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잃은 선창에는 수탈역사가 숨 쉬고…
“군산은 ‘세기’가 뒤엉킨 근대문화박물관”
1899년 개항을 전후로 격변의 역사를 경험한 군산시는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지역이다. 제조업과 첨단산업이 혼재된 시설부터 20세기 근대역사의 흔적이 도심 곳곳에 남아 있다. 다양한 이유로 외면하거나 드러내기를 꺼려했던 근대역사를 새로 조명해 문화공간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군산만의 독특한 역사’를 산업화 하려는 시도를 조명하고 그 가능성을 2회에 걸쳐 살펴본다.
2008년 군산은 얼굴이 판이하게 다른 쌍둥이 모습이다. 동쪽 내륙과 맞닿은 산업도로변으로대야의 너른 들판을 건너는가 싶더니 바다를 만나는 서쪽은 조선소, 제철화학, 자동차, 태양광소재 산업의 중심지 모습이다. 최대 간척사업이라는 ‘새만금’의 경계를 알리는 방조제는 오래전부터 군산의 미래이자 희망의 상징물이 됐다.
도심 아파트단지를 가로질러 만난 원도심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군데군데 남아 있는 건축물과 수명을 다한 부두의 초라한 모습은 군산을 19세기 말에 묶어 놓은 듯 보인다.
원도심엔 일본풍 근대건축물 즐비
군산시 금동 한 골목길. 작은 담장 너머로 단층 목조 주택이 한 눈에 들어온다. 1935년 집을 지을 때 심었다는 일본 전나무와 오밀조밀한 조경이 일본풍을 물씬 풍긴다. ‘마루보시’라 불렀던 운송회사 군산지점장 관사로 쓰였던 건물이다. 윤여삼(72)씨 내외가 1967년부터 살고 있는데 화장실만 바꿨을 뿐 90% 원형을 보존해 왔다.
지주와 부유층이 거주했던 신흥동에는 히로쓰 가옥이 남아 있다. 보수를 위해 건설용 비계가 설치돼 있지만, 본 모습은 검게 콜타르 칠을 한 목판과 지붕 아래 두 개의 처마로 일본식 가옥임을 짐작케 한다. 일제시대 때 일본인 포목상이었던 히로쓰(廣津)가 살았던 곳이다. 1925년 지은 이 집은 일본 전국시대 사무라이 가옥의 형태를 따랐다고 한다.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야쿠자 하야시의 집으로 나왔고, ‘타짜’에도 출현했던 곳이다.
히로쓰 가옥 주변으로 일본식 집들이 널려 있다. 군산시 신흥동·장미동·영화동 일대에는 일제시대 일본인이 거주했던 집이 100여 채나 남아 있다.
1899년 군산항 개항에 앞서 대한제국은 일제만을 위한 조계지역이 아닌 각국 조계지로 지정했지만 결국은 일제의 영향력에 좌우됐다. 일제는 지금의 내항에서 월명동에 이르는 거리에 일본인 마을까지 조성했다. 일제는 갈대밭 천지였던 곳을 매립하고 일본식 마치(町) 체계로 신도시를 조성한 것이다. 본정통(해망로) 전주통(영화동) 명치정(중앙로1가) 강호정(중앙로2가)이 이때 등장한다. 사실상 ‘군산 속의 일본’이 만들어져 개항당시 상시거주 일본인이 77명에서 1940년에는 8391명으로 급증했다.
장미동·월명동 등 내항 주변에는 주택 말고도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세워진 관공서 건물이 남아 있다. 1908년 붉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지은 옛 군산세관 건물은 고딕과 로마네스크를 섞은 일본식 건축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서울역사, 한국은행 본점건물과 함께 국내에 3곳 밖에 없어 건축사적인 의미를 인정받고 있다.
내항 바로 앞 장미동에는 건평 1980㎡짜리 옛 조선은행 건물이 서 있다. 1923년에 지어진 것으로 당시 군산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4층 높이로 2층 건물을 올렸는데 일본 무사의 투구를 연상케 한다. 개인이 넘겨받아 고급 술집으로 사용하다 10여 년 화재로 내부는 망가지고 겉모습만 남아 있다. 그 옆으로는 1907년에 지은 ‘나가사키 18은행’ 건물이 있다. 쌀 반출과 토지강매 등 수탈이 공공연히 진행된 현장이다.
