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평=""> ‘1910년대, 풍문의 시대를 읽다’
문창재 (객원 논설위원)
^인간에게 지나간 100년 세월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 물음에 대한 응답은 사람에 따라, 민족과 국가에 따라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근세 100년은 지구촌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도 격동의 세월이었다. 문명과 인지의 발달이 가져온 인류생활의 변화는 과거 어느 100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한국인에게는 지나간 100년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과도 비견될 수 없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는다면, 100년은 대략 3세대 남짓한 세월이지만, 고령자들은 일생동안 과거 몇 백 년과 비견될 변화를 겪었다.
^구십 수년 전의 그 세상은 어떠했을까. 이런 물음에 역사책보다 훨씬 실감나는 책이 나왔다. 국문학자 권 보드래 조교수(동국대 교양교육원)의 ‘1910년대 풍문의 시대를 읽다’이다.
^권씨가 1910년대를 ‘풍문의 시대’로 규정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 시대는 초기 커뮤니케이션 단계였다. 인터넷 통신이 삽시간에 수십 수백만 인파를 촛불광장으로 끌어내는 시대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그런 시대가 100년도 안 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움일 것이다. 책상머리에서 간단하게 ‘대통령이 어제 밤 누구와 밥을 먹으면서 무슨 말을 했고, 그 말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웹 2.0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원시 커뮤니케이션 시대였다.
^1901년 벽두 미국에서는 문명의 발달을 상찬하는 말들로 20세기의 첫 새벽을 맞았다. 그 해 1월 1일자 신문 <시카고 트리뷴="">은 그 시대의 물질문명 발전을 ‘환상적’이란 말로 표현했다. 지나간 19세기를 되돌아보고 밝아오는 20세기를 전망하는 특집기사를 통해, 자동차와 기차 같은 교통수단, 전기와 통신기기의 발명 등을 예로 들어 문명시대에 살게 된 행운에 감읍하였다.
^그로부터 10년 세월이 지나도록 조선에서는 지구 저편 사람들의 그런 행복을 짐작도 하지 못 하였다. ‘모르는 게 행복’이던 시대였다.
^일제가 ‘조선 사람들을 어쩐다하더라’ 는 소문과 풍문에 불안해하는 경술국치 초기의 사회상에서부터,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의 국권회복 운동 절정기에 이르는 10년간의 사회상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사로 보여주는 책이 ‘1910년, 풍문의 시대를 읽다’이다.
^기사를 인용한 신문이 총독부 기관지라는 한계는 있지만, 10년을 같은 창으로 내다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총독부의 입장에서 바라본 기사들이라 해도, 정치적인 선전의 속내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의 원자재에 접하는 감흥이 있다.
^“합방을 실시하는 시에 재정이 군졸함으로 전국 부민(富民)을 본년 추계에 조사하여 천석 이상을 수확하는 부민은 그 재산 전부를 은행에 처치(處置)하고 매인에게 매일 평균 50전씩을 지급하고, 나머지는 금융을 유통케 한다는 설은 조언(造言)자가 선출(煽出)한 것인데, 이와전와(以訛轉訛)하여 무근의 설이 유행함이라더라.” (1910년 9월 1일자)
^합방 이전부터 나돌던 ‘부자들의 재산을 몰수한다하더라’는 풍설을 합방 사흘 만에 쓴 기사 전문이다. 풍설의 출처와 이를 부인하는 당국자를 밝히지 않은 기사작법과, 문어체 구투의 문장에서도 커뮤니케이션 초기단계의 실태를 엿볼 수 있다.
^이 책 제1부 제1장(소문과 풍설)에는 일제가 조선인들에게 강제로 일본 옷을 입히게 하고 매장(埋葬)을 금지한다느니, 출산에도 과세한다느니, 하는 풍설에서부터 종두사업 방해자 엄단, 학령아동 일제조사 같은 총독부 시책에 이르기까지, 사실과 풍문을 모두 ‘하더라’ 식으로 쓴 기사들을 소개하고 있다.
