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의 눈물, 우리도 닦아주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당선소식을 전하는 신문지면은 온통 ‘변화’라는 말로 도배되었다. 공화당 정권이 민주당으로 넘어간 것만 해도 큰 변화다. 하물며 미국 역사상 첫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으니 ‘변화’라는 어휘로는 그 의미를 전하기 부족할지 모른다.
차별과 냉대, 편견과 따돌림이란 말의 주인공이었던 흑인이 대통령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던가. 상전은 벽해가 될 수 있지만 “그것만은 있을 수 없다”던 일이 일어났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대명사인 흑인정책에 어떤 변화가 올지 온 세계가 주목하는 이유가 거기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21세기 대한민국의 약자와 소수자 실상은 어떠하며 그들의 내일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짚어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차별과 냉대가 흑인에 대한 미국인들의 그것보다 심하지 않다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런 물음에 맞닥뜨려 단호히 “그렇다”고 말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의 특질 중에서도 고약한 인종차별의 첫 희생자는 중국인이고, 그 다음은 혼혈아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웬만한 도시의 중심지에 자리잡았던 중국인 거리가 사라진 사실을 안다면, 그 대답은 자명해진다.
얼마 전 한 지방도시의 화교축제를 밀착중계한 TV 프로그램에 화교들의 애환이 잘 나타나 있었다. 오래 번창했던 화교학교 운동회에 모인 중국인들은 공영방송 마이크 앞에서 민족차별의 아픔을 털어놓았다.
한 아가씨는 “주민등록증이 없어서 인터넷 회원가입을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불편하다”고 말했다. 40대 중년남자는 같은 이유로 휴대폰을 가질 수 없다고 했다. 70대 할아버지는 “별것 아니지만, 지하철 같은 곳에서 경로우대를 받지 못하는 것이 억울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들이 주민등록증이 없어 그런 차별을 당한다는 것은 나라의 수치다. 국내 정주자라면 외국인등록증 같은 증명서만으로 누려야 할 작은 혜택과 기회를 빼앗는 나라가 지구상에 몇이나 될 것인가. 무슨 낯으로 외국 정부에 한국인 정주자들의 참정권과 법적지위를 요구할 것인가.
한국전쟁이 양산한 혼혈아 문제는 지금도 가릴 수 없는 우리의 치부로 남았다. 미군병사와 한국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그들은 1980년 이전에는 누구의 호적에도 오르지 못 했다. 어머니 친척이나 친지 자녀로 위장되었던 그들은 교육과 취업에서 당한 치명적인 차별과 냉대로 지금까지 울고 있다.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 했죠.”
혼혈인 가수 인순이가 피를 토하는 음정으로 부르는 ‘거위의 꿈’은 그들이 겪은 모멸과 따돌림에 대한 항변이다.
새로운 약자와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은 새로운 사회문제가 되었다. 국제결혼 당사자들과 그 자녀들은 법적으로는 차별을 받지 않지만 한국사회의 옹졸한 정서와 인습의 피해자가 되어 가정파탄에 울고 있다. 우리가 기피하는, 힘들고 위험하고 더러운 3D 업종 일을 도맡아 해주는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처우는 또 어떤가.
한국 남자와 외국인 여성의 결혼은 한해 3만건 정도이고 그 반대의 경우를 합치면 전체 결혼의 10% 정도가 국제결혼이라 한다. 불법체류자를 합치면 외국인 근로자는 수십만명을 헤아린다. 단지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 많은 사람들 가슴에 못을 박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은 인도적인 범죄에 해당한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가 어찌 비국적자만의 문제겠는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의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무의식적인 차별을 뛰어넘지 않으면, 설혹 747 국가가 된다고 해도 ‘좋은 나라’ ‘훌륭한 나라’ 소리는 들을 수 없다. 마치 미국이 무서운 나라, 강대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좋은 나라’ ‘훌륭한 나라’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변화를 지향하는 미국 대통령의 탄생을 계기로 우리도 사회 구석구석에서 신음하는 약자와 소수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좋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문 창 재(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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