일제와 함께 그들의 종교도 들어왔다. 금광동에 있는 ‘동국사’가 이를 증명한다. 다양한 문양의 공포와 곡선이 조화를 이루는 우리 절집과는 너무도 다르다. 동국사 대웅전은 직선의 용마루가, 높고 가파른 지붕을 떠 받치고 있다. 1913년 건립당시 금강사였던 곳이 동국사로 바뀐 것 빼고는 당시 분위기를 그대로 전한다. 동국사는 특히 시인 고은 선생을 불제자로 인도한 절로 유명하다.
가장 번성했던 항구의 추락
사실 군산의 근대사의 상당부분이 ‘개항=일제=쌀 수탈’로 도식화 된다. 고려시대부터 쌀을 실어나르던 포구와 조창이 있던 곳이고, 개항이후 한해 200만석 이상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던 창구였으니 틀린 말이 아니다. 오죽하면 군산 내항에 쌀을 싣기 위해 만든 ‘뜬다리’ 부두 준공식에 참가한 사이토 총독이 ‘오, 고메노 군산(쌀의 군산)’을 외쳤을까.
해망로를 사이로 조선은행, 미곡취인소(미두장)를 세우고, 대규모 항만시설과 도로 등을 서둘러 건설한다. 군산내항의 뜬다리(부전교)와 나가사키18은행, 군산세관 건물이 그 흔적을 전하고 있다. 특히 ‘한’ 서린 쌀을 실었던 내항은 금강하구둑이 들어선 후 금강이 토해낸 퇴적물로 초라한 모습으로 남았다.
내항에서 진포해상테마공원을 지나면 금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길목에 ‘째보선창’이 있다. 금강이 서해바다를 만나 ‘강물인지 바닷물인지 모를’ 물을 만난 모양이 Y자로 째져 붙었다는 이곳의 본래이름은 죽성포구. 당초 조선상인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설애장(경장시장) 설애포보다 작은 어시장이었으나, 내항이 번성하면서 일제시대 최고 위치를 누렸다. 째보선창은 개항 이후 군산의 시대상을 풍자한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배경이다. 서천땅을 처분한 정주사가 똑딱선을 타고 째보선창으로 건너온다. 하지만 쌀 현물을 가지고 투기하는 미두장에서 돈을 다 날리고는 선창에서 자살을 기도했던 곳이다.
군산시내 뿐 아니라 개정 대야 서수면에도 일제 강점기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수탈의 역사를 근대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군산에 이처럼 19~20세기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유는 개발에서 소외됐기 때문이다.
이들 일제시대 건물은 해방 이후 개발 바람을 덜 타면서 오히려 보존에 도움이 됐다.
‘군산지킴이’로 활동하는 이복웅(63) 군산문화원장은 “개항 전후 군산은 쏟아져 들어온 근대문물로 가장 번성한 도시였다”면서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것이 이런 유산을 보존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주민입장에서는 지나간 세월만 붙잡고 살 수 없는 노릇이다. 10~20년 전부터 군산 시내의 중심 상권이 나운동·미룡동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이들 거리가 슬럼화되고 번영의 유산은 노후화 됐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일재 잔재를 싹 쓸어버리고 새로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 오래전부터 제기됐다.
올해 초 일본 아사히신문(1월 8일자)은 ‘식민지 지배의 잔재에 흔들리는 일본 통치의 흔적… 개발과 보존’이라는 제목으로 군산의 적산가옥 실태에 대해 보도하기도 했다. 이 신문은 “적산가옥으로 불리며 식민 지배의 상징이지만 주로 개발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전했다.
군산시는 이 지역을 근대역사문화 지구로 개발하는 관광자원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원형이 잘 보존된 적산가옥과 일제시대 사용하던 은행·세관 등 근대 건축물을 둘러볼 수 있는 탐방코스를 만들어 내국인은 물론 일본·중국 등 외국인을 위한 관광명소로 활용할 계획이다. 대부분 개인 소유하고 있는 주택의 원형 보존을 위해 외형 유지를 조건으로 개·보수 비용으로 1000만원까지 지원하는 조례도 만들었다. 근대역사박물관 건립도 계획하고 있다.
