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재조사로 일본인 명의 토지 77.18㎢ 환수 가능
일본 독도 영유권 주장은 잘못된 지적에서 비롯
토지를 재정비하거나 택지를 개발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지적(地籍)조사다. 지적은 땅의 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적은 국가 구성의 3대 요소 중 하나인 토지를 다루는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 지적의 오랜 역사와는 달리 현재 지적은 일제 강점기 때 잘못 그려진 원점 표기로 엉망이다. 지적 원점을 바로 잡은 지도 채 1년이 되지 않았다. 사람과 땅을 연결하는 행복의 선, 지적의 재발견을 통해 국내 지적시스템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을 찾아본다.
지적도상 경계와 실제 토지의 경계가 일치하지 않는 불부합지. 실제 측량값과 지금 사용하고 있는 땅의 경계가 다른 곳이다. 해마다 불부합지 문제로 수만 건에 이르는 토지 분쟁 소송이 일어나고 있다. 많은 국민이 불부합지에 익숙해 있다는 것이다.
한국 지적의 역사는 고조선 시대까지 올라간다. 삼국시대에 지적을 다루는 사람에게 중요한 벼슬을 내렸을 정도였고, 역대 왕조에서도 백성의 토지 소유권을 보호해 주는 등 역사와 지적은 궤적을 같이해 왔다.
고려말에는 지적장부의 불완전과 법규의 미완성으로 지적장부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권문세가의 불법적인 토지겸병으로 토지 전제가 극도로 문란해져 이를 개혁하려는 주장이 대두하고, 급기야 국가시책으로 과전법이라는 토지제도가 실시됐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합리적 토지 관리 형식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과전법에 의한 토지대장은 고려가 멸망하면서 소실됐다.
그 이후 한국 땅에서는 세계적인 작품이 등장했다. 김정호가 전국을 답사하며 측량해 만든 대동여지도. 1861년(철종 12년) 축척 16만분의 1로 제작한 최초의 전국 지도다. 대동여지도는 22첩의 책자가 하나의 지도를 이루는 분첩절첩식 지도다. 대동여지도가 현재 기준으로 평가해도 책자와 책자의 접합 부분에 오차가 거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제작된 것은 측량을 통해 지도를 제작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으며 정확한 측량도는 후세사람을 놀라게 했다.
19세기 말 일본은 항로 측량이라는 명목으로 조선 땅을 수없이 넘보고 침략을 준비해왔다. 1875년 일제는 군함 웅요호와 데니보우함을 조선 근해로 보내 항로 측량이라는 명목으로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것이 웅요호 사건으로 일본에서는 강화도 사건이라 한다.
◆한국 측량 기술 일본으로 건너가 =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변혁은 땅과 관련된 것이 많다. 측량을 통해 토지 소유를 주장하려는 시도가 계속 나타나고 있다. 최근 다시 불거진 독도 영유권 문제도 해양 측량의 기준점이 달라 시작된 사례다.
최초의 한국 실측지도는 1467년 안효례 등이 만든 ‘도성도’가 있고, 일본은 한국보다 367년 늦은 1807년 이노우가 만든 부분 지도인 ‘연해여전도’가 있다. 일본의 지도 측량 기술은 모두 한국에서 넘어가 오랜시간을 거쳐 시작됐다.
일본 국회도서관은 1890년대 참모본부가 한반도를 측량한 5만분의 1지형도 445매를 소장하고 있다. 지형도 위 도곽 밖에는 ‘군사기밀’이라는 글자가 인쇄돼 있어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측량으로부터 시작한 군사작전임을 증명하고 있다.
일제는 1910년 탁지부 임시재산정리국을 토지조사국으로 개정하고 일반 토지를 조사하는 데 많은 관리를 뒀다. 이것이 토지조사국의 태동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1910년 토지조사 사업을 일제히 실시했다. 1200분의 1 축척의 도해 지적도를 작성했고, 임야조사령에 근거해 6000분의 1 축척 임야도를 만들었다.
◆일제의 측량 잔재 = 1910년 일제가 측량할 수 없어 내버려뒀던 땅이 100년이 지난 지금 위성영상을 통해 다시 찾게 됐다. 전라남도만 해도 1135만2000㎡에 이른다. 전남이 찾아낸 땅은 모두 1175필지로 개별 공지지가는 500억원이다. 경남 거제시는 2005년 섬 5개를 새로 발견했다. 이로 인해 해상경계와 어업권 확보가 가능해졌다.
일제강점기 때 원칙없이 계속되는 지적조사에 따라 한국 지도는 원점도 방향도 없는 유령 지도로 바뀌었다.
지적에 대한 문제점이 전국 곳곳에서 불거지자 정부는 1980년대 말부터 지적재조사 사업을 논의했다. 본격적인 논의와 실행은 1990년대 중반에서야 시작했다.
일제가 1910년 동경원점을 기준으로 작성한 지적도 등을 지금까지 사용함에 따라 전국적으로 최소 138만여 필지의 불부합지가 발견되고 있다. 특히 2차원 도해지적 체제로 한정된 정보만을 사용해 일부 시·군간에는 지적도상 행정구역 경계마저 중첩되고 있다.
정부는 이같은 일제의 지적측량 잔재를 없애기 위해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지적재조사에 들어갔다. 지적재조사의 필요성을 줄곧 주장해 온 대한지적공사는 위성을 이용한 첨단 기법으로 그동안 문제가 됐던 불부합지 문제를 해결하고 아직 파악하지 못한 행정구역의 토지 확대 등이 가능한 시대를 예고했다.
토지재조사로 일본인 명의로 남아있는 토지 77.18㎢의 국유지 환수도 빠르게 추진될 것으로 기대된다.
