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희망이다 - 나나우미유코씨
“다문화가정, 진짜 행복해져야 해요”
‘이방인’에서 ‘제야의종’ 타종인사로
“‘다문화가정 행복을 위해서!’ 종을 칠 때마다 마음으로 외쳤어요. 고생하는 언니들 많아요. 우리 행복해져야 해요, 진짜 행복해져야 해요!”
나나우미유코(39·서울 양천구)씨에게 2009년은 남다른 해다. 보신각에서 제야의종을 울리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했다. ‘이방인’으로 서울살이를 시작한 지 13년만에 시민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제야의종 타종인사로 종각에 올랐다.
타종인사로 선정될 거라는 소식을 접하고 처음에는 거절했다. 필리핀이나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출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생하지 않았다는 “위화감 때문”이다. 남편 왕성복(39·서울시 기능8급)씨가 유코씨를 설득했다. 왕씨는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참여하자고 했다”며 “자격미달일지 모르지만 하자, 그리고 잘 살자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1주일 전쯤 최종 통보를 받고 아이들과 함께 종각 일대를 둘러봤다. 그때와 또 다르게 타종을 하면 본 종은 웅장했다. 가슴 설레기도 했다. 타종을 위해 밤나들이를 할 때 서로 아이들을 돌봐주겠다는 이웃들을 보며 그 의미를 새삼 느끼기도 했다.
“옆집 아줌마들이 서로 애들을 봐주겠대요. 이산가족 만들고 나갔죠. 2명은 옆집으로, 1명은 5층으로 보냈어요. 아이들한테도 종 치는 의미를 설명했는데 아직 모르는 것 같아요.”
경제위기와 함께 시작한 결혼생활
1일 오후 유코씨와 성복씨는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결혼생활 13년간 ‘단련’한 덕분이다. 부부가 첫 출발을 할 때는 지금과 확연히 달랐다.
“1997년 11월에 결혼을 했어요. IMF 경제위기와 함께 결혼생활을 시작한 거죠. 양쪽 집안에서 모두 반대해 결혼식도 못 올렸어요.”
서울 은평구의 한 반지하방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경북 문경에서 혼자 사시던 어머니도 모셔왔다. 어머니는 이국에서 온 며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좁은 집에서 모든 게 따로 따로 였어요. 밥도 따로 먹고, 밥솥도 따로 쓰고…. 좁은 집에서 그랬어요. (며느리가) 마음에 안드니까. 5년 정도는 그렇게 산 것 같아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성복씨가 ‘공무원 인력풀’에 포함됐다. 평가시험에서 1등을 하고 빠져나오기까지 1년여동안 보직을 받지 못하고 급여는 기본급으로 동결됐다. 성복씨는 술로 마음을 달래며 방황했고 보다 못해 유코씨가 화장품 외판원으로 나서기도 했다.
“돈을 벌긴요. 차비만 쓰고 다녔죠. 경제사정이 안좋아서 아주 말을 잘하는 사람이 설득해도 물건을 살까 말까 하는데 한국말도 잘 못하는 여자가 팔아달라고 하면 누가 사겠어요?”
성복씨가 당시를 돌이키며 웃는다. 유코씨도 “그때는 세상을 잘 몰랐던 것 같다”고 받아친다.
“주변에서는 ‘대단하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냐’고 하지만 결혼이란 게 이런 건가, 한국생활이란 게 이런 건가 하고 살았어요.”
눈이 안보이던 어머니는 귀도 어두워지고 몸이 불편해지면서 점차 며느리에게 의존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성복씨도 제 자리를 찾아갔다. 첫 아이 문영이를 낳으면서 유코씨 어머니도 마음을 풀었다.
주민등록 없어 가족수당도 못받아
유코씨와 성복씨는 집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밖에서도 싸워야(?) 했다. 주민등록이 없던 유코씨는 호적상 성복씨 아내였지만 직장에서는 아니었다. 주민등록등본에 기재되지 않아 가족수당 대상도 안됐다. 성복씨는 “아내가 일본인이라는 말도 쉽게 꺼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다문화가정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때는 그냥 국제결혼이었잖아요. 국제결혼하는 사람은 무능하거나 열등하다고 사회적으로 생각했구요. 지금은 의료보험이나 운전면허나 모든 면에서 동등해졌지만 그때는 통장도 못 만들었어요. 시골 우체국에 계좌를 개설하려고 갔는데 외국인 등록증으로는 어렵다고 안된대요.”