군산시 김중규 학예연구사는 “국내에서 근대역사는 피하고 싶은 치욕으로 치부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며 “군산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유산을 활용해 관광과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군산 이명환 기자 mhan@naeil.com
“군산은 ‘세기’가 뒤엉킨 근대문화박물관”
1899년 개항을 전후로 격변의 역사를 경험한 군산시는 근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지역이다. 제조업과 첨단산업이 혼재된 시설부터 20세기 근대역사의 흔적이 도심 곳곳에 남아 있다. 다양한 이유로 외면하거나 드러내기를 꺼려했던 근대역사를 새로 조명해 문화공간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군산만의 독특한 역사’를 산업화 하려는 시도를 조명하고 그 가능성을 2회에 걸쳐 살펴본다.
2008년 군산은 얼굴이 판이하게 다른 쌍둥이 모습이다. 동쪽 내륙과 맞닿은 산업도로변으로대야의 너른 들판을 건너는가 싶더니 바다를 만나는 서쪽은 조선소, 제철화학, 자동차, 태양광소재 산업의 중심지 모습이다. 최대 간척사업이라는 ‘새만금’의 경계를 알리는 방조제는 오래전부터 군산의 미래이자 희망의 상징물이 됐다.
도심 아파트단지를 가로질러 만난 원도심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군데군데 남아 있는 건축물과 수명을 다한 부두의 초라한 모습은 군산을 19세기 말에 묶어 놓은 듯 보인다.
원도심엔 일본풍 근대건축물 즐비
군산시 금동 한 골목길. 작은 담장 너머로 단층 목조 주택이 한 눈에 들어온다. 1935년 집을 지을 때 심었다는 일본 전나무와 오밀조밀한 조경이 일본풍을 물씬 풍긴다. ‘마루보시’라 불렀던 운송회사 군산지점장 관사로 쓰였던 건물이다. 윤여삼(72)씨 내외가 1967년부터 살고 있는데 화장실만 바꿨을 뿐 90% 원형을 보존해 왔다.
지주와 부유층이 거주했던 신흥동에는 히로쓰 가옥이 남아 있다. 보수를 위해 건설용 비계가 설치돼 있지만, 본 모습은 검게 콜타르 칠을 한 목판과 지붕 아래 두 개의 처마로 일본식 가옥임을 짐작케 한다. 일제시대 때 일본인 포목상이었던 히로쓰(廣津)가 살았던 곳이다. 1925년 지은 이 집은 일본 전국시대 사무라이 가옥의 형태를 따랐다고 한다.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야쿠자 하야시의 집으로 나왔고, ‘타짜’에도 출현했던 곳이다.
히로쓰 가옥 주변으로 일본식 집들이 널려 있다. 군산시 신흥동·장미동·영화동 일대에는 일제시대 일본인이 거주했던 집이 100여 채나 남아 있다.
1899년 군산항 개항에 앞서 대한제국은 일제만을 위한 조계지역이 아닌 각국 조계지로 지정했지만 결국은 일제의 영향력에 좌우됐다. 일제는 지금의 내항에서 월명동에 이르는 거리에 일본인 마을까지 조성했다. 일제는 갈대밭 천지였던 곳을 매립하고 일본식 마치(町) 체계로 신도시를 조성한 것이다. 본정통(해망로) 전주통(영화동) 명치정(중앙로1가) 강호정(중앙로2가)이 이때 등장한다. 사실상 ‘군산 속의 일본’이 만들어져 개항당시 상시거주 일본인이 77명에서 1940년에는 8391명으로 급증했다.
장미동·월명동 등 내항 주변에는 주택 말고도 독특한 건축양식으로 세워진 관공서 건물이 남아 있다. 1908년 붉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지은 옛 군산세관 건물은 고딕과 로마네스크를 섞은 일본식 건축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서울역사, 한국은행 본점건물과 함께 국내에 3곳 밖에 없어 건축사적인 의미를 인정받고 있다.
내항 바로 앞 장미동에는 건평 1980㎡짜리 옛 조선은행 건물이 서 있다. 1923년에 지어진 것으로 당시 군산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 4층 높이로 2층 건물을 올렸는데 일본 무사의 투구를 연상케 한다. 개인이 넘겨받아 고급 술집으로 사용하다 10여 년 화재로 내부는 망가지고 겉모습만 남아 있다. 그 옆으로는 1907년에 지은 ‘나가사키 18은행’ 건물이 있다. 쌀 반출과 토지강매 등 수탈이 공공연히 진행된 현장이다.
