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압단속에 왼쪽팔 으스러져 … 명절에도 기약 없는 법정투쟁
한민족 최대 명절, 한가위를 일주일 앞두고 고향을 그리는 이들의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외국인노동자 아니서(A.K.M Ansiur Rahman)씨 역시 고향 방글라데시 모리샬에 두고 온 어머니와 누나, 동생들의 얼굴이 가슴에 사무친다.
한국의 추석처럼 방글라데시도 내달 1일 ‘에이드 울-피트르(Eid ul-Fitr)’ 축제를 맞는다. ‘라마단’ 기간이 끝나자마자 시작되는 사흘간의 명절에 가족과 친지, 친구들이 모두 모인다.
아니서씨는 “한국에 오기 전 온 가족이 모여 두런두런 얘기꽃을 피우던 명절 모습이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올해에도 고향에 갈 수가 없다. 2년 전 으스러진 왼쪽팔 치료비와 체불임금을 돌려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13년 동안 고향을 등지면서 흘린 땀과 눈물이며, 그에겐 목숨과도 같은 돈이다.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한국정부를 상대로 소송중이지만 결과가 언제 나올지 기약할 수 없다. 그는 “고향 들녘에도 황금빛으로 물든 곡식이 바다처럼 펼쳐질텐데, 올해에도 고향에 돌아가기는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2006년 그는 650만원의 체불임금을 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자문을 구하러 인천 서구에 있는 한 목사를 찾았다가 출입국관리소 단속직원과 맞닥뜨렸다. 불법체류 신분이었던 아니서는 있는 힘껏 도망쳤으나 작정하고 덤벼드는 이들을 피할 수 없었다.
출입국 직원들은 아니서의 왼손을 뒤로 돌리며 체포하려다 흥분한 나머지 그의 왼쪽팔을 으스러뜨렸다.
병원 진단 결과 상완골(어깨부터 팔꿈치사이 부분) 분쇄에 어깨관절 탈골, 손목 신경마비. 사고 직후 넉달 동안 네차례의 수술을 받았으나 70% 가량 영구장애 가능성이 제기됐다.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지난 10여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지독한 가난으로 결혼조차 못한 28세 노총각이 청운의 꿈을 안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때가 지난 96년. 늘 단속의 손길을 의식해야 했지만 ‘뼈 빠지게’ 일한 덕에 많은 것을 이뤘다.
한국에 오기 위해 브로커에게 건넸던 8000달러의 빚을 모두 갚은 일이며 두명의 누이를 결혼시키고 남동생 두명을 대학까지 졸업시킨 것은 뿌듯함 그 자체다. 하지만 코리안 드림은 거기서 끝이었다. 왼쪽팔을 들어올리기조차 버거운 불량품 외국인노동자는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다친 이후부터였다. 위법한 공권력이 빚은 사고임에도 모든 책임은 그에게 돌아왔다.
병원에 입원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출입국 직원이 찾아와 아니서에게 영문 서류를 그대로 베껴 쓰게 한 뒤 서명을 요구했다. ‘단속을 피해 도망가다가 스스로 넘어져서 왼쪽 팔을 다쳤다’는 내용이었다.
경황이 없던 그는 내용을 확인하지도 못한 채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체불임금을 돌려받기는커녕 500만원 가까이 되는 병원비도 모두 고향 식구들이 논밭을 팔고 빚을 내 채워 넣었다.
결국 지난해 1월 아니서와 그를 돕는 인천외국인노동자센터가 국가배상청구소송을 냈다. 1년 반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 1심 판결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자필 각서가 사건의 실체를 흐리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친 그를 재워주고 먹여주던 고향 친구들도 불법체류 신분이 적발돼 하나둘씩 추방됐다.
법정 다툼을 지속하기 위해 고향 가족들에게 매달 20만~30만원씩을 신세지고 있다. 그나마 지난달부터 외국인노동자 쉼터에서 숙식을 도와줘 상황은 한결 나아졌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재판은 커다란 걱정거리다.
아니서씨는 “나에게 한국은 기회의 땅이자 도전의 훈련소였으며, 여전히 좋은 기억과 추억이 많다”며 “재판이 빨리 잘 마무리돼 고향 방글라데시에 돌아가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고 말했다.