김성배 기자 sb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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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독도 영유권 주장은 잘못된 지적에서 비롯
토지를 재정비하거나 택지를 개발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지적(地籍)조사다. 지적은 땅의 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적은 국가 구성의 3대 요소 중 하나인 토지를 다루는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 지적의 오랜 역사와는 달리 현재 지적은 일제 강점기 때 잘못 그려진 원점 표기로 엉망이다. 지적 원점을 바로 잡은 지도 채 1년이 되지 않았다. 사람과 땅을 연결하는 행복의 선, 지적의 재발견을 통해 국내 지적시스템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을 찾아본다.
지적도상 경계와 실제 토지의 경계가 일치하지 않는 불부합지. 실제 측량값과 지금 사용하고 있는 땅의 경계가 다른 곳이다. 해마다 불부합지 문제로 수만 건에 이르는 토지 분쟁 소송이 일어나고 있다. 많은 국민이 불부합지에 익숙해 있다는 것이다.
한국 지적의 역사는 고조선 시대까지 올라간다. 삼국시대에 지적을 다루는 사람에게 중요한 벼슬을 내렸을 정도였고, 역대 왕조에서도 백성의 토지 소유권을 보호해 주는 등 역사와 지적은 궤적을 같이해 왔다.
고려말에는 지적장부의 불완전과 법규의 미완성으로 지적장부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권문세가의 불법적인 토지겸병으로 토지 전제가 극도로 문란해져 이를 개혁하려는 주장이 대두하고, 급기야 국가시책으로 과전법이라는 토지제도가 실시됐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합리적 토지 관리 형식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과전법에 의한 토지대장은 고려가 멸망하면서 소실됐다.
그 이후 한국 땅에서는 세계적인 작품이 등장했다. 김정호가 전국을 답사하며 측량해 만든 대동여지도. 1861년(철종 12년) 축척 16만분의 1로 제작한 최초의 전국 지도다. 대동여지도는 22첩의 책자가 하나의 지도를 이루는 분첩절첩식 지도다. 대동여지도가 현재 기준으로 평가해도 책자와 책자의 접합 부분에 오차가 거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제작된 것은 측량을 통해 지도를 제작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으며 정확한 측량도는 후세사람을 놀라게 했다.
19세기 말 일본은 항로 측량이라는 명목으로 조선 땅을 수없이 넘보고 침략을 준비해왔다. 1875년 일제는 군함 웅요호와 데니보우함을 조선 근해로 보내 항로 측량이라는 명목으로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것이 웅요호 사건으로 일본에서는 강화도 사건이라 한다.
◆한국 측량 기술 일본으로 건너가 =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변혁은 땅과 관련된 것이 많다. 측량을 통해 토지 소유를 주장하려는 시도가 계속 나타나고 있다. 최근 다시 불거진 독도 영유권 문제도 해양 측량의 기준점이 달라 시작된 사례다.
최초의 한국 실측지도는 1467년 안효례 등이 만든 ‘도성도’가 있고, 일본은 한국보다 367년 늦은 1807년 이노우가 만든 부분 지도인 ‘연해여전도’가 있다. 일본의 지도 측량 기술은 모두 한국에서 넘어가 오랜시간을 거쳐 시작됐다.
일본 국회도서관은 1890년대 참모본부가 한반도를 측량한 5만분의 1지형도 445매를 소장하고 있다. 지형도 위 도곽 밖에는 ‘군사기밀’이라는 글자가 인쇄돼 있어 일제의 한반도 침략이 측량으로부터 시작한 군사작전임을 증명하고 있다.
일제는 1910년 탁지부 임시재산정리국을 토지조사국으로 개정하고 일반 토지를 조사하는 데 많은 관리를 뒀다. 이것이 토지조사국의 태동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1910년 토지조사 사업을 일제히 실시했다. 1200분의 1 축척의 도해 지적도를 작성했고, 임야조사령에 근거해 6000분의 1 축척 임야도를 만들었다.
◆일제의 측량 잔재 = 1910년 일제가 측량할 수 없어 내버려뒀던 땅이 100년이 지난 지금 위성영상을 통해 다시 찾게 됐다. 전라남도만 해도 1135만2000㎡에 이른다. 전남이 찾아낸 땅은 모두 1175필지로 개별 공지지가는 500억원이다. 경남 거제시는 2005년 섬 5개를 새로 발견했다. 이로 인해 해상경계와 어업권 확보가 가능해졌다.
일제강점기 때 원칙없이 계속되는 지적조사에 따라 한국 지도는 원점도 방향도 없는 유령 지도로 바뀌었다.
지적에 대한 문제점이 전국 곳곳에서 불거지자 정부는 1980년대 말부터 지적재조사 사업을 논의했다. 본격적인 논의와 실행은 1990년대 중반에서야 시작했다.
일제가 1910년 동경원점을 기준으로 작성한 지적도 등을 지금까지 사용함에 따라 전국적으로 최소 138만여 필지의 불부합지가 발견되고 있다. 특히 2차원 도해지적 체제로 한정된 정보만을 사용해 일부 시·군간에는 지적도상 행정구역 경계마저 중첩되고 있다.
정부는 이같은 일제의 지적측량 잔재를 없애기 위해 199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지적재조사에 들어갔다. 지적재조사의 필요성을 줄곧 주장해 온 대한지적공사는 위성을 이용한 첨단 기법으로 그동안 문제가 됐던 불부합지 문제를 해결하고 아직 파악하지 못한 행정구역의 토지 확대 등이 가능한 시대를 예고했다.
토지재조사로 일본인 명의로 남아있는 토지 77.18㎢의 국유지 환수도 빠르게 추진될 것으로 기대된다.
김성배 기자 sb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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