대출자의 부도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UBS는 은행의 재무제표에 반영해야할 시장의 위험, 즉 시장의 출렁거리는 영향에 덜 관심을 기울였다.
게다가 은행은 PB를 통해 예치된 싼 자금을 이용해 IB 부분이 이런 신용상품을 투자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통해 UBS는 보수적인 대출기준에도 불구하고 큰 이익을 남겼다. “당시 Peter Wuffli와 그룹 임원 이사회는 ‘어이, 우리는 아무 위험도 없이 IB를 운영할 수 있다구’라고 말했다”고 당시 임원은 말했다. “그들은 ‘비밀소스(음식점 등의)’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 10년 사이 UBS는 예의 그 신중함을 시험받게 된다.
금융시장에 새로운 동력이 등장한 것이다. 거액 투자자들이 헤지펀드업계에 돈을 펌프질하고 있었고 UBS의 많은 사람들이 행동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2004년말, UBS의 최고 명석한 채권투자가 가운데 한 명인 Michael Hutchins는 IB부문장인 John Costas에게 접근해 신용시장에 초점을 맞춘 새 헤지펀드 부서를 만들자는 계획을 제출했다. 살로몬 브러더스 소속 트레이더이기도 했던 Hutchins는 브루클린·뉴욕 등의 비인기 부동산 자산을 매입한 뒤 이를 재포장해 투자자들에게 넘기는 것으로 UBS에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는 또한 과감한 투자를 일삼기도 했는데 이를테면 2001년 9·11테러 직후 미국의 금리가 떨어질 것이라는데 베팅한 사례 같은 것이다.
과거 동료들은 ‘위험관리를 취리히 본사가 통제하는 상황에서 UBS가 어떻게 공격저인 베팅을 할 수 있을지를 Hutchins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첫 번째 트릭은 다음과 같다.
트리플 A 등급 채권을 사되 2%의 손해를 감수하고 이 채권의 위험에 대한 반대 protection을 매입하는 것이다. UBS의 위험모델에 따르면 트리플 A 채권은 액면가의 98% 이하로는 절대 받지 않는다. 그리고 추가 protection을 매입하면 이 자산은 거의 위험이 없는(risk-free) 것으로 간주된다.
Hutchins이 헤지펀드 설립을 위해 속도를 올리고 있을 때 UBS 최고경영진 역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2004년 여름경 이 은행은 맥킨지와 거대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그것은 UBS 비즈니스 모델을 평가하고 간극을 메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실무그룹은 전직 맥킨지의 컨설턴트인 CEO Wuffli가 이끌고 있었다. 또한 필라델피아 채권 매매상에서 시작해 UBS에서 초고속 승진을 통해 IB부문을 맡고 있던 Costas도 포함돼 있었다.
이 실무그룹의 결론 가운데 하나는 UBS가 헤지펀드처럼 대안적이지만 위험한 투자와 성장 기회를 묶는 일이었다. 하지만 임원들은 이미 회사 수익의 절반을 내고 있는 IB 부문이 추가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걱정스러워했다. 실무그룹은 향후 추가 위험부담은 IB가 고객거래를 집행하기 위해(for the purpose of executing trades for cliednts) UBS가 자금을 투입해야하는 경우로 제한했다. 헤지펀드를 설립해 제3자 돈으로 투자를 한다면 추가 위험부담없이 헤지펀드에 편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하우스 헤지펀드 설립 계획이 모양을 갖춰감에 따라 극적인 트위스트가 있었다. 2005년 3월 Costas는 Wuffli에게 자신이 직접 이 벤처(헤지펀드)를 운용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Wuffli가 곤란한 입장에 처했다. 만약 Wuffli가 동의한다면 IB 부문 최고위급에 공석이 생기는 것이었고 만약 그가 반대한다면 UBS 미국 사업 구축을 위해 Costas가 떠날 가능성이 있었다.
