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실에서 순창 곡성 구례까지 … 하루 300만톤이 김제 만경으로
창간 15주년 기획으로 ‘강에서 띄우는 그림편지 - 한국의 5대강을 가다’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낙동강을 시작으로 섬진강, 영산강, 금강, 한강(남·북한강)을 모두 돌아보는 이번 기획은 ‘우리 시대의 진정한 진경산수화’의 세계를 개척하고 있는 이호신 화백과 함께합니다.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떠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 1’ 첫 부분과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번 취재에서도 김 시인을 학교에서 만났습니다. 마침 마지막 이삿짐을 꾸리던 중이었습니다. 평생을 평교사로 근무하다 드디어 정년퇴임을 맞은 겁니다.
“이 학교 졸업생으로 다시 이 학교로 와서 선생으로 근무했는데, 이제 완전히 졸업하는 거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하게 말하지만 둥근 안경테 사이로 살같이 지나버린 세월과 아쉬움이 언뜻 비칩니다.
“다시 진메마을 고향집으로 들어올 겁니다. 서가도 정리하고 … 이제 거의 준비가 됐어요.”
이호신 화백과 김용택 시인도 구면입니다. 두 사람은 12년 전인 1996년 3월 이곳 덕치초등학교에서 처음 만났답니다.
그때 이 화백은 진메마을 김용택 선생 고향집에서 자고 마을 봄 풍경도 그렸습니다. 그 그림이 ‘길에서 쓴 그림일기’(현암사)에 실려 있죠. 기억력이 좋은 김용택 시인은 그 당시 일을 아주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섬진강 물길은 30cm짜리 파이프
섬진강은 백두대간의 남쪽 끝인 지리산에서 호남정맥의 동쪽 끝인 광양 백운산까지, 천리가 넘는 산줄기 안의 68개 물줄기가 모인 강입니다.
전북 진안·임실·순창·남원, 전남 화순·장흥·보성·곡성·구례·순천·광양, 경남 하동 등 3개 도(道), 12개 지자체에 걸쳐 있는 섬진강은 유역면적(4897㎢)과 본류의 길이(225km)로 볼 때 한강과 낙동강, 금강에 이어 남한에서 4번째로 크고 긴 강입니다.
발원지 진안을 지나 조금씩 강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는 섬진강은 임실에서 옥정호(섬진강댐)로 흘러듭니다. 총저수량 4억6600만㎥에 이르는 이 거대한 호수의 물은 그러나 대부분 섬진강 본류가 아니라 서해안 수계로 흐릅니다.
여름철이면 옥정호의 물은 두개의 취수구를 통해 초당 30톤, 하루 310만톤이 동진강 수계로 빠져나갑니다. 칠보발전소의 발전용수와 김제평야, 계화도 간척지의 관개용수로 공급되는 겁니다.
27번 국도 운암교에서 749번 지방도를 타고 정읍시 산외면 종산리에 가면 거친 물보라를 일으키며 관개용 수로로 내려가는 엄청난 물줄기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물줄기는 ‘징게망게’(끝없이 펼쳐진 김제·만경 평야를 전북 사람들은 이렇게 부릅니다) 일대 3만헥타르의 농경지로 공급됩니다. 결국 섬진강이 우리나라 최대 곡창지대의 수원(水源)인 셈입니다.
그런데 섬진강댐에 올라가서 보면 순창군 쪽으로 내려가는 섬진강 본류는 거의 졸졸 흐르는 시냇물 수준입니다. 섬진강댐에서 하류로 방류되는 ‘하천유지용수’는 하루 3만~7만톤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7만톤은 섬진강댐의 평상시 최대 방류량입니다. 홍수가 나서 댐 위에 있는 수문을 여는 경우가 아니라면, 섬진강 본류로 가는 물길은 직경 30cm의 조그만 파이프밖에 없습니다. 방류량을 줄일 수는 있어도 더 늘릴 수는 없는 구조입니다.
이런 탓에 옥정호(섬진강댐) 하류에서 순창을 지나 곡성군 경계에 이를 때까지 섬진강은 제대로 된 강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김용택 시인이 섬진강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임실 덕치의 천담리, 구미리 적성강 구간도 수량이 너무 적어 제대로 된 강의 맛을 느끼기 힘들 정도입니다.
