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엄마 외로움, 장애아이들이 달래줘 … “자원봉사 일상화돼야”
“선생님,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는 영어로 뭐라고 해요?”
수업을 하고 있는데 제이미가 물었다. 20대 여성인 그는 근위축증 때문에 전신이 마비됐다. 이 때문에 어린 시절 미국으로 입양됐다 파양돼 돌아온 기억도 있다. 유일하게 자유로운 부분은 입이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제이미는 행복한 사람이야.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잖아. 도와주는 사람도 있고. 팔 다리 다 있어도 자기가 원하는 일 못하는 사람이 많아.”
제이미는 그림을 좋아했다. 그는 입으로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 법을 익혔다. 얼마 전에는 단 두 점이지만 자신만의 전시회도 열었다. 요즘엔 눈에 띄게 밝아졌다.
“제가 얼마나 이기적인데요. 원생들이랑 싸우기도 해요.”
주부인 이미금(43·하단사진)씨는 인천의 장애인 복지시설인 은광원에서 3년째 영어교육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제자’들은 10대부터 40대까지 나이는 제각각이지만 실제 인지능력은 대부분 어린이와 다를 바 없는 장애인이다. ‘I love Kimchi’처럼 간단한 영어문장 하나를 익히는 데 1년 이상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씨는 이들을 데리고 연말마다 영어노래 공연 및 영어연극을 선보이는 등 열심이다. “자원봉사는 봉사정신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원생들이 좋아하고 그도 즐겁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은광원 원생들에게 이씨는 다소 ‘별난’ 선생님이다. 먼저 방학 때는 절대 출근하지 않는다. 또 수업시간에 떠드는 원생은 3진 아웃제로 쫓아내기도 한다. “선생님 왜 지각했느냐”고 따지는 원생이 있으면 “너는 나보다 더 지각한 적 많잖아” 하며 티격태격 싸우기도 한다.
그러나 “이씨만큼 원생들이 따르는 자원봉사자도 드물다”는 게 은광원 관계자의 말이다. 일회성 동정에 익숙해진 그들을 꾸준히 찾으면서도 ‘특별하지 않게’ 대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85학번인 이씨는 대학시절 학교 근처 병원에서 하반신불수 남자 어린이에게 수학, 영어를 가르치면서 첫 봉사를 경험했다. 한창 대학가에서 최루탄 냄새가 진동하던 시절, “왜 대학생들은 데모를 하느냐”고 묻곤 하던 그 아이는 이해력이 남달랐고 대화도 잘 통했다. 이씨는 그 때 “장애인도 똑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새삼 놀랐다고 한다.
이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3년 후 결혼하자마자 당시 해군장교였던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이사를 갔다. 미국은 자원봉사가 생활의 일부인 나라였다. 지역 초등학교에서 행사를 열면 고등학생들이 봉사의 일환으로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다 책임졌다. 공부를 잘 못하는 친구에게 과외를 해주는 것도 봉사였다. 대학 입학 때도 봉사활동의 비중이 컸다. 학생들은 우리나라처럼 서류 한 장 떼서 제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봉사의 구체적인 내용과 느낀 점, 성과까지 포트폴리오 및 에세이로 작성할 만큼 정성을 들였다. 대학생들은 지역 빈민가 어린이들에게 과외를 해 주고 대신 학교로부터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이들에게 봉사는 시혜가 아니라 일상이었다. 이씨는 이런 자연스러운 봉사문화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곧 거기에 익숙해졌다.
3년 후 한국으로 돌아온 이씨는 반 ‘기러기 엄마’가 됐다. 아이들은 미국에서 학교 다니고, 남편은 회사일로 집을 비우기 일쑤였다. 그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봉사활동 할 곳을 찾았다. 인터넷 검색으로 은광원을 찾아 영어교육 봉사를 하고 싶다고 하자 담당자는 놀라는 눈치였다. 자식의 봉사점수를 대신 채우기 위해서도 아닌데다 아무 인맥 없이 무작정 찾아오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었다.
“원생들을 ‘특별하지 않게’ 대하는 데 1년이 걸렸어요.”
이씨는 처음에 몸과 마음이 온전치 못한 원생들을 보고 “두려웠다”고 털어놨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처신해야 진짜 이들을 돕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1년 동안 좌충우돌해 보니 비로소 이들이 ‘바깥세상에 관심이 많은’ 평범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었다.
이씨는 매년 연말이면 원생들과 함께 영어노래 공연, 혹은 영어 연극을 준비한다. 그는 2년 전 ‘해님 달님’을 공연하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고생 끝에 막을 올렸건만 배우들은 ''떡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같은 간단한 대사도 버거워했고, 가면이 비뚤어지는 바람에 자리에서 꼼짝 못하기도 했다. 남들 보기엔 ‘엉망진창’인 공연이었다. 그러나 그 때만큼 원생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겉으로 보이는 결과에 집착했다면 느끼지 못했을 보람”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올해는 노래공연을 준비 중인 이씨는 “원생들이 연극을 너무 하고 싶어 해 내년에는 작품을 선정해야겠다”며 웃었다.