인천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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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최대 명절, 한가위를 일주일 앞두고 고향을 그리는 이들의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외국인노동자 아니서(A.K.M Ansiur Rahman)씨 역시 고향 방글라데시 모리샬에 두고 온 어머니와 누나, 동생들의 얼굴이 가슴에 사무친다.
한국의 추석처럼 방글라데시도 내달 1일 ‘에이드 울-피트르(Eid ul-Fitr)’ 축제를 맞는다. ‘라마단’ 기간이 끝나자마자 시작되는 사흘간의 명절에 가족과 친지, 친구들이 모두 모인다.
아니서씨는 “한국에 오기 전 온 가족이 모여 두런두런 얘기꽃을 피우던 명절 모습이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올해에도 고향에 갈 수가 없다. 2년 전 으스러진 왼쪽팔 치료비와 체불임금을 돌려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13년 동안 고향을 등지면서 흘린 땀과 눈물이며, 그에겐 목숨과도 같은 돈이다.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다. 한국정부를 상대로 소송중이지만 결과가 언제 나올지 기약할 수 없다. 그는 “고향 들녘에도 황금빛으로 물든 곡식이 바다처럼 펼쳐질텐데, 올해에도 고향에 돌아가기는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2006년 그는 650만원의 체불임금을 받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자문을 구하러 인천 서구에 있는 한 목사를 찾았다가 출입국관리소 단속직원과 맞닥뜨렸다. 불법체류 신분이었던 아니서는 있는 힘껏 도망쳤으나 작정하고 덤벼드는 이들을 피할 수 없었다.
출입국 직원들은 아니서의 왼손을 뒤로 돌리며 체포하려다 흥분한 나머지 그의 왼쪽팔을 으스러뜨렸다.
병원 진단 결과 상완골(어깨부터 팔꿈치사이 부분) 분쇄에 어깨관절 탈골, 손목 신경마비. 사고 직후 넉달 동안 네차례의 수술을 받았으나 70% 가량 영구장애 가능성이 제기됐다.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지난 10여년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지독한 가난으로 결혼조차 못한 28세 노총각이 청운의 꿈을 안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때가 지난 96년. 늘 단속의 손길을 의식해야 했지만 ‘뼈 빠지게’ 일한 덕에 많은 것을 이뤘다.
한국에 오기 위해 브로커에게 건넸던 8000달러의 빚을 모두 갚은 일이며 두명의 누이를 결혼시키고 남동생 두명을 대학까지 졸업시킨 것은 뿌듯함 그 자체다. 하지만 코리안 드림은 거기서 끝이었다. 왼쪽팔을 들어올리기조차 버거운 불량품 외국인노동자는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다친 이후부터였다. 위법한 공권력이 빚은 사고임에도 모든 책임은 그에게 돌아왔다.
병원에 입원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출입국 직원이 찾아와 아니서에게 영문 서류를 그대로 베껴 쓰게 한 뒤 서명을 요구했다. ‘단속을 피해 도망가다가 스스로 넘어져서 왼쪽 팔을 다쳤다’는 내용이었다.
경황이 없던 그는 내용을 확인하지도 못한 채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체불임금을 돌려받기는커녕 500만원 가까이 되는 병원비도 모두 고향 식구들이 논밭을 팔고 빚을 내 채워 넣었다.
결국 지난해 1월 아니서와 그를 돕는 인천외국인노동자센터가 국가배상청구소송을 냈다. 1년 반이 훌쩍 넘었지만 아직 1심 판결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자필 각서가 사건의 실체를 흐리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친 그를 재워주고 먹여주던 고향 친구들도 불법체류 신분이 적발돼 하나둘씩 추방됐다.
법정 다툼을 지속하기 위해 고향 가족들에게 매달 20만~30만원씩을 신세지고 있다. 그나마 지난달부터 외국인노동자 쉼터에서 숙식을 도와줘 상황은 한결 나아졌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재판은 커다란 걱정거리다.
아니서씨는 “나에게 한국은 기회의 땅이자 도전의 훈련소였으며, 여전히 좋은 기억과 추억이 많다”며 “재판이 빨리 잘 마무리돼 고향 방글라데시에 돌아가 가족과 함께 살고 싶다”고 말했다.
인천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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