성복씨는 “지금에야 다문화가정 빼면 농촌은 유지가 안될 정도 아니냐”고 꼬집었다.
부부가 선택한 해법은 ‘둘이서 풀어나가기’였다. 유코씨는 “돈 안쓰고 재미있게 참여할 수 있는 일을 찾아다녔다”고 말했다. 근사한 식당은 아니지만 순대국집 해장국집같은 곳에서 ‘외식’을 했다. 공원에서 컵라면을 끓여 김밥과 함께 먹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형편이 닿는 대로 가족여행도 갔다. 서울 근교부터 강원도 속초까지 매년 두세차례는 떠났다.
유코씨에게 한국과 한국 문화를 보여주려는 성복씨 나름의 노력이었다. 결혼식이나 행사는 무조건 참가했고 이웃이나 친구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온갖 마라톤대회는 빼놓지 않았고 가족 걷기대회에도 참가했다. 요즘은 안양천길을 함께 걷는다.
“대화를 많이 했어요. 나는 이야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문영 아빠는 말이 정말 많아요. 혼자서라도 농담을 하는 사람이예요. 말을 시키니 대화를 하게 되고 스트레스가 풀리던데요.”
처음 어머니를 만나러 가던 날도 그랬다. 고속버스 안에서 어색한 침묵을 깨듯 성복씨 혼자 “떠들었다”. 물론 유코씨는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말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편했다. 함께 웃게 됐다.
두 나라 장점만 받아들이면…
유코씨와 성복씨는 2000년 지금 살고 있는 신정3동 영구임대주택으로 이사했다. 1급 장애를 가진 어머니 덕이다. 지난해에는 영등포건강가정지원센터 도움으로 세 아이 축복 속에서 결혼식도 올렸다.
“집은 좁지만 좋아요. 이웃들도 착해서 애들이 뛰어도 층간소음이라고 낯붉힐 일 없구요.”
유코씨 부부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은 ‘일상에서 행복찾기’인 듯하다. 젊은 부부답지 않게 아이를 셋이나 두어 더 어렵지 않을까 싶지만 “어차피 돈이 없으니 아이들에게 큰 욕심을 두지 않는다”고 답한다.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하면 좋겠지만 그저 건강하게, 서로 사이좋게만 자라면 만족이란다.
살림살이는 어렵지만 매년 한번씩 유코씨 친정인 후쿠시마까지 가족여행을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비행기삯은 비싸지만 과감히 카드를 꺼낸다.
“10개월 할부로 해요. 그 돈 다 갚을 때 쯤 되면 다시 시작하는 식이죠. 돈 때문에 친정에 못가는 다문화가정이 많은데 우리 같은 방법을 권해주고 싶어요. 자기 실정에 맞춰서 처가와 배우자를 고려해야 해요.”
이런 남편이 있어서일까. 유코씨는 그간의 한국생활이 “그렇게 힘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웃 친구들이 설이나 추석에 친정을 찾아갈 때 외로움을 탈 뿐이란다. 유코씨는 “한국이 그만큼 좋다”며 “한국이 나한테 맞는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부부 다문화가정을 위한 역할모델이 될 수 있길 소망한다. 다문화가정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단다. 성복씨는 “기회가 되면 ‘후배’들에게 경험을 들려주고 싶다”. 유코씨 역시 “다른 다문화가정 여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기다린다.
“두 나라의 좋은 점만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아요. 우선 아이들이 학원에 다니지 않고도 2개 언어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아내 나라 말도 공부하고 그 나라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노력도 많이 해야죠. 부인을 돈주고 사왔다고 생각하거나 간병인 정도로 여기는 분들도 가끔 만나요. 자녀를 생각하더라도 그럴 수 없을 거예요.”
유코씨네 집을 나서는 순간 냉장고 문에 붙은 문영이의 방학일기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쓴 일기다.
“오늘 아침 (선물은) 내가 원하는 물건이 아니었다. 짜증이 났고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자기가 원하는 물건이 아닐 수 있다고 얘기한 것이다….”