동시에 COstas는 새 CEO를 물색하고 있는 모건 스탠리와 얘기가 오가고 있었다. Costas가 회사를 떠날까 두려워진 Wuffli는 Dillon Read Capital Management(DRCM)라고 이름붙여진 헤지펀드 운용을 Costas에게 맡겼다. DRCM 설립 소식은 UBS 구성원들의 상반된 반응을 불러왔다. 많은 경우 불만을 터뜨렸다. 이 헤지펀드의 관대한 임금지불구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당시 UBS가 드디어 채권부문에서 경쟁자들과의 간극을 메울 수 있어 기뻤다고 회상했다.
이제 와서 UBS 임원들은 DRCM를 설립한 것이 주의를 분산한 것이었으며 사업 규모를 과소평가한 것이라고 인정한다. 당시 희망사항은 DRCM이 50억달러의 외부자금을 끌어오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13억달러 가량을 유치했다. UBS 스스로 종자돈으로 30억달러를 투입했으며 트레이더들이 거래하던 자산도 넘겨줬다. 돈을 빌린 뒤 이 헤지펀드는 600억달러 상당의 포지션을 운용했으며 이는 UBS로부터 제공된 차입(leverage)의 75%에 해당했다. 19개월 동안 UBS와 고객들 모두에게 DRCM는 상당한 고수익의 벤처였고 IB부문에서 떠안고 있던 위험의 총량도 감소해갔다. 전략은 제대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Costas와 Hutchins가 떠나고 난 뒤 IB를 맡을 인력풀이 매우 얕아진 상태였다. UBS는 equity 담당인 Huw Jenkins를 택했다.
UBS는 이미 equity 부문에서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그래서 전략적 우선권은 채권부문에 가 있었다(채권 부문을 키워야겠다는 의미).
채권부문은 equity나 M&A 부문 성장속도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고 경쟁자들에 뒤져 있었다. 글로벌 채권 붐이 탄력을 얻으면서 UBS는 당혹스러웠다. 또 다시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어떻게 UBS의 신중한 철학을 버리지 않으면서 의식적으로 위험을 더 떠안은 경쟁자들과의 간극을 따라잡을 것인가.
UBS는 또 다른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DRCM이 채권부문의 유능한 트레이더들을 빨아들여 대체인력을 구하기 상당히 어렵도록 만들고 있는 점이었다. 반면 이 은행의 위험관리(리스크매니지먼트) 부서는 너무나 조심스런 접근방식으로 인해 banker들과 트레이더들을 화나게 만들고 있었다.
“그 부서는 위험을 과도하게 언급하는 바람에 신뢰도를 상당히 잃어버렸다”고 당시 은행경영 사정에 밝은 인사는 말했다.
은행 사람들은 UBS가 더 큰 문제를 무시하면서까지 사모대출(private equity loans)에 다가가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는 쓰나미가 몰려와 모든 사람들을 쓸어가고 있는데도 바닷가에 앉아 모래알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Jenkins는 채권부문에서 확장해야할 부문 3가지를 추려냈다. 이는 각각 신흥시장, 상품(commodity) 그리고 증권화(securitisation)이었다. 특히 마지막 증권화부문은 UBS를 빠르게 키워갔지만 동시에 복잡한 영역으로 끌고 들어갔으니 바로 CDO였다.
수년동안 IB들은 수백만건의 주택대출을 퍼올려(scooping up) 이를 묶어 특수신용증권(specialized credit securities)로 만들었다. 이는 구조화를 통해 투자자로 하여금 자신이 얼마만큼의 위험을 떠안을 것인가 선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용버블이 모멘텀을 쌓아감에 따라 UBS 트레이더들은 소위 CDO 부문의 가장 안전한 부문의 판매를 중단했다. 이는 ‘super senior’라고 불리며 트리플 A 등급을 받았다.
