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희망을 말해야 한다
눈만 뜨면 들리는 소리가 ‘어렵다’ ‘죽겠다’는 말들이다. 송년회 때마다 들어온 그 말의 편린이 귀에 못박혔는데, 새해 덕담 끝에도 빠지지 않아 이명처럼 귓전에 붙어버렸다. 신문이며 잡지며 TV같은 매스 미디어들이 쏟아내는 보도가 ‘불황’ ‘불경기’에서 ‘준공황’이라는 표현으로 에스컬레이트 되었다. 잘 나가는 기업들도 몸을 움츠려 새해 아침 몰아친 한파보다 더한 맹추위 같다.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말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큰 고난을 여러 차례 이겨낸 경험과 지혜가 있다. 가까이는 바로 11년 전 우리 경제가 국제 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에 의지했던 국가부도의 위기를 몇해만에 거뜬히 극복한 경험이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우리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던 엄동의 해에, 근년의 ‘돈놀이’ ‘주식잔치’를 예측한 사람이 있었던가. 도시의 지하도들이 노숙자 무리로 들끓고 큰길을 점령한 노점상들 때문에 길 가기가 어렵던 그 때, 747 공약을 내거는 대통령 후보가 나올 줄 꿈이나 꿀 수 있었던가. 지금 한번 차분히 되돌아 볼 일이다.
일제강점 35년, 6·25전란, IMF 위기도 이겨냈는데
6·25 전화(戰禍)에 비하면 IMF 시대는 고통이라 말할 자격도 없다. 1·4후퇴 때 다섯살 났던 나는 허벅지까지 눈이 쌓인 태백준령을 넘어 피란을 갔다. 짐을 이고 진 어른들에게 손이 없어서, 그 높은 고개들을 걸어서 넘어갔다. 눈이 너무 깊어 걸을 수 없는 곳에서만 이불 짐 위에 잠시 올라타는 ‘행운’을 누렸다.
피란에서 돌아와 학교에 들어가서는 천막교실에서 공부했다. 학교 건물이 불타 없어져버렸던 것이다. 춥고 어두운 천막교실 신세를 면한 것이 3학년 때였다. 기다리고 기다려 옮겨간 새 교실은, 몇해 뒤 사라호 태풍 때 찌그러져버린 판잣집이었다. 그런 고생은 그 시대를 산 사람 모두가 겪은 ‘국민재앙’이었다.
적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은 영남지방 일부를 제외하고는, 온전히 서 있는 건물이 없었던 그 참담한 폐허를 딛고 일어선 힘이 과연 무엇이었던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싶다.
전쟁으로 인하여 죽거나 다친 사람, 또는 이산가족 없는 집이 없었다 할 정도의 인명피해까지 입고도, 우리는 기를 쓰고 살아남았다. 피란지 산비탈에 천막을 치고 전시 연합학교들이 문을 열었다. 가르치고 배우기를 그칠 수는 없었다.
우리 민족의 환난(患難)이 어찌 6·25 전란뿐이겠는가. 역사를 멀리 거슬러올라갈 것도 없다. 세계열강의 식민지 쟁탈경쟁의 시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세월이 35년이었다. 그 오랜 압제의 세월에도 우리는 배달민족의 영혼을 더럽히지 않았다.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같은 국난도 우리는 그렇게 이겨냈다.
중국이라는 초강대국과 국경을 맞대고 살면서 독자문화를 오롯이 지켜낸 민족이 몇이나 되는지를 따져보면, 우리 민족의 저력에 자부심을 가질 것이다. 중국 땅에 존재하는 55개 소수민족은 모두 자기네 나라를 가졌던 사람들 집단이다. 그 가운데 아직도 자기 말과 문화와 국체를 가진 민족은 한민족과 몽골족뿐이다. 나머지 53개 민족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힘에 녹아들어 민족의 혼과 정체를 잃었다.
중국 괴력에 휩쓸리지 않고 문화·문자·국체 보존
광활한 아시아 대륙 동쪽 해안에 토끼꼬리처럼 붙은 작은 반도 민족이, 중국의 괴력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고 문화와 문자와 국체를 누천년 보존해온 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그것은 ‘DNA’라는 말로 밖에는 설명될 수 없다. 그런 생리를 우리는 가졌다. 지혜와 끈기와 투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걸어온 역정을 되돌아보면, 지금 우리 앞에 닥쳐온 역경은 잠시 스쳐가는 보릿고개 정도라 말하고 싶다. 해마다 돌아오는 보릿고개와 한발과 태풍을 견뎌낸 우리의 생리에는 한두 끼니 결식에 지나지 않는 고통이리라.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럴 때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가면서, 약이 된다는 ‘치료금식’으로 치부하고 이겨내자.
교수신문이 새해 희망의 말로 뽑은 사자성어가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 한다. 꽉 막힌 정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아무나 한데 어울려서는 안되지만, 우선은 사이좋게 지내는 일이 이 난관을 돌파하는 지혜가 아닐까 한다.
