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을 두드리다 말고 곱은 손을 개켜진 이불 속으로 넣어보지만 전기담요 한 장이 달랑 깔린 이불 밑도 그다지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발치에 놓인 난로에 간간이 손을 녹여가며 글을 쓰고 있다.
“염천에 학질이라도 걸렸나? 숨 막히게 더운 날씨에 손이 곱은 건 웬 말이며, 난데없이 전기담요에 난로까지?” 하며 의아해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남반구에 위치한 호주는 한국과는 반대로 지금 겨울이 한창이다. 지구 반대편 겨울의 정중간 7월을 지나며 나는 지금 ‘떨고 있는’ 것이다. 지난 6월부터 어깨를 옹송거리며 차가운 날씨를 견디고 있지만 8월 한 달 추위가 더 남았으니 아직 봄은 멀다.
그나마 내가 사는 시드니는 10도 안팎의 추위이지만 내륙 쪽은 영하로 떨어지고 눈이 내리는 곳도 있다. 땅덩이가 워낙 큰 나라이다 보니 같은 계절인데도 지역마다 기온차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
올해로 이민 16년째인 나는 아직도 6·7·8월은 겨울, 9·10·11월은 봄, 12·1·2월은 여름, 3·4·5월은 가을이라는 남반구의 계절 감각이 익숙하게 와 닿지 않는다. 이민 초기, 세상이치를 하나하나 배워가는 어린 아이처럼 달력을 짚어가며 3달씩을 묶어서 한국과는 반대로 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의식적으로 익혔음에도.
계절이라는 건 오랜 순환과 반복을 통해 살면서 자연스레 체화되는 감각인 거지, 지식을 습득하듯 외우거나 배워서 알 대상이 아닌 탓이다. 태어나 몇 십년을 살아오면서 12·1·2월이면 눈 내리는 겨울, 6·7·8월 하면 무더운 여름이 자동 연상되던 것을 뒤집어서 생각해야 하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울 밖에는.
거꾸로 돌아가는 계절 탓에 호주의 생활양식은 우리나라와는 반대되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호주는 북향집을 최상으로 꼽는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우리나라 남향집의 전형적인 자연의 혜택을 이곳에서는 북향집에서 고스란히 받는 것이다.
듣기만 해도 냉랭하고 음습한 한기가 느껴지는 ‘북향집’ 이라는 말이 이 나라에서는 가옥의 방향상 최상의 컨디션을 의미하는 것이니, 부동산 매물 광고에 ‘북향집’임을 강조하는 문구가 나올 때면 ‘남향집’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따스한 볕을 받아 안은 듯한 온화한 느낌을 억지로라도 연상해야 한다.
그런가하면 관찰력 있고 호기심 많은 이 중에는 ‘호주에 오니 세면대나 변기의 물이 한국에서와는 반대 방향으로 빠지더라’며 아무도 몰랐던 진리라도 발견한 양 신기해마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계절과 관련하여 호주에서 가장 적응이 안 되는 것은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때이다.
한국 못지않은 열기를 뿜어내는 기온임에도 솜옷을 입은 산타클로즈가 북반구의 성탄절 분위기를 끌어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여간 안쓰럽지 않은데다 미안하지만 좀체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폭염을 견디다 못한 산타들이 런닝셔츠에 팬티 바람의 파격 노출을 할 때면 차라리 연민의 정이라도 느껴지니, 무더위를 감안해서 산타들이 빨간색 팬티만 고수한다면 속옷 차림도 눈 감아 줄 밖에.
사정이 이러하니 이맘 때 한국의 지인들과 안부를 나눌 때면 서로 엉뚱한 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
“요즘 더위에 어떻게 지내세요?”하고 내가 물으면, “그래, 추위는 좀 누그러졌고?”하면서 동문서답식으로 엇박자 장단을 맞추는 것이다.
한 열흘 전의 어느 토요일 저녁, 서울의 친정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날도 춥고 해서 오늘은 뜨끈한 삼계탕을 끓였다고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그 날 점심 때 아파트 노인정에서 삼계탕을 드셨다고 했다.
순간 착각을 하여, “잘 하셨어요, 추운 날 몸 녹이는 덴 뜨끈한 닭국물이 좋죠” 했더니 “얘가 지금 무슨 소리야? 더워 못 견디게 생긴 날씨에. 오늘이 초복이라서 삼계탕을 먹은 거지” 하시는 게 아닌가.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두 나라가 반대인 줄만 알았는데, 아니 반대이기 때문에 여름과 겨울 그 대칭점에서 삼계탕과 딱 맞닥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날, 한 시에 한겨울의 호주와 한여름의 한국을 관통하며 두 나라를 한달음에 연결한 삼계탕 덕에 그 날만큼은 언뜻 두 계절을 동시에 산 느낌이 들었다.
신아연 호주통신원 shinayoun@naver.com
통신원칼럼을 시작합니다
이번 주부터 호주 신아연 통신원의 칼럼을 게재합니다.