Hutchins과 다른 트레이더들이 그랬듯이 CDO 담당부서는 super senior를 구조화해서 최초 2% 손실고리에 걸려들지 않도록 했다. UBS가 걱정했듯이 이것은 관련 증권들이 ‘무위험’이 됐다는 의미였고 위험관리 보고서에도 등재되지 않았다.
2007년 여름이 되면 UBS는 IB 각 부문에서 200억달러가 넘는 super senior CDO를 떠안고 있었다. 놀랍게도 고위 IB 임원들조자 8월에 시장이 급변하기까지 이런 CDO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하지만 이 은행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위험을 떠안고 있는 곳은 CDO 담당부서만이 아니었다. UBS 채권부서도 은행의 여유자금을 가지고 유동자산(liquid assets)에 투자하고 있었다. 이 투자대상에는 super senior 등급의 CDO도 있었다. 이것은 UBS의 최소 3개부서 이상이 미국의 모기지 시장에 노출된 위험을 쌓고 있었다는 의미다.
Ospel씨(전 UBS 회장)는 결과물이 불만스러웠다. 그는 UBS를 최고의 IB로 만든다는 목표였다. 2006년 하반기 3시간 동안 이어진 UBS 화상회의에서 그는 700여명의 최고임원들에게 “아직도 채권부문 사업이 공사중이라는 사실에 진저리를 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채권부문이 확대되도록 하는 압력을 더했다. 2007년 1분기까지 채권부문의 수익(revenue)은 전년동기 대비 200%나 늘어났다.
몇몇 애널리스트들은 이런 확장속도에 의문을 표시했다. UBS 자체 감독이사회(supervisory board) 또한 임원이사회(executive board)에 재무제표가 이렇게 빨리 늘어나고 있는가 의문을 표시했다. 하지만 스위스와 해외 비즈니스 고위인사로 구성됐지만 최근까지는 은행원(banker)를 한명도 포함하고 있지 않았던 당시 이사회는 쉽게 설득됐고 결국 UBS는 사상 최대의 이익을 남겼다.
UBS의 채권부분 사업이 급성장함에 따라 경쟁업체들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2007년 2월 영국 거대은행인 HSBC는 미국 서브프라임 대출영업에서 손실을 본 뒤 수익감소를 통해 투자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 수익감소 경고를 들은 다른 은행들도 서둘러 자신의 위험노출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DRCM 역시 마찬가지였다.
5월이 되면 DRCM 임원들은 한 가지 실험을 하기로 결정한다. 가장 복잡한 서브프라임 CDO 1억달러 상당을 시장에 내놓아 얼마를 받을 수 있는가 보기 위해서였다. 이 시도를 통해 DRCM은 하루만에 5000만달러의 손실을 보았다.
Hutchins는 개인적으로 40억달러 상당의 서브프라임 CDO 포트폴리오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3주가 걸린 이 재평가 결과 2억400만달러의 평가절하로 나타났다.
손실에 충격을 받는 한편 다른 DRCM 임원사이의 첨예한 긴장 속에 UBS는 재빨리 행동에 나섰다. DRCM은 1주일간 폐쇄한 뒤 IB부문에 재흡수됐다. Costas의 업무도 은행 자문역으로 줄어들었다.
DRCM의 매우 복잡한 포지션이 밝혀진 것은 매니지먼트 타임의 배수구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모르겠음 : Unravellin DRCM''s highly complex positions was to prove a drain on management time). 하지만 실제로는, 한번에 1억2700만달러 손실을 본 것은 UBS로서는 쉽게 흡수할 수 있는 규모였다. Wuffli는 DRCM의 충격은 제한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Ospel과 다른 임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6월말이 되어서 부서장들이 스페인 발렌시아에 모였다. 이곳에서의 이사회에서 Wuffli는 탄핵됐고 Rohner가 그의 자리를 꿰찼다. 임원들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는 씨앗을 초기에 뜯어냈다고 생각하면서 휴가를 즐겼다. 하지만 훨씬,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다가오고 있었다. DRCM을 청산한 것은, UBS 직원의 표현에 따르자면 타이타닉호가 침몰하고 있는데 갑판 위의 쏟은 우유를 닦아낸 것에 불과했다.