이재걸 기자 claritas@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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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는 영어로 뭐라고 해요?”
수업을 하고 있는데 제이미가 물었다. 20대 여성인 그는 근위축증 때문에 전신이 마비됐다. 이 때문에 어린 시절 미국으로 입양됐다 파양돼 돌아온 기억도 있다. 유일하게 자유로운 부분은 입이었다. 가슴이 먹먹해졌다.
“제이미는 행복한 사람이야.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잖아. 도와주는 사람도 있고. 팔 다리 다 있어도 자기가 원하는 일 못하는 사람이 많아.”
제이미는 그림을 좋아했다. 그는 입으로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 법을 익혔다. 얼마 전에는 단 두 점이지만 자신만의 전시회도 열었다. 요즘엔 눈에 띄게 밝아졌다.
“제가 얼마나 이기적인데요. 원생들이랑 싸우기도 해요.”
주부인 이미금(43·하단사진)씨는 인천의 장애인 복지시설인 은광원에서 3년째 영어교육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제자’들은 10대부터 40대까지 나이는 제각각이지만 실제 인지능력은 대부분 어린이와 다를 바 없는 장애인이다. ‘I love Kimchi’처럼 간단한 영어문장 하나를 익히는 데 1년 이상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씨는 이들을 데리고 연말마다 영어노래 공연 및 영어연극을 선보이는 등 열심이다. “자원봉사는 봉사정신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원생들이 좋아하고 그도 즐겁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은광원 원생들에게 이씨는 다소 ‘별난’ 선생님이다. 먼저 방학 때는 절대 출근하지 않는다. 또 수업시간에 떠드는 원생은 3진 아웃제로 쫓아내기도 한다. “선생님 왜 지각했느냐”고 따지는 원생이 있으면 “너는 나보다 더 지각한 적 많잖아” 하며 티격태격 싸우기도 한다.
그러나 “이씨만큼 원생들이 따르는 자원봉사자도 드물다”는 게 은광원 관계자의 말이다. 일회성 동정에 익숙해진 그들을 꾸준히 찾으면서도 ‘특별하지 않게’ 대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85학번인 이씨는 대학시절 학교 근처 병원에서 하반신불수 남자 어린이에게 수학, 영어를 가르치면서 첫 봉사를 경험했다. 한창 대학가에서 최루탄 냄새가 진동하던 시절, “왜 대학생들은 데모를 하느냐”고 묻곤 하던 그 아이는 이해력이 남달랐고 대화도 잘 통했다. 이씨는 그 때 “장애인도 똑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새삼 놀랐다고 한다.
이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3년 후 결혼하자마자 당시 해군장교였던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이사를 갔다. 미국은 자원봉사가 생활의 일부인 나라였다. 지역 초등학교에서 행사를 열면 고등학생들이 봉사의 일환으로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다 책임졌다. 공부를 잘 못하는 친구에게 과외를 해주는 것도 봉사였다. 대학 입학 때도 봉사활동의 비중이 컸다. 학생들은 우리나라처럼 서류 한 장 떼서 제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봉사의 구체적인 내용과 느낀 점, 성과까지 포트폴리오 및 에세이로 작성할 만큼 정성을 들였다. 대학생들은 지역 빈민가 어린이들에게 과외를 해 주고 대신 학교로부터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이들에게 봉사는 시혜가 아니라 일상이었다. 이씨는 이런 자연스러운 봉사문화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곧 거기에 익숙해졌다.
3년 후 한국으로 돌아온 이씨는 반 ‘기러기 엄마’가 됐다. 아이들은 미국에서 학교 다니고, 남편은 회사일로 집을 비우기 일쑤였다. 그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봉사활동 할 곳을 찾았다. 인터넷 검색으로 은광원을 찾아 영어교육 봉사를 하고 싶다고 하자 담당자는 놀라는 눈치였다. 자식의 봉사점수를 대신 채우기 위해서도 아닌데다 아무 인맥 없이 무작정 찾아오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었다.
“원생들을 ‘특별하지 않게’ 대하는 데 1년이 걸렸어요.”
이씨는 처음에 몸과 마음이 온전치 못한 원생들을 보고 “두려웠다”고 털어놨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처신해야 진짜 이들을 돕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1년 동안 좌충우돌해 보니 비로소 이들이 ‘바깥세상에 관심이 많은’ 평범한 사람들임을 알 수 있었다.
이씨는 매년 연말이면 원생들과 함께 영어노래 공연, 혹은 영어 연극을 준비한다. 그는 2년 전 ‘해님 달님’을 공연하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 고생 끝에 막을 올렸건만 배우들은 ''떡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같은 간단한 대사도 버거워했고, 가면이 비뚤어지는 바람에 자리에서 꼼짝 못하기도 했다. 남들 보기엔 ‘엉망진창’인 공연이었다. 그러나 그 때만큼 원생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겉으로 보이는 결과에 집착했다면 느끼지 못했을 보람”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올해는 노래공연을 준비 중인 이씨는 “원생들이 연극을 너무 하고 싶어 해 내년에는 작품을 선정해야겠다”며 웃었다.
이재걸 기자 claritas@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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