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평수 늘리는 대신 이국에서 봉사활동
2세기 전 이싸(小林一茶)는 이렇게 읊었다. “이 세상 지옥의 지붕 위를 걸으며 꽃구경을 하네.” 이 하이쿠에서 지옥의 지붕 위와 꽃구경은 절묘한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우리에게 지옥은 어디인가? 그것은 서울인가, 아니면 프놈펜인가?
주마간산의 여행자였던 나에게 그건 당연히 프놈펜과 캄보디아였다. 지난 99년에 찾았을 때 70년대 후반 이 동남아의 작은 나라를 뒤덮었던 킬링필드의 공포는 여전히 끈적끈적한 연기처럼 배어 있었다.
프놈펜 중앙시장과 옛 왕도 우동에서 끈질기게 따라붙던 걸인의 큰 무리는 생존의 절박함 그 자체였고, 며칠씩 함께 차를 타고 다니면서도 자기 이름을 끝내 감췄던 두 명의 여행사 운전기사들은 타인에 대한 불신과 불안을 떨쳐낼 수 없다는 증인들이었다. 그런 내게 이 책은 그 제목부터 하나의 도전이었다. ‘써바이’는 캄보디아 말로 ‘행복하다’ ‘즐겁다’의 뜻이라는데 ‘언제나 써바이 써바이’ 라니? 어쩌면 캄보디아=킬링필드, 또는 캄보디아=절망의 땅 이라는 연상부터 떠오르는 나 같은 사람들에겐 이런 의문은 당연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이들이 정말로 행복하다면, 불과 한 세대 전에 국민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기아 나 질병 또는 처형으로 목숨을 잃었고,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의 50분의 1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면, 이 책은 우리를 향해 매우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우리야말로 남보다 행복해지겠다는 일념으로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열심히 아이들 교육을 시키는 사람들이 아닌가?
우선 저자가 품었던 경탄과 의문들을 만나보자. “캄보디아 사람들이 원하는 행복은 단순하고 사소하다. 헌옷 하나에도, 한 끼 식사에도, 1달러에도, 과자 한 봉지에도 행복해 한다. 우리보다 가난하지만 우리보다 만족스럽게 살아간다. 밥을 굶으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밥을 굶지 않아도 되고, 잠잘 수 있는 집이 있고,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순간부터는 마음의 문제가 중요해진다.”
저자는 이러한 ‘마음’을 만나게 된 한국인들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캄보디아에서 또 다른 여행자들을 만났다. 캄보디아 사람들을 돕고 있는 한국 사람들이다. 이들은 펀드를 하고 아파트 평수를 늘리는 대신 이곳에 와서 2년, 3년씩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산다. 캄보디아 사람들을 보며 ‘지독한 가난 속에서 어쩌면 저렇게 밝을까’ 의문이 들었던 것처럼, 이들을 보면서도 ‘어쩌면 이렇게 살 수 있을까’ 궁금했다.”
이 책에는 캄보디아를 찾은 열두 사람의 이야기가 인터뷰 형식으로 전개된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단원으로 이곳을 찾은 사람들, 빈민가 아이들에게 무릎을 꿇고 밥 퍼주는 젊은이, 전 재산이 달랑 천만 원이라는 치과의사 부부, 운동권 출신 목사, 편히 살 나이에 무료병원을 연 의사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좀 더 구체적인 현장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가령 한국에서 섬유회사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코이카 단원이 되어 주립직업훈련원에서 일하는 20대 박 아무개 씨의 목소리는 하나의 전형적인 사례를 들려준다.