신용거품이 쌓여감에 따라 이 거품이 꺼질 지 모른다는 공포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UBS는 그 사실을 모르는 듯 했다. 스위스 연방은행 위원회(EBK)의 Daniel Zuberbuhler 사무국장(director)은 UBS의 미국 부동산 시장 노출 위험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2007년 3월 UBS는 서브프라임에 매우 적은 위험만 노출돼 있다고 답해왔다.
“이 대답은 결과적으로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UBS는 자신의 헤지를 지나치게 고평가했다”고 Zuberbuhler는 이달 말했다.
UBS 내부 사람들은 지난해 8월까지도 도매시장이 완전히 얼어붙고 UBS가 super senior CDO에 엄청난 포지션을 갖고 있어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닫지 못했다는데 대체로 동의한다. 이 때가 되면 서브프라임 자산을 팔기에는 너무 늦어버렸고 서브프라임 지수에 걸려 있는 헤지를 풀 수도 없다고 UBS 임원들은 결론내렸다. 대신 UBS는 서브프라임 벨류에이션이 붕괴할 경우 물러날 수 있도록 신흥시장의 자산등급(asset classes)에 숏 포지션을 취했다(took out short position). 하지만 이 자산등급은 랠리를 이어갔고 UBS의 손실은 더욱 커졌다.
10월, UBS는 최초 손실을 공개했는데 그 액수는 약 44억달러. Jenkins이 사임했고 Rohner가 임시로 그 직책을 맡았다. 12월 100억달러의 추가손실 발표를 준비하면서 Ospel과 다른 임원들, 그리고 Kurer씨까지 포함된 가운데 싱가포르 국부펀드로부터 긴급 자금을 조달했다. 올 1월에 40억달러 추가손실이 드러났다.
손실이 계속 늘어나면서 Ospel을 물러나라는 요구가 쏟아졌다. 2월까지 EBK는 Ospel 후임자를 찾는 논의를 시작했지만 이달까지도 적임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달에도 UBS는 190억달러의 추가상각이 예고되고 있으며 Ospel의 사임도 발표됐다. UBS 부회장인 Sergio Marchionne는 “이사회는 어느 누구도 Ospel보고 집에 가라고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금주에 UBS의 주주총회가 예정돼 있다. 그리고 여전히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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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간의 소동 사이 인하우스 헤지펀드가 문을 닫고 당시 CEO가 퇴출된 후였다. 쿠러씨는 UBS가 위기를 헤쳐나왔다는 자신감 속에 지중해로 요트여행을 떠났다.
그가 Corsica에서 Zurich로 돌아왔을 때 (위기는)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걸 알게 됐다. 새 CEO인 Marcel Rohner와 급하게 잡힌 미팅을 갖고 서야 쿠러씨는 UBS가 처한 곤경의 상태를 알게 됐다.
IB 부문에서 문제가 된 미국 주택시장 관련 증권에 UBS는 750억달러 상당이 노출돼 있었다. 주택관련 증권시장이 말라버리면서 UBS는 이 자산을 팔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잘 운영돼 온 것으로 알려진 이 은행이 역사상 최악의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8개월 동안 쿠러씨는 휴가를 가지 못했으며 당분간도 갈 가능성이 높지 않다. 이제 위기에서 UBS를 구해내느냐 마느냐는 쿠러씨에게 달렸다. 이번주 주주총회에서 그는 Marcel Ospel의 뒤를 이어 그룹회장으로 인준될 예정이다. 그가 지난 10월 이후 370억달러의 신용자산을 상각하고 127억달러를 전략적 투자자로부터 유치했으며 앞으로 주주들에게 150억스위스프랑 상당을 추가발행하도록 요청할 예정인 UBS의 방향타를 잡게 된 것이다.