일제와 함께 그들의 종교도 들어왔다. 금광동에 있는 ‘동국사’가 이를 증명한다. 다양한 문양의 공포와 곡선이 조화를 이루는 우리 절집과는 너무도 다르다. 동국사 대웅전은 직선의 용마루가, 높고 가파른 지붕을 떠 받치고 있다. 1913년 건립당시 금강사였던 곳이 동국사로 바뀐 것 빼고는 당시 분위기를 그대로 전한다. 동국사는 특히 시인 고은 선생을 불제자로 인도한 절로 유명하다.
가장 번성했던 항구의 추락
사실 군산의 근대사의 상당부분이 ‘개항=일제=쌀 수탈’로 도식화 된다. 고려시대부터 쌀을 실어나르던 포구와 조창이 있던 곳이고, 개항이후 한해 200만석 이상의 쌀을 일본으로 실어 나르던 창구였으니 틀린 말이 아니다. 오죽하면 군산 내항에 쌀을 싣기 위해 만든 ‘뜬다리’ 부두 준공식에 참가한 사이토 총독이 ‘오, 고메노 군산(쌀의 군산)’을 외쳤을까.
해망로를 사이로 조선은행, 미곡취인소(미두장)를 세우고, 대규모 항만시설과 도로 등을 서둘러 건설한다. 군산내항의 뜬다리(부전교)와 나가사키18은행, 군산세관 건물이 그 흔적을 전하고 있다. 특히 ‘한’ 서린 쌀을 실었던 내항은 금강하구둑이 들어선 후 금강이 토해낸 퇴적물로 초라한 모습으로 남았다.
내항에서 진포해상테마공원을 지나면 금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길목에 ‘째보선창’이 있다. 금강이 서해바다를 만나 ‘강물인지 바닷물인지 모를’ 물을 만난 모양이 Y자로 째져 붙었다는 이곳의 본래이름은 죽성포구. 당초 조선상인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설애장(경장시장) 설애포보다 작은 어시장이었으나, 내항이 번성하면서 일제시대 최고 위치를 누렸다. 째보선창은 개항 이후 군산의 시대상을 풍자한 채만식의 소설 ‘탁류’의 배경이다. 서천땅을 처분한 정주사가 똑딱선을 타고 째보선창으로 건너온다. 하지만 쌀 현물을 가지고 투기하는 미두장에서 돈을 다 날리고는 선창에서 자살을 기도했던 곳이다.
군산시내 뿐 아니라 개정 대야 서수면에도 일제 강점기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수탈의 역사를 근대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군산에 이처럼 19~20세기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유는 개발에서 소외됐기 때문이다.
이들 일제시대 건물은 해방 이후 개발 바람을 덜 타면서 오히려 보존에 도움이 됐다.
‘군산지킴이’로 활동하는 이복웅(63) 군산문화원장은 “개항 전후 군산은 쏟아져 들어온 근대문물로 가장 번성한 도시였다”면서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것이 이런 유산을 보존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주민입장에서는 지나간 세월만 붙잡고 살 수 없는 노릇이다. 10~20년 전부터 군산 시내의 중심 상권이 나운동·미룡동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이들 거리가 슬럼화되고 번영의 유산은 노후화 됐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일재 잔재를 싹 쓸어버리고 새로 개발해야 한다”는 주장이 오래전부터 제기됐다.
올해 초 일본 아사히신문(1월 8일자)은 ‘식민지 지배의 잔재에 흔들리는 일본 통치의 흔적… 개발과 보존’이라는 제목으로 군산의 적산가옥 실태에 대해 보도하기도 했다. 이 신문은 “적산가옥으로 불리며 식민 지배의 상징이지만 주로 개발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전했다.
군산시는 이 지역을 근대역사문화 지구로 개발하는 관광자원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원형이 잘 보존된 적산가옥과 일제시대 사용하던 은행·세관 등 근대 건축물을 둘러볼 수 있는 탐방코스를 만들어 내국인은 물론 일본·중국 등 외국인을 위한 관광명소로 활용할 계획이다. 대부분 개인 소유하고 있는 주택의 원형 보존을 위해 외형 유지를 조건으로 개·보수 비용으로 1000만원까지 지원하는 조례도 만들었다. 근대역사박물관 건립도 계획하고 있다.
군산시 김중규 학예연구사는 “국내에서 근대역사는 피하고 싶은 치욕으로 치부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며 “군산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유산을 활용해 관광과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군산 이명환 기자 m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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