그녀가 일하는 훈련원의 선생들은 따로 집이 없어 일터에서 그냥 잔다. “(선생님들이 자는 곳은) 침대 있는 방도 아니에요. 땅바닥에 거적 깔아놓고 자는 수준이죠. 학생들 사는 집이라고 가보면 달랑 화로 하나, 찬장 하나뿐이에요. 빗물 받아먹는 사람은 그래도 잘사는 편이에요. 강가에 가보면 진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데, 빗물 받을 항아리가 없어서 황톳빛 강물로 국수 삶아먹고 살아요.” 그런 사람들이 써바이, 써바이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체험을 따라가다 보면 생각의 실마리가 다음처럼 이어지는 게 어쩐지 자연스럽게 들리기 시작한다. “한국에서 나는 가난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하면 더 잘살까, 성공할까, 결혼 잘할까, 남자 잘 만날까, 그런 생각만 했어요. 내가 이전에 한국에서 고민한 문제들이 여기서는 아무것도 아닌 게 돼요. 내가 가진 게 정말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런 생각이 든다. 사회는 변화한다. 사회의 구성원도 바뀐다. 캄보디아에도 30대 이전의 젊은이들에게는 킬링필드의 기억 자체가 없다. ‘새로운 캄보디아인’이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9년 전에 보았던, 이방인을 불신하고 불안해하던 세대를 대신해 마음을 열고, 웃고, 모든 게 즐거운 건강한 세대가 자라나고 있다. 어쩌면 그건 열대의 자연이 주는 게으른 풍요 속에 마음 놓고 살던 옛 캄보디아 사람들의 모습이 되돌아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같은 변화는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도전들 속에 ‘새로운 한국인‘이 태어나고 자라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이 사회를 지배해온 물신주의, 그리고 이른바 ’쥐들의 경주‘로 표현되는 각박한 생존경쟁에서 벗어나 좀 더 인간다운 삶과 정신적인 만족을 찾으려는 시도가 번져나갈 때도 된 것이다.
이 새로운 한국인들과 캄보디아인들이 만나는 아름다운 풍경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다.
요즘 몹시 덥다. 캄보디아 더위 못지않다. 그런데 물이 무서워 발가락이나 잠그면서 수영을 배울 수는 없다는 날카로운 지적이 있다. 좀 겁이 나더라도 물 속에 풍덩 뛰어들어야 수영을 배울 수 있다는 건 진리다.
그 깨우침을 에도시대의 명인 바쇼(松尾芭蕉)의 하이쿠에서 읽는다.
“거적을 덮어쓴 분이 있다. 꽃 피는 봄날에.” 상투적인 지혜에 과감하게 거적을 덮어야 사회가 틀로 찍어내는 상투적인 불행을 떨쳐버리고 인간다운 삶, 근원적인 기쁨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선(禪)의 거적은 아파트 평수를 덮고, 학력을 덮고, 인맥을 덮어 “돈, 돈, 돈”의 비명이 가득한 세상에 시원한 ‘풍덩’ 소리를 퍼뜨릴 지도 모른다.
박순철 칼럼니스트 전 문화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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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기 전 이싸(小林一茶)는 이렇게 읊었다. “이 세상 지옥의 지붕 위를 걸으며 꽃구경을 하네.” 이 하이쿠에서 지옥의 지붕 위와 꽃구경은 절묘한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우리에게 지옥은 어디인가? 그것은 서울인가, 아니면 프놈펜인가?
주마간산의 여행자였던 나에게 그건 당연히 프놈펜과 캄보디아였다. 지난 99년에 찾았을 때 70년대 후반 이 동남아의 작은 나라를 뒤덮었던 킬링필드의 공포는 여전히 끈적끈적한 연기처럼 배어 있었다.
프놈펜 중앙시장과 옛 왕도 우동에서 끈질기게 따라붙던 걸인의 큰 무리는 생존의 절박함 그 자체였고, 며칠씩 함께 차를 타고 다니면서도 자기 이름을 끝내 감췄던 두 명의 여행사 운전기사들은 타인에 대한 불신과 불안을 떨쳐낼 수 없다는 증인들이었다. 그런 내게 이 책은 그 제목부터 하나의 도전이었다. ‘써바이’는 캄보디아 말로 ‘행복하다’ ‘즐겁다’의 뜻이라는데 ‘언제나 써바이 써바이’ 라니? 어쩌면 캄보디아=킬링필드, 또는 캄보디아=절망의 땅 이라는 연상부터 떠오르는 나 같은 사람들에겐 이런 의문은 당연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이들이 정말로 행복하다면, 불과 한 세대 전에 국민 네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기아 나 질병 또는 처형으로 목숨을 잃었고,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의 50분의 1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면, 이 책은 우리를 향해 매우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우리야말로 남보다 행복해지겠다는 일념으로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고, 더 열심히 아이들 교육을 시키는 사람들이 아닌가?
우선 저자가 품었던 경탄과 의문들을 만나보자. “캄보디아 사람들이 원하는 행복은 단순하고 사소하다. 헌옷 하나에도, 한 끼 식사에도, 1달러에도, 과자 한 봉지에도 행복해 한다. 우리보다 가난하지만 우리보다 만족스럽게 살아간다. 밥을 굶으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밥을 굶지 않아도 되고, 잠잘 수 있는 집이 있고,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순간부터는 마음의 문제가 중요해진다.”