UBS는 신용위기 속에 유럽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금융기관이 됐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 은행이 갖고 있던 명성에 치명상을 입은 것이다. 이번주 UBS는 금융당국에 제출됐던 내부 보고서의 요약본을 공개해 이 문제에 대해 스스로 설명을 할 계획이다. 하지만 파이낸셜타임스는 취재를 통해 UBS의 이상한 위험관리(risk management), 역기능 관리구조, 일련의 부적절한 의사결정이 현재의 위기상황에 원인을 제공했으며 어느 누구도 상태가 심각해질 때까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UBS의 현재 손실은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이 녹아내리면서 촉발됐다. 하지만 이 은행의 몰락의 씨앗은 10년전에 이미 뿌려져 있었다. 그것은 1998년 헤지펀드인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 파산에 노출돼 10억 스위스프랑 손실을 입은 때였다. 이 사태로 UBS 임원들은 ‘앞으로 다시는 IB 부문이 UBS의 초고액 자산 PB 고객들의 신뢰를 잃어버릴만큼 위험에 노출되어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가졌다.
UBS는 은행의 위험노출 정도를 검사하기 위한 과감한 조치를 취했다. 취리히 소재 UBS 본사가 직접 관장한 이 조치를 통해 UBS는 세계에서 가장 신중한 대출기관이라는 명성을 얻게 됐다. 하지만 디자인(조치의 구조?)에 결함이 있었다. 이 조치는 거래 상대방 또는 대출자의 부도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UBS는 은행의 재무제표에 반영해야할 시장의 위험, 즉 시장의 출렁거리는 영향에 덜 관심을 기울였다.
게다가 은행은 PB를 통해 예치된 싼 자금을 이용해 IB 부분이 이런 신용상품을 투자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통해 UBS는 보수적인 대출기준에도 불구하고 큰 이익을 남겼다. “당시 Peter Wuffli와 그룹 임원 이사회는 ‘어이, 우리는 아무 위험도 없이 IB를 운영할 수 있다구’라고 말했다”고 당시 임원은 말했다. “그들은 ‘비밀소스(음식점 등의)’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 10년 사이 UBS는 예의 그 신중함을 시험받게 된다.
금융시장에 새로운 동력이 등장한 것이다. 거액 투자자들이 헤지펀드업계에 돈을 펌프질하고 있었고 UBS의 많은 사람들이 행동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2004년말, UBS의 최고 명석한 채권투자가 가운데 한 명인 Michael Hutchins는 IB부문장인 John Costas에게 접근해 신용시장에 초점을 맞춘 새 헤지펀드 부서를 만들자는 계획을 제출했다. 살로몬 브러더스 소속 트레이더이기도 했던 Hutchins는 브루클린·뉴욕 등의 비인기 부동산 자산을 매입한 뒤 이를 재포장해 투자자들에게 넘기는 것으로 UBS에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는 또한 과감한 투자를 일삼기도 했는데 이를테면 2001년 9·11테러 직후 미국의 금리가 떨어질 것이라는데 베팅한 사례 같은 것이다.
과거 동료들은 ‘위험관리를 취리히 본사가 통제하는 상황에서 UBS가 어떻게 공격저인 베팅을 할 수 있을지를 Hutchins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첫 번째 트릭은 다음과 같다.
트리플 A 등급 채권을 사되 2%의 손해를 감수하고 이 채권의 위험에 대한 반대 protection을 매입하는 것이다. UBS의 위험모델에 따르면 트리플 A 채권은 액면가의 98% 이하로는 절대 받지 않는다. 그리고 추가 protection을 매입하면 이 자산은 거의 위험이 없는(risk-free) 것으로 간주된다.