강바닥엔 미끌미끌한 물이끼가 끼어 있고, 기기묘묘한 강변 암반지대는 허옇게 말라붙은 오염물질 투성이입니다. 심한 경우 바위에 패인 구멍마다 유화 팔레트처럼 고인 물의 색이 제각기 다릅니다. 어떤 조류가 번식하느냐에 따라 검정색 녹색 붉은색 등으로 물빛이 결정되기 때문이죠.
강물에서 냄새가 났다. 싱싱하게 잘 익은 수박 냄새. 스무 살의 나는 강물 곁에 나란히 누워 실컷 그 냄새를 맡았다. 나는 그 냄새가 강의 영혼이 스무 살의 여행자를 위해 특별히 마련한 냄새라고 생각했다.
- 곽재구. ‘섬진강 이야기’ 중에서
그러나 이런 섬진강을 기대한다면 장마철 이후로 여행을 미루는 것이 좋습니다. 적어도 장마철이 지나기 전까지는 섬진강에서 은어들이 내뿜는 수박 향기를 맡기는 어렵습니다.
1년 중 섬진강이 제일 맑은 때는 ‘은어’가 올라오는 7월에서 10월까지입니다. 은어들은 장마철에 큰물이 져서 오염물질들이 다 떠내려간 뒤, 지리산과 호남정맥의 산들이 머금었던 맑은 계곡수가 흘러내릴 때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옵니다.
이는 환경부 수질측정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2007년 수질측정 자료를 보면, 전남 곡성(오곡면 압록리)과 구례(토지면 송정리) 지점의 수질이 1급수(BOD 1ppm 이하)를 기록한 것은 정확하게 7월부터 10월까지였습니다.
“길 좋아진다고 삶이 나아질까”
원래 강은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바닥이 깎이고, 침적토가 쌓이고, 새로운 물길이 생기고, 때로는 마르기도 합니다. 자연 생태계와 사람들의 문화는 이런 강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서로를 정화하며 수천년 동안 진화해왔습니다.
그러나 댐은 ‘홍수와 갈수(渴水)’라는 강의 변화를 통제합니다. 침전물과 영양소를 가두고 물고기들을 비롯한 많은 생물들의 이동을 막아버립니다. 강물의 온도와 화학적 성질을 바꾸고 침식과 퇴적과 같은 지질학적 과정까지 방해합니다.
“댐이 생기기 전엔 이렇게 더럽지 않았어. 논일 하다가 목이 마르면 그냥 강물을 떠서 마셨지. 여기 강변에 자갈밭이 두길이나 됐는데, 댐 공사 한다고 다 파가버렸어.” 임실군 덕치면 물우리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의 말입니다.
사람들은 섬진강의 물만 빼앗아 간 것이 아닙니다. 덕치면 천담마을의 경우, 도로공사로 강 건너 있던 ‘보지샘’(여성 성기 모양의 샘)이 사라졌고, 다리공사 이후 마을 입구의 장승마저 감쪽같이 없어졌습니다.
장구목 계곡의 ‘요강바위’는 경기도 용인까지 옮겨졌다가 돌아오는 수난을 당했습니다. 당시 범인들은 “마을까지 길을 닦아주겠다”며 큰 길을 낸 다음, 50톤이 넘는 요강바위를 대형 크레인으로 들어서 가져갔다고 합니다. 다행히 언론 보도와 시민 제보로 요강바위는 제자리를 찾았지만 주민들은 아직도 그 일이 바로 어제 일어난 일인 양 분노하고 있습니다.
요즘 섬진강 일대에는 도로공사가 한창입니다. 전주에서 순창으로 가는 27번 국도 4차선 확장사업이 거의 고속도로 수준으로 진행 중입니다.
김용택 시인은 “회문산 입구를 거대한 교각과 장벽으로 가로막는 도로를 어떤 주민들이 좋아하겠느냐”며 “길이 좋아진다고 시골사람들의 삶이 나아지는 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순창 곡성 구례 = 그림 이호신 화백
글 남준기 기자 jkna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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