김진명 기자 jm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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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가정, 진짜 행복해져야 해요”
‘이방인’에서 ‘제야의종’ 타종인사로
“‘다문화가정 행복을 위해서!’ 종을 칠 때마다 마음으로 외쳤어요. 고생하는 언니들 많아요. 우리 행복해져야 해요, 진짜 행복해져야 해요!”
나나우미유코(39·서울 양천구)씨에게 2009년은 남다른 해다. 보신각에서 제야의종을 울리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했다. ‘이방인’으로 서울살이를 시작한 지 13년만에 시민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제야의종 타종인사로 종각에 올랐다.
타종인사로 선정될 거라는 소식을 접하고 처음에는 거절했다. 필리핀이나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 출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생하지 않았다는 “위화감 때문”이다. 남편 왕성복(39·서울시 기능8급)씨가 유코씨를 설득했다. 왕씨는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참여하자고 했다”며 “자격미달일지 모르지만 하자, 그리고 잘 살자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1주일 전쯤 최종 통보를 받고 아이들과 함께 종각 일대를 둘러봤다. 그때와 또 다르게 타종을 하면 본 종은 웅장했다. 가슴 설레기도 했다. 타종을 위해 밤나들이를 할 때 서로 아이들을 돌봐주겠다는 이웃들을 보며 그 의미를 새삼 느끼기도 했다.
“옆집 아줌마들이 서로 애들을 봐주겠대요. 이산가족 만들고 나갔죠. 2명은 옆집으로, 1명은 5층으로 보냈어요. 아이들한테도 종 치는 의미를 설명했는데 아직 모르는 것 같아요.”
경제위기와 함께 시작한 결혼생활
1일 오후 유코씨와 성복씨는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결혼생활 13년간 ‘단련’한 덕분이다. 부부가 첫 출발을 할 때는 지금과 확연히 달랐다.
“1997년 11월에 결혼을 했어요. IMF 경제위기와 함께 결혼생활을 시작한 거죠. 양쪽 집안에서 모두 반대해 결혼식도 못 올렸어요.”
서울 은평구의 한 반지하방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경북 문경에서 혼자 사시던 어머니도 모셔왔다. 어머니는 이국에서 온 며느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좁은 집에서 모든 게 따로 따로 였어요. 밥도 따로 먹고, 밥솥도 따로 쓰고…. 좁은 집에서 그랬어요. (며느리가) 마음에 안드니까. 5년 정도는 그렇게 산 것 같아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성복씨가 ‘공무원 인력풀’에 포함됐다. 평가시험에서 1등을 하고 빠져나오기까지 1년여동안 보직을 받지 못하고 급여는 기본급으로 동결됐다. 성복씨는 술로 마음을 달래며 방황했고 보다 못해 유코씨가 화장품 외판원으로 나서기도 했다.
“돈을 벌긴요. 차비만 쓰고 다녔죠. 경제사정이 안좋아서 아주 말을 잘하는 사람이 설득해도 물건을 살까 말까 하는데 한국말도 잘 못하는 여자가 팔아달라고 하면 누가 사겠어요?”
성복씨가 당시를 돌이키며 웃는다. 유코씨도 “그때는 세상을 잘 몰랐던 것 같다”고 받아친다.
“주변에서는 ‘대단하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냐’고 하지만 결혼이란 게 이런 건가, 한국생활이란 게 이런 건가 하고 살았어요.”
눈이 안보이던 어머니는 귀도 어두워지고 몸이 불편해지면서 점차 며느리에게 의존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성복씨도 제 자리를 찾아갔다. 첫 아이 문영이를 낳으면서 유코씨 어머니도 마음을 풀었다.
주민등록 없어 가족수당도 못받아
유코씨와 성복씨는 집안에서와 마찬가지로 밖에서도 싸워야(?) 했다. 주민등록이 없던 유코씨는 호적상 성복씨 아내였지만 직장에서는 아니었다. 주민등록등본에 기재되지 않아 가족수당 대상도 안됐다. 성복씨는 “아내가 일본인이라는 말도 쉽게 꺼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다문화가정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때는 그냥 국제결혼이었잖아요. 국제결혼하는 사람은 무능하거나 열등하다고 사회적으로 생각했구요. 지금은 의료보험이나 운전면허나 모든 면에서 동등해졌지만 그때는 통장도 못 만들었어요. 시골 우체국에 계좌를 개설하려고 갔는데 외국인 등록증으로는 어렵다고 안된대요.”