Hutchins이 헤지펀드 설립을 위해 속도를 올리고 있을 때 UBS 최고경영진 역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2004년 여름경 이 은행은 맥킨지와 거대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그것은 UBS 비즈니스 모델을 평가하고 간극을 메우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실무그룹은 전직 맥킨지의 컨설턴트인 CEO Wuffli가 이끌고 있었다. 또한 필라델피아 채권 매매상에서 시작해 UBS에서 초고속 승진을 통해 IB부문을 맡고 있던 Costas도 포함돼 있었다.
이 실무그룹의 결론 가운데 하나는 UBS가 헤지펀드처럼 대안적이지만 위험한 투자와 성장 기회를 묶는 일이었다. 하지만 임원들은 이미 회사 수익의 절반을 내고 있는 IB 부문이 추가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걱정스러워했다. 실무그룹은 향후 추가 위험부담은 IB가 고객거래를 집행하기 위해(for the purpose of executing trades for cliednts) UBS가 자금을 투입해야하는 경우로 제한했다. 헤지펀드를 설립해 제3자 돈으로 투자를 한다면 추가 위험부담없이 헤지펀드에 편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하우스 헤지펀드 설립 계획이 모양을 갖춰감에 따라 극적인 트위스트가 있었다. 2005년 3월 Costas는 Wuffli에게 자신이 직접 이 벤처(헤지펀드)를 운용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Wuffli가 곤란한 입장에 처했다. 만약 Wuffli가 동의한다면 IB 부문 최고위급에 공석이 생기는 것이었고 만약 그가 반대한다면 UBS 미국 사업 구축을 위해 Costas가 떠날 가능성이 있었다.
동시에 COstas는 새 CEO를 물색하고 있는 모건 스탠리와 얘기가 오가고 있었다. Costas가 회사를 떠날까 두려워진 Wuffli는 Dillon Read Capital Management(DRCM)라고 이름붙여진 헤지펀드 운용을 Costas에게 맡겼다. DRCM 설립 소식은 UBS 구성원들의 상반된 반응을 불러왔다. 많은 경우 불만을 터뜨렸다. 이 헤지펀드의 관대한 임금지불구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당시 UBS가 드디어 채권부문에서 경쟁자들과의 간극을 메울 수 있어 기뻤다고 회상했다.
이제 와서 UBS 임원들은 DRCM를 설립한 것이 주의를 분산한 것이었으며 사업 규모를 과소평가한 것이라고 인정한다. 당시 희망사항은 DRCM이 50억달러의 외부자금을 끌어오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13억달러 가량을 유치했다. UBS 스스로 종자돈으로 30억달러를 투입했으며 트레이더들이 거래하던 자산도 넘겨줬다. 돈을 빌린 뒤 이 헤지펀드는 600억달러 상당의 포지션을 운용했으며 이는 UBS로부터 제공된 차입(leverage)의 75%에 해당했다. 19개월 동안 UBS와 고객들 모두에게 DRCM는 상당한 고수익의 벤처였고 IB부문에서 떠안고 있던 위험의 총량도 감소해갔다. 전략은 제대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Costas와 Hutchins가 떠나고 난 뒤 IB를 맡을 인력풀이 매우 얕아진 상태였다. UBS는 equity 담당인 Huw Jenkins를 택했다.
UBS는 이미 equity 부문에서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그래서 전략적 우선권은 채권부문에 가 있었다(채권 부문을 키워야겠다는 의미).
채권부문은 equity나 M&A 부문 성장속도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고 경쟁자들에 뒤져 있었다. 글로벌 채권 붐이 탄력을 얻으면서 UBS는 당혹스러웠다. 또 다시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어떻게 UBS의 신중한 철학을 버리지 않으면서 의식적으로 위험을 더 떠안은 경쟁자들과의 간극을 따라잡을 것인가.
UBS는 또 다른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DRCM이 채권부문의 유능한 트레이더들을 빨아들여 대체인력을 구하기 상당히 어렵도록 만들고 있는 점이었다. 반면 이 은행의 위험관리(리스크매니지먼트) 부서는 너무나 조심스런 접근방식으로 인해 banker들과 트레이더들을 화나게 만들고 있었다.