저자는 이러한 ‘마음’을 만나게 된 한국인들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캄보디아에서 또 다른 여행자들을 만났다. 캄보디아 사람들을 돕고 있는 한국 사람들이다. 이들은 펀드를 하고 아파트 평수를 늘리는 대신 이곳에 와서 2년, 3년씩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며 산다. 캄보디아 사람들을 보며 ‘지독한 가난 속에서 어쩌면 저렇게 밝을까’ 의문이 들었던 것처럼, 이들을 보면서도 ‘어쩌면 이렇게 살 수 있을까’ 궁금했다.”
이 책에는 캄보디아를 찾은 열두 사람의 이야기가 인터뷰 형식으로 전개된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단원으로 이곳을 찾은 사람들, 빈민가 아이들에게 무릎을 꿇고 밥 퍼주는 젊은이, 전 재산이 달랑 천만 원이라는 치과의사 부부, 운동권 출신 목사, 편히 살 나이에 무료병원을 연 의사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좀 더 구체적인 현장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가령 한국에서 섬유회사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코이카 단원이 되어 주립직업훈련원에서 일하는 20대 박 아무개 씨의 목소리는 하나의 전형적인 사례를 들려준다.
그녀가 일하는 훈련원의 선생들은 따로 집이 없어 일터에서 그냥 잔다. “(선생님들이 자는 곳은) 침대 있는 방도 아니에요. 땅바닥에 거적 깔아놓고 자는 수준이죠. 학생들 사는 집이라고 가보면 달랑 화로 하나, 찬장 하나뿐이에요. 빗물 받아먹는 사람은 그래도 잘사는 편이에요. 강가에 가보면 진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데, 빗물 받을 항아리가 없어서 황톳빛 강물로 국수 삶아먹고 살아요.” 그런 사람들이 써바이, 써바이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체험을 따라가다 보면 생각의 실마리가 다음처럼 이어지는 게 어쩐지 자연스럽게 들리기 시작한다. “한국에서 나는 가난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하면 더 잘살까, 성공할까, 결혼 잘할까, 남자 잘 만날까, 그런 생각만 했어요. 내가 이전에 한국에서 고민한 문제들이 여기서는 아무것도 아닌 게 돼요. 내가 가진 게 정말 소중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런 생각이 든다. 사회는 변화한다. 사회의 구성원도 바뀐다. 캄보디아에도 30대 이전의 젊은이들에게는 킬링필드의 기억 자체가 없다. ‘새로운 캄보디아인’이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9년 전에 보았던, 이방인을 불신하고 불안해하던 세대를 대신해 마음을 열고, 웃고, 모든 게 즐거운 건강한 세대가 자라나고 있다. 어쩌면 그건 열대의 자연이 주는 게으른 풍요 속에 마음 놓고 살던 옛 캄보디아 사람들의 모습이 되돌아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같은 변화는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도전들 속에 ‘새로운 한국인‘이 태어나고 자라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이 사회를 지배해온 물신주의, 그리고 이른바 ’쥐들의 경주‘로 표현되는 각박한 생존경쟁에서 벗어나 좀 더 인간다운 삶과 정신적인 만족을 찾으려는 시도가 번져나갈 때도 된 것이다.
이 새로운 한국인들과 캄보디아인들이 만나는 아름다운 풍경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다.
요즘 몹시 덥다. 캄보디아 더위 못지않다. 그런데 물이 무서워 발가락이나 잠그면서 수영을 배울 수는 없다는 날카로운 지적이 있다. 좀 겁이 나더라도 물 속에 풍덩 뛰어들어야 수영을 배울 수 있다는 건 진리다.
그 깨우침을 에도시대의 명인 바쇼(松尾芭蕉)의 하이쿠에서 읽는다.
“거적을 덮어쓴 분이 있다. 꽃 피는 봄날에.” 상투적인 지혜에 과감하게 거적을 덮어야 사회가 틀로 찍어내는 상투적인 불행을 떨쳐버리고 인간다운 삶, 근원적인 기쁨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선(禪)의 거적은 아파트 평수를 덮고, 학력을 덮고, 인맥을 덮어 “돈, 돈, 돈”의 비명이 가득한 세상에 시원한 ‘풍덩’ 소리를 퍼뜨릴 지도 모른다.
박순철 칼럼니스트 전 문화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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