^제2장(천황과 총독과 왕)은 일본 천황 다이쇼(大正)의 즉위식과 생일(천장절)행사, 일제에 협력하는 왕가(王家) 동향, 조선민중에게 ‘시혜’를 베푸는 총독부에 관한 기사들로 묶었다. 특히 서울(경성)에서 열린 천황 즉위식 축하행사를 알리는 ‘경성 대례 봉축의 행사’(1915년 11월 2일자) 기사에서는 일본 총리가 11월 10일 오후 3시 30분 천황만세를 봉창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우리 경성에서는 부민들이 각각 뜰 앞에 나와 경도(京都) 방면으로 향하여 일제히 만세를 삼창하기로 결정하였다하더라”고 썼다. 마음에 내키지 않는 만세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심사에는 아무 언급이 없이.
^제3장(학교와 그 주위)에서는 당시 명문학교들의 입시경쟁률, 여학생들의 사치풍조, 몇몇 학교의 동맹휴학, 마지막 과거시험 등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제4장(도시의 재구성)에는 일제가 서울을 하나의 지방 도시로 전락시키기 위해 행정구역 면적을 8분의 1로 축소했다는 사실(해설)과, 서울시가지 도시계획 사업에 관한 기사들이 눈길을 끈다. 특히 1915년 3월 15일자 ‘여(余)는 서대문이올시다’ 란 기사는 돈의문(서대문)이 헐리게 되어 서운하다고 해놓고, 말미에는 “경성의 교통에 방해만 되는 이 몸이 헐려가는 것이 기쁘기 한량없다”고 철거를 미화하는 말로 기사가 마무리 되었다.
^제2부에서는 조선인 상가와 일본인 상가를 대비한 상술의 차이에서부터, 수탈과 물가고에 허덕이는 서민생활의 고통, 만주이민 유행의 세태, 그 시대의 연애∙ 결혼∙ 여가생활∙ 공연문화 등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기사들이 인용되어 있다.
^선진국들이 문명생활을 상찬한 시기에 제국주의 식민지 조선에서는 풍문과 미신, 압제와 저항, 생활고와 국권회복 투쟁으로 10년을 살았다.
^내레이션도 윤색도 덧칠도 없는 옛 필름 한 편을 느긋이 본 것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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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보>시카고>
문창재 (객원 논설위원)
^인간에게 지나간 100년 세월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 물음에 대한 응답은 사람에 따라, 민족과 국가에 따라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근세 100년은 지구촌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도 격동의 세월이었다. 문명과 인지의 발달이 가져온 인류생활의 변화는 과거 어느 100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났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한국인에게는 지나간 100년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과도 비견될 수 없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는다면, 100년은 대략 3세대 남짓한 세월이지만, 고령자들은 일생동안 과거 몇 백 년과 비견될 변화를 겪었다.
^구십 수년 전의 그 세상은 어떠했을까. 이런 물음에 역사책보다 훨씬 실감나는 책이 나왔다. 국문학자 권 보드래 조교수(동국대 교양교육원)의 ‘1910년대 풍문의 시대를 읽다’이다.
^권씨가 1910년대를 ‘풍문의 시대’로 규정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 시대는 초기 커뮤니케이션 단계였다. 인터넷 통신이 삽시간에 수십 수백만 인파를 촛불광장으로 끌어내는 시대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그런 시대가 100년도 안 되었다는 사실이 놀라움일 것이다. 책상머리에서 간단하게 ‘대통령이 어제 밤 누구와 밥을 먹으면서 무슨 말을 했고, 그 말에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알아볼 수 있는 웹 2.0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원시 커뮤니케이션 시대였다.
^1901년 벽두 미국에서는 문명의 발달을 상찬하는 말들로 20세기의 첫 새벽을 맞았다. 그 해 1월 1일자 신문 <시카고 트리뷴="">은 그 시대의 물질문명 발전을 ‘환상적’이란 말로 표현했다. 지나간 19세기를 되돌아보고 밝아오는 20세기를 전망하는 특집기사를 통해, 자동차와 기차 같은 교통수단, 전기와 통신기기의 발명 등을 예로 들어 문명시대에 살게 된 행운에 감읍하였다.
^그로부터 10년 세월이 지나도록 조선에서는 지구 저편 사람들의 그런 행복을 짐작도 하지 못 하였다. ‘모르는 게 행복’이던 시대였다.