“그 부서는 위험을 과도하게 언급하는 바람에 신뢰도를 상당히 잃어버렸다”고 당시 은행경영 사정에 밝은 인사는 말했다.
은행 사람들은 UBS가 더 큰 문제를 무시하면서까지 사모대출(private equity loans)에 다가가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는 쓰나미가 몰려와 모든 사람들을 쓸어가고 있는데도 바닷가에 앉아 모래알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Jenkins는 채권부문에서 확장해야할 부문 3가지를 추려냈다. 이는 각각 신흥시장, 상품(commodity) 그리고 증권화(securitisation)이었다. 특히 마지막 증권화부문은 UBS를 빠르게 키워갔지만 동시에 복잡한 영역으로 끌고 들어갔으니 바로 CDO였다.
수년동안 IB들은 수백만건의 주택대출을 퍼올려(scooping up) 이를 묶어 특수신용증권(specialized credit securities)로 만들었다. 이는 구조화를 통해 투자자로 하여금 자신이 얼마만큼의 위험을 떠안을 것인가 선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용버블이 모멘텀을 쌓아감에 따라 UBS 트레이더들은 소위 CDO 부문의 가장 안전한 부문의 판매를 중단했다. 이는 ‘super senior’라고 불리며 트리플 A 등급을 받았다.
Hutchins과 다른 트레이더들이 그랬듯이 CDO 담당부서는 super senior를 구조화해서 최초 2% 손실고리에 걸려들지 않도록 했다. UBS가 걱정했듯이 이것은 관련 증권들이 ‘무위험’이 됐다는 의미였고 위험관리 보고서에도 등재되지 않았다.
2007년 여름이 되면 UBS는 IB 각 부문에서 200억달러가 넘는 super senior CDO를 떠안고 있었다. 놀랍게도 고위 IB 임원들조자 8월에 시장이 급변하기까지 이런 CDO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하지만 이 은행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위험을 떠안고 있는 곳은 CDO 담당부서만이 아니었다. UBS 채권부서도 은행의 여유자금을 가지고 유동자산(liquid assets)에 투자하고 있었다. 이 투자대상에는 super senior 등급의 CDO도 있었다. 이것은 UBS의 최소 3개부서 이상이 미국의 모기지 시장에 노출된 위험을 쌓고 있었다는 의미다.
Ospel씨(전 UBS 회장)는 결과물이 불만스러웠다. 그는 UBS를 최고의 IB로 만든다는 목표였다. 2006년 하반기 3시간 동안 이어진 UBS 화상회의에서 그는 700여명의 최고임원들에게 “아직도 채권부문 사업이 공사중이라는 사실에 진저리를 친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채권부문이 확대되도록 하는 압력을 더했다. 2007년 1분기까지 채권부문의 수익(revenue)은 전년동기 대비 200%나 늘어났다.
몇몇 애널리스트들은 이런 확장속도에 의문을 표시했다. UBS 자체 감독이사회(supervisory board) 또한 임원이사회(executive board)에 재무제표가 이렇게 빨리 늘어나고 있는가 의문을 표시했다. 하지만 스위스와 해외 비즈니스 고위인사로 구성됐지만 최근까지는 은행원(banker)를 한명도 포함하고 있지 않았던 당시 이사회는 쉽게 설득됐고 결국 UBS는 사상 최대의 이익을 남겼다.
UBS의 채권부분 사업이 급성장함에 따라 경쟁업체들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2007년 2월 영국 거대은행인 HSBC는 미국 서브프라임 대출영업에서 손실을 본 뒤 수익감소를 통해 투자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 수익감소 경고를 들은 다른 은행들도 서둘러 자신의 위험노출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DRCM 역시 마찬가지였다.
5월이 되면 DRCM 임원들은 한 가지 실험을 하기로 결정한다. 가장 복잡한 서브프라임 CDO 1억달러 상당을 시장에 내놓아 얼마를 받을 수 있는가 보기 위해서였다. 이 시도를 통해 DRCM은 하루만에 5000만달러의 손실을 보았다.