성복씨는 “지금에야 다문화가정 빼면 농촌은 유지가 안될 정도 아니냐”고 꼬집었다.
부부가 선택한 해법은 ‘둘이서 풀어나가기’였다. 유코씨는 “돈 안쓰고 재미있게 참여할 수 있는 일을 찾아다녔다”고 말했다. 근사한 식당은 아니지만 순대국집 해장국집같은 곳에서 ‘외식’을 했다. 공원에서 컵라면을 끓여 김밥과 함께 먹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형편이 닿는 대로 가족여행도 갔다. 서울 근교부터 강원도 속초까지 매년 두세차례는 떠났다.
유코씨에게 한국과 한국 문화를 보여주려는 성복씨 나름의 노력이었다. 결혼식이나 행사는 무조건 참가했고 이웃이나 친구네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온갖 마라톤대회는 빼놓지 않았고 가족 걷기대회에도 참가했다. 요즘은 안양천길을 함께 걷는다.
“대화를 많이 했어요. 나는 이야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문영 아빠는 말이 정말 많아요. 혼자서라도 농담을 하는 사람이예요. 말을 시키니 대화를 하게 되고 스트레스가 풀리던데요.”
처음 어머니를 만나러 가던 날도 그랬다. 고속버스 안에서 어색한 침묵을 깨듯 성복씨 혼자 “떠들었다”. 물론 유코씨는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말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편했다. 함께 웃게 됐다.
두 나라 장점만 받아들이면…
유코씨와 성복씨는 2000년 지금 살고 있는 신정3동 영구임대주택으로 이사했다. 1급 장애를 가진 어머니 덕이다. 지난해에는 영등포건강가정지원센터 도움으로 세 아이 축복 속에서 결혼식도 올렸다.
“집은 좁지만 좋아요. 이웃들도 착해서 애들이 뛰어도 층간소음이라고 낯붉힐 일 없구요.”
유코씨 부부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은 ‘일상에서 행복찾기’인 듯하다. 젊은 부부답지 않게 아이를 셋이나 두어 더 어렵지 않을까 싶지만 “어차피 돈이 없으니 아이들에게 큰 욕심을 두지 않는다”고 답한다.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하면 좋겠지만 그저 건강하게, 서로 사이좋게만 자라면 만족이란다.
살림살이는 어렵지만 매년 한번씩 유코씨 친정인 후쿠시마까지 가족여행을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비행기삯은 비싸지만 과감히 카드를 꺼낸다.
“10개월 할부로 해요. 그 돈 다 갚을 때 쯤 되면 다시 시작하는 식이죠. 돈 때문에 친정에 못가는 다문화가정이 많은데 우리 같은 방법을 권해주고 싶어요. 자기 실정에 맞춰서 처가와 배우자를 고려해야 해요.”
이런 남편이 있어서일까. 유코씨는 그간의 한국생활이 “그렇게 힘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웃 친구들이 설이나 추석에 친정을 찾아갈 때 외로움을 탈 뿐이란다. 유코씨는 “한국이 그만큼 좋다”며 “한국이 나한테 맞는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부부 다문화가정을 위한 역할모델이 될 수 있길 소망한다. 다문화가정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단다. 성복씨는 “기회가 되면 ‘후배’들에게 경험을 들려주고 싶다”. 유코씨 역시 “다른 다문화가정 여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기다린다.
“두 나라의 좋은 점만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아요. 우선 아이들이 학원에 다니지 않고도 2개 언어를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아내 나라 말도 공부하고 그 나라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노력도 많이 해야죠. 부인을 돈주고 사왔다고 생각하거나 간병인 정도로 여기는 분들도 가끔 만나요. 자녀를 생각하더라도 그럴 수 없을 거예요.”
유코씨네 집을 나서는 순간 냉장고 문에 붙은 문영이의 방학일기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쓴 일기다.
“오늘 아침 (선물은) 내가 원하는 물건이 아니었다. 짜증이 났고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자기가 원하는 물건이 아닐 수 있다고 얘기한 것이다….”
김진명 기자 jm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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