신아연 통신원은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6년째 호주에 살면서 ‘호주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지금은 한국의 신문, 잡지, 방송 등에 호주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이민 생활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이 있습니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염천에 학질이라도 걸렸나? 숨 막히게 더운 날씨에 손이 곱은 건 웬 말이며, 난데없이 전기담요에 난로까지?” 하며 의아해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남반구에 위치한 호주는 한국과는 반대로 지금 겨울이 한창이다. 지구 반대편 겨울의 정중간 7월을 지나며 나는 지금 ‘떨고 있는’ 것이다. 지난 6월부터 어깨를 옹송거리며 차가운 날씨를 견디고 있지만 8월 한 달 추위가 더 남았으니 아직 봄은 멀다.
그나마 내가 사는 시드니는 10도 안팎의 추위이지만 내륙 쪽은 영하로 떨어지고 눈이 내리는 곳도 있다. 땅덩이가 워낙 큰 나라이다 보니 같은 계절인데도 지역마다 기온차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
올해로 이민 16년째인 나는 아직도 6·7·8월은 겨울, 9·10·11월은 봄, 12·1·2월은 여름, 3·4·5월은 가을이라는 남반구의 계절 감각이 익숙하게 와 닿지 않는다. 이민 초기, 세상이치를 하나하나 배워가는 어린 아이처럼 달력을 짚어가며 3달씩을 묶어서 한국과는 반대로 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의식적으로 익혔음에도.
계절이라는 건 오랜 순환과 반복을 통해 살면서 자연스레 체화되는 감각인 거지, 지식을 습득하듯 외우거나 배워서 알 대상이 아닌 탓이다. 태어나 몇 십년을 살아오면서 12·1·2월이면 눈 내리는 겨울, 6·7·8월 하면 무더운 여름이 자동 연상되던 것을 뒤집어서 생각해야 하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울 밖에는.
거꾸로 돌아가는 계절 탓에 호주의 생활양식은 우리나라와는 반대되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어 호주는 북향집을 최상으로 꼽는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우리나라 남향집의 전형적인 자연의 혜택을 이곳에서는 북향집에서 고스란히 받는 것이다.
듣기만 해도 냉랭하고 음습한 한기가 느껴지는 ‘북향집’ 이라는 말이 이 나라에서는 가옥의 방향상 최상의 컨디션을 의미하는 것이니, 부동산 매물 광고에 ‘북향집’임을 강조하는 문구가 나올 때면 ‘남향집’이라는 말에서 풍기는 따스한 볕을 받아 안은 듯한 온화한 느낌을 억지로라도 연상해야 한다.
그런가하면 관찰력 있고 호기심 많은 이 중에는 ‘호주에 오니 세면대나 변기의 물이 한국에서와는 반대 방향으로 빠지더라’며 아무도 몰랐던 진리라도 발견한 양 신기해마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계절과 관련하여 호주에서 가장 적응이 안 되는 것은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때이다.
한국 못지않은 열기를 뿜어내는 기온임에도 솜옷을 입은 산타클로즈가 북반구의 성탄절 분위기를 끌어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여간 안쓰럽지 않은데다 미안하지만 좀체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폭염을 견디다 못한 산타들이 런닝셔츠에 팬티 바람의 파격 노출을 할 때면 차라리 연민의 정이라도 느껴지니, 무더위를 감안해서 산타들이 빨간색 팬티만 고수한다면 속옷 차림도 눈 감아 줄 밖에.
사정이 이러하니 이맘 때 한국의 지인들과 안부를 나눌 때면 서로 엉뚱한 소리를 할 수밖에 없다.
“요즘 더위에 어떻게 지내세요?”하고 내가 물으면, “그래, 추위는 좀 누그러졌고?”하면서 동문서답식으로 엇박자 장단을 맞추는 것이다.
한 열흘 전의 어느 토요일 저녁, 서울의 친정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날도 춥고 해서 오늘은 뜨끈한 삼계탕을 끓였다고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그 날 점심 때 아파트 노인정에서 삼계탕을 드셨다고 했다.
순간 착각을 하여, “잘 하셨어요, 추운 날 몸 녹이는 덴 뜨끈한 닭국물이 좋죠” 했더니 “얘가 지금 무슨 소리야? 더워 못 견디게 생긴 날씨에. 오늘이 초복이라서 삼계탕을 먹은 거지” 하시는 게 아닌가.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두 나라가 반대인 줄만 알았는데, 아니 반대이기 때문에 여름과 겨울 그 대칭점에서 삼계탕과 딱 맞닥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날, 한 시에 한겨울의 호주와 한여름의 한국을 관통하며 두 나라를 한달음에 연결한 삼계탕 덕에 그 날만큼은 언뜻 두 계절을 동시에 산 느낌이 들었다.
신아연 호주통신원 shinayo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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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부터 호주 신아연 통신원의 칼럼을 게재합니다.
신아연 통신원은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6년째 호주에 살면서 ‘호주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지금은 한국의 신문, 잡지, 방송 등에 호주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이민 생활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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