^일제가 ‘조선 사람들을 어쩐다하더라’ 는 소문과 풍문에 불안해하는 경술국치 초기의 사회상에서부터,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의 국권회복 운동 절정기에 이르는 10년간의 사회상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사로 보여주는 책이 ‘1910년, 풍문의 시대를 읽다’이다.
^기사를 인용한 신문이 총독부 기관지라는 한계는 있지만, 10년을 같은 창으로 내다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총독부의 입장에서 바라본 기사들이라 해도, 정치적인 선전의 속내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의 원자재에 접하는 감흥이 있다.
^“합방을 실시하는 시에 재정이 군졸함으로 전국 부민(富民)을 본년 추계에 조사하여 천석 이상을 수확하는 부민은 그 재산 전부를 은행에 처치(處置)하고 매인에게 매일 평균 50전씩을 지급하고, 나머지는 금융을 유통케 한다는 설은 조언(造言)자가 선출(煽出)한 것인데, 이와전와(以訛轉訛)하여 무근의 설이 유행함이라더라.” (1910년 9월 1일자)
^합방 이전부터 나돌던 ‘부자들의 재산을 몰수한다하더라’는 풍설을 합방 사흘 만에 쓴 기사 전문이다. 풍설의 출처와 이를 부인하는 당국자를 밝히지 않은 기사작법과, 문어체 구투의 문장에서도 커뮤니케이션 초기단계의 실태를 엿볼 수 있다.
^이 책 제1부 제1장(소문과 풍설)에는 일제가 조선인들에게 강제로 일본 옷을 입히게 하고 매장(埋葬)을 금지한다느니, 출산에도 과세한다느니, 하는 풍설에서부터 종두사업 방해자 엄단, 학령아동 일제조사 같은 총독부 시책에 이르기까지, 사실과 풍문을 모두 ‘하더라’ 식으로 쓴 기사들을 소개하고 있다.
^제2장(천황과 총독과 왕)은 일본 천황 다이쇼(大正)의 즉위식과 생일(천장절)행사, 일제에 협력하는 왕가(王家) 동향, 조선민중에게 ‘시혜’를 베푸는 총독부에 관한 기사들로 묶었다. 특히 서울(경성)에서 열린 천황 즉위식 축하행사를 알리는 ‘경성 대례 봉축의 행사’(1915년 11월 2일자) 기사에서는 일본 총리가 11월 10일 오후 3시 30분 천황만세를 봉창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우리 경성에서는 부민들이 각각 뜰 앞에 나와 경도(京都) 방면으로 향하여 일제히 만세를 삼창하기로 결정하였다하더라”고 썼다. 마음에 내키지 않는 만세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의 심사에는 아무 언급이 없이.
^제3장(학교와 그 주위)에서는 당시 명문학교들의 입시경쟁률, 여학생들의 사치풍조, 몇몇 학교의 동맹휴학, 마지막 과거시험 등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제4장(도시의 재구성)에는 일제가 서울을 하나의 지방 도시로 전락시키기 위해 행정구역 면적을 8분의 1로 축소했다는 사실(해설)과, 서울시가지 도시계획 사업에 관한 기사들이 눈길을 끈다. 특히 1915년 3월 15일자 ‘여(余)는 서대문이올시다’ 란 기사는 돈의문(서대문)이 헐리게 되어 서운하다고 해놓고, 말미에는 “경성의 교통에 방해만 되는 이 몸이 헐려가는 것이 기쁘기 한량없다”고 철거를 미화하는 말로 기사가 마무리 되었다.
^제2부에서는 조선인 상가와 일본인 상가를 대비한 상술의 차이에서부터, 수탈과 물가고에 허덕이는 서민생활의 고통, 만주이민 유행의 세태, 그 시대의 연애∙ 결혼∙ 여가생활∙ 공연문화 등을 엿볼 수 있는 다양한 기사들이 인용되어 있다.
^선진국들이 문명생활을 상찬한 시기에 제국주의 식민지 조선에서는 풍문과 미신, 압제와 저항, 생활고와 국권회복 투쟁으로 10년을 살았다.
^내레이션도 윤색도 덧칠도 없는 옛 필름 한 편을 느긋이 본 것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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