Hutchins는 개인적으로 40억달러 상당의 서브프라임 CDO 포트폴리오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3주가 걸린 이 재평가 결과 2억400만달러의 평가절하로 나타났다.
손실에 충격을 받는 한편 다른 DRCM 임원사이의 첨예한 긴장 속에 UBS는 재빨리 행동에 나섰다. DRCM은 1주일간 폐쇄한 뒤 IB부문에 재흡수됐다. Costas의 업무도 은행 자문역으로 줄어들었다.
DRCM의 매우 복잡한 포지션이 밝혀진 것은 매니지먼트 타임의 배수구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모르겠음 : Unravellin DRCM''s highly complex positions was to prove a drain on management time). 하지만 실제로는, 한번에 1억2700만달러 손실을 본 것은 UBS로서는 쉽게 흡수할 수 있는 규모였다. Wuffli는 DRCM의 충격은 제한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Ospel과 다른 임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6월말이 되어서 부서장들이 스페인 발렌시아에 모였다. 이곳에서의 이사회에서 Wuffli는 탄핵됐고 Rohner가 그의 자리를 꿰찼다. 임원들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는 씨앗을 초기에 뜯어냈다고 생각하면서 휴가를 즐겼다. 하지만 훨씬,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다가오고 있었다. DRCM을 청산한 것은, UBS 직원의 표현에 따르자면 타이타닉호가 침몰하고 있는데 갑판 위의 쏟은 우유를 닦아낸 것에 불과했다.
신용거품이 쌓여감에 따라 이 거품이 꺼질 지 모른다는 공포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UBS는 그 사실을 모르는 듯 했다. 스위스 연방은행 위원회(EBK)의 Daniel Zuberbuhler 사무국장(director)은 UBS의 미국 부동산 시장 노출 위험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2007년 3월 UBS는 서브프라임에 매우 적은 위험만 노출돼 있다고 답해왔다.
“이 대답은 결과적으로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UBS는 자신의 헤지를 지나치게 고평가했다”고 Zuberbuhler는 이달 말했다.
UBS 내부 사람들은 지난해 8월까지도 도매시장이 완전히 얼어붙고 UBS가 super senior CDO에 엄청난 포지션을 갖고 있어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닫지 못했다는데 대체로 동의한다. 이 때가 되면 서브프라임 자산을 팔기에는 너무 늦어버렸고 서브프라임 지수에 걸려 있는 헤지를 풀 수도 없다고 UBS 임원들은 결론내렸다. 대신 UBS는 서브프라임 벨류에이션이 붕괴할 경우 물러날 수 있도록 신흥시장의 자산등급(asset classes)에 숏 포지션을 취했다(took out short position). 하지만 이 자산등급은 랠리를 이어갔고 UBS의 손실은 더욱 커졌다.
10월, UBS는 최초 손실을 공개했는데 그 액수는 약 44억달러. Jenkins이 사임했고 Rohner가 임시로 그 직책을 맡았다. 12월 100억달러의 추가손실 발표를 준비하면서 Ospel과 다른 임원들, 그리고 Kurer씨까지 포함된 가운데 싱가포르 국부펀드로부터 긴급 자금을 조달했다. 올 1월에 40억달러 추가손실이 드러났다.
손실이 계속 늘어나면서 Ospel을 물러나라는 요구가 쏟아졌다. 2월까지 EBK는 Ospel 후임자를 찾는 논의를 시작했지만 이달까지도 적임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달에도 UBS는 190억달러의 추가상각이 예고되고 있으며 Ospel의 사임도 발표됐다. UBS 부회장인 Sergio Marchionne는 “이사회는 어느 누구도 Ospel보고 집에 가라고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금주에 UBS의 주주총회가 예정돼 있다. 그리고 여전히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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