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대목은 커녕 거리도 썰렁”

‘경기 불황 체감’ 택시 운전사 현장 목소리

지역내일 2008-12-04
IMF땐 사업계획 늘어놓던 손님들, 지금은 “살길 막막” 한탄

송년회며 크리스마스, 신정 등 굵직굵직한 명절도 많은 연말은 택시기사들에게 대목이다. 그러나 대목은 커녕 “연말 분위기 느끼기도 어렵다”는 게 이들의 반응이다.

“여기 보세요. 거리가 썰렁해요. 아무리 월요일이라지만 예년 이맘때는 노래도 시끄럽고 조명도 많았는데….”
지난 2일 저녁 8시 서울 강남 교보타워 앞에서 차를 세우고 담배를 피우던 택시운전기사 허민(49)씨가 길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올해로 법인택시를 몬지 8년째라는 허씨는 “원래 11월 말부터 송년회다 뭐다 해서 흥청대는 분위기가 있는데 올해는 불황 탓인지 조용하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이맘때 상점들이 크리스마스트리를 내놓고, 음악도 틀어서 분위기를 돋우기 마련인데 올해는 아직 그렇지 않다는 것. 그는 “종로, 대학로, 신촌 등 번화가들이 다 적막하다”며 “바짝 일하면 하루에 40만원씩 버는 날도 있었는데 요즘엔 밤새 15만원도 겨우 번다. 사납금 9만 8000원 내면 남는 게 없다”고 말했다.
갑자기 택시 한 대가 앞서가던 다른 택시를 과속으로 앞질러 가는 모습이 보였다. 서씨는 “몇 안 되는 손님을 먼저 태우려고 저러는 것”이라며 “택시끼리 경쟁도 많이 심해졌다”고 덧붙였다.
다음 날 낮 안국역 근처에서 만난 32년 베테랑 기사 이충구(59)씨는 “외환위기 때보다 손님들이 더 비관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10년 전에는 구조조정을 해도 퇴직금 두둑하게 챙겨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고민도 많았지만 희망이 있었다. 기분 좋게 취해 사업계획을 거창하게 늘어놓는 손님도 많았다.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당장 먹고 살 길이 없다’며 한탄하는 승객이 부쩍 늘었다. 이씨는 “그저께 한 손님은 술에 취해 ‘미수금을 석 달 째 회수하지 못해 부도가 날 판’이라며 울먹이더라”고 덧붙였다.
“직장 구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타요. 다들 내 자식 같지 뭐.”
이날 오후 3시쯤 광화문에서 만난 여자 택시기사 권 모(45)씨는 최근에 태웠던 취업 준비생 이야기를 꺼냈다. “정장 입은 예쁜 아가씨였는데 강남에 면접 보러 간다더군요.” 권씨는 공교롭게도 2주쯤 지나 목동 쪽에서 그 아가씨를 다시 태우게 됐다. “지난번 회사 어떻게 됐느냐고 물으니 떨어졌다고 했어요. 면접만 4번째 보는 거라던데….”
권씨는 내년과 내후년이면 두 딸이 차례로 대학에 진학한다. 직장 다니는 남편의 수입만으로는 부족해 등록금을 벌려고 택시운전에 뛰어들었다. 새벽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운전을 하고 나면 집에 가서 식구들이 먹을 저녁밥과 다음 날 아침밥까지 지어놓고 잠드는 생활의 연속이다. 그와 비슷한 처지의 여자 택시기사는 회사에서 8명쯤 된다. 그는 “좀 있으면 우리 딸도 그 때 그 아가씨 처지가 될 것 아니냐”며 “벌써부터 안쓰럽다”고 말했다.
“융자는 갚아야 하고 손님은 없고….” 해질 무렵 서울 중구 신라호텔 뒤편 기사식당에서 만난 최성렬(56)씨는 외환위기 전까지 조명회사에서 25년간 일하다 그만두고 8000만원 모아서 크레인 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때마침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건설경기가 급속히 나빠졌다. 그는 크레인을 팔고 택시운전을 시작했다. 벌이가 괜찮았다. 그래서 3년 전 융자를 1억 5000만원 얻어 개인택시를 사고 집도 샀다. “자식이 아들 둘, 딸 둘인데 택시운전으로 모두 대학 보내고 취업, 결혼까지 시켰다”는 최씨는 “이제 융자금만 갚으면 되는데 경기를 보아하니 이자 갚기도 빠듯하겠다”며 "LPG값은 또 왜 이렇게 오르냐"고 말했다.
“요샌 환갑 넘어서 택시운전 시작하는 사람이 많죠.” 명동에서 만난 박충민(70)씨는 공무원 정년까지 채우고 퇴직했다가 최근 운전대를 잡게 됐다. 아들 사업에 돈을 보탰다가 사업이 망한 탓이다. 아내에게도 미안하고 당장의 생활비도 벌어야 했다.
박씨는 “요즘 나이든 사람 할 수 있는 일이 드물지만 택시는 정년이 따로 없고 다 받아준다”며 “아파트 경비보다 활동적이라 좋다”고 말했다.
2년 전 직장에서 정년퇴임한 이 모(60) 씨는 재테크에 관심이 생겨 퇴직금으로 지난해 말 펀드를 들었다가 반토막 나서 택시로 뛰어든 경우. 이씨는 “택시비 안내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줄 몰랐다. 올해만 3번째”라며 “내가 운이 없는 건지 경제가 나빠져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76년부터 택시운전으로 잔뼈가 굵은 이병수(53)씨. 그는 83년부터 개인택시를 몰고 있다. 3년 전쯤 모범택시도 몰아봤는데 수지가 안 맞은데다 최근 LPG가격까지 올라서 다시 개인택시로 바꿨다고 한다. 그는 “(돈) 있는 사람들은 자가용 몰고, 없는 사람은 어지간히 급하지 않으면 지하철이나 버스 탄다”며. “4년 전만 해도 합승 심심찮게 할 정도였는데 요샌 영 아니”라고 말했다.
“경마에 빠져서 번 돈을 과천에 다 갖다 바쳐요. 일도 잘 안 나오고.” 서울역에서 만난 김 모(45)씨는 자신의 동료 걱정을 했다. 김씨에 따르면 그 동료는 한 때 중소기업 간부를 하다 10년 전 외환위기로 택시를 타기 시작했다. 얼마 전부터“친구를 잘못 만나” 경마에 빠져 살고 있다고. “벌이는 힘들어지는데 분위기가 안 좋으니까 ‘한 방’을 노리고 싶은가 봐요.”
“착실하던 사람이 한 번 도박에 맛들이니 무섭게 변하더라”며 고개를 흔들던 김씨는 택시기사 중 적지 않은 사람이 주말이면 경마장을 찾는다고 말했다. 과천 경마장 주차장에 늘어선 택시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단다. 그는 “불경기가 사람 여럿 망가뜨리는 것 같다”며 “올 겨울 무사히 넘기면 희망이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글·사진 이재걸 기자 claritas@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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