문창재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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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만 뜨면 들리는 소리가 ‘어렵다’ ‘죽겠다’는 말들이다. 송년회 때마다 들어온 그 말의 편린이 귀에 못박혔는데, 새해 덕담 끝에도 빠지지 않아 이명처럼 귓전에 붙어버렸다. 신문이며 잡지며 TV같은 매스 미디어들이 쏟아내는 보도가 ‘불황’ ‘불경기’에서 ‘준공황’이라는 표현으로 에스컬레이트 되었다. 잘 나가는 기업들도 몸을 움츠려 새해 아침 몰아친 한파보다 더한 맹추위 같다.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말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큰 고난을 여러 차례 이겨낸 경험과 지혜가 있다. 가까이는 바로 11년 전 우리 경제가 국제 통화기금(IMF)의 구제 금융에 의지했던 국가부도의 위기를 몇해만에 거뜬히 극복한 경험이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우리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던 엄동의 해에, 근년의 ‘돈놀이’ ‘주식잔치’를 예측한 사람이 있었던가. 도시의 지하도들이 노숙자 무리로 들끓고 큰길을 점령한 노점상들 때문에 길 가기가 어렵던 그 때, 747 공약을 내거는 대통령 후보가 나올 줄 꿈이나 꿀 수 있었던가. 지금 한번 차분히 되돌아 볼 일이다.
일제강점 35년, 6·25전란, IMF 위기도 이겨냈는데
6·25 전화(戰禍)에 비하면 IMF 시대는 고통이라 말할 자격도 없다. 1·4후퇴 때 다섯살 났던 나는 허벅지까지 눈이 쌓인 태백준령을 넘어 피란을 갔다. 짐을 이고 진 어른들에게 손이 없어서, 그 높은 고개들을 걸어서 넘어갔다. 눈이 너무 깊어 걸을 수 없는 곳에서만 이불 짐 위에 잠시 올라타는 ‘행운’을 누렸다.
피란에서 돌아와 학교에 들어가서는 천막교실에서 공부했다. 학교 건물이 불타 없어져버렸던 것이다. 춥고 어두운 천막교실 신세를 면한 것이 3학년 때였다. 기다리고 기다려 옮겨간 새 교실은, 몇해 뒤 사라호 태풍 때 찌그러져버린 판잣집이었다. 그런 고생은 그 시대를 산 사람 모두가 겪은 ‘국민재앙’이었다.
적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은 영남지방 일부를 제외하고는, 온전히 서 있는 건물이 없었던 그 참담한 폐허를 딛고 일어선 힘이 과연 무엇이었던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싶다.
전쟁으로 인하여 죽거나 다친 사람, 또는 이산가족 없는 집이 없었다 할 정도의 인명피해까지 입고도, 우리는 기를 쓰고 살아남았다. 피란지 산비탈에 천막을 치고 전시 연합학교들이 문을 열었다. 가르치고 배우기를 그칠 수는 없었다.
우리 민족의 환난(患難)이 어찌 6·25 전란뿐이겠는가. 역사를 멀리 거슬러올라갈 것도 없다. 세계열강의 식민지 쟁탈경쟁의 시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긴 세월이 35년이었다. 그 오랜 압제의 세월에도 우리는 배달민족의 영혼을 더럽히지 않았다.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같은 국난도 우리는 그렇게 이겨냈다.
중국이라는 초강대국과 국경을 맞대고 살면서 독자문화를 오롯이 지켜낸 민족이 몇이나 되는지를 따져보면, 우리 민족의 저력에 자부심을 가질 것이다. 중국 땅에 존재하는 55개 소수민족은 모두 자기네 나라를 가졌던 사람들 집단이다. 그 가운데 아직도 자기 말과 문화와 국체를 가진 민족은 한민족과 몽골족뿐이다. 나머지 53개 민족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힘에 녹아들어 민족의 혼과 정체를 잃었다.
중국 괴력에 휩쓸리지 않고 문화·문자·국체 보존
광활한 아시아 대륙 동쪽 해안에 토끼꼬리처럼 붙은 작은 반도 민족이, 중국의 괴력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고 문화와 문자와 국체를 누천년 보존해온 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그것은 ‘DNA’라는 말로 밖에는 설명될 수 없다. 그런 생리를 우리는 가졌다. 지혜와 끈기와 투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걸어온 역정을 되돌아보면, 지금 우리 앞에 닥쳐온 역경은 잠시 스쳐가는 보릿고개 정도라 말하고 싶다. 해마다 돌아오는 보릿고개와 한발과 태풍을 견뎌낸 우리의 생리에는 한두 끼니 결식에 지나지 않는 고통이리라.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럴 때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가면서, 약이 된다는 ‘치료금식’으로 치부하고 이겨내자.
교수신문이 새해 희망의 말로 뽑은 사자성어가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 한다. 꽉 막힌 정치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아무나 한데 어울려서는 안되지만, 우선은 사이좋게 지내는 일이 이 난관을 돌파하는 지혜가 아닐까 한다.
문창재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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