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잃어버린 것을 다시 담는다

지역내일 2009-01-16 (수정 2009-01-16 오전 9:18:15)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정착민에서 유목민으로 돌아온 김영하


우리는 떠날 때 무엇을 준비하는가. 떠남을 준비하는 기간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나.
가벼워지기 위해, ‘나’를 만나기 위해, 유목민의 생활을 선택한 젊은 글꾼 김영하. 그가 정착민의 생활을 버리고 캐나다로 가기 전 두 달을 머문 시칠리아에서 보낸 그림과 편지가 책 한 권에 담겼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로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화려하게 등단한 김영하 작가는 항상 문학계의 중심에 서있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눈 앞의 모두를 만족시켜야 하는 인물’로 바뀌었다. 때문에 몇 가지 역할을 해내느라 바빴고, 지켜야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하나씩 내려놓았다. 학교에는 사직서를 내고,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일도 그만뒀다.
1년동안 머물 예정으로 캐나다행을 택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출국 전 두 달을 보낼 곳으로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을 주목했다. 2007년 12월 모 방송국 PD와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인연을 맺은 곳이다.
시칠리아는 작가 김영하에게 많은 것을 선물해 준 곳이다. 그 곳에서 그는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는 산문을 구상했다.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산문은 여행이 주된 소재다.
이탈리아에서 첫 날. 기차를 탄 작가는 기차가 그대로 배 위에 오르는 장면을 보며 구약에 나오는 요나의 일화를 떠올린다.
작가는 아드리아 해에 접한 항구 도시 바리에서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다. 밤이 깊어 커다란 배가 떠날 준비를 마치자 승객들은 짐을 챙겨 보세 구역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보세구역 입구의 전광판에는 영어로 ‘Memory Lost’라는 문구가 거듭해 점멸하고 있다. 누군가 이탈리아어를 영어로 그대로 직역한 모양이다. ‘유실물에 주의하세요’나 ‘잃어버린 물건이 없나 잘 기억해보세요’ 쯤 되는 경고를 하려는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라틴어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와 같은 구조를 가진 문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번역이 잘못되면서 그 안내문은 돌연 시적인 뉘앙스를 풍기게 됐다. 영어로는 ‘기억 상실’ 혹은 ‘잃어버린 기억’ 정도로 읽힐 그 문장이 작가에게 이렇게 다가왔다.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작가는 시칠리아 여행에서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 여행에서 그 어떤 것도 흘리거나 도둑맞지 않았다. 있을 것들은 모두 있었다. 오히려 그가 잃어버린 것들은 모두 서울에 있었다.
그는 전광판을 보며 지난 세월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했다. 삶과 정명으로 맞서는 야성을 잊었고, 어떤 인간이었는지 즉각적으로 감지하는 감각도 잃었다. 자신과 세계에 집중하는 법도 망각했다.
Memory Lost.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는 동안 페리는 이탈리아를 떠나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로 움직였다. 마르코 폴로는 두브로브니크에서 멀지 않은 코르촐라 섬에서 태어났다. 그 사람이야말로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전혀 상관하지 않는 종류의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는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하는 대신 자기가 보고 들은 진기한 것들을 적어 남겼다. 그와 달리 어쩔 수 없는 먹물에 책상물림인 작가는 ‘보고 들은 진기한 것들’에 더해 작가 스스로가 ‘잃어버린 것들’을 보태 적었다.
그리고 또 한 권의 책을 세상에 흘려보냈다. 바로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이다.
그는 한 사람의 시칠리아 주민이 되어 유유자적 공간을 누비며 시칠리아의 일상에 깊숙이 침투한다. 이 이국적인 외모의 ‘주민’은 시칠리아의 문화와 유적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대신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향한다.
여행기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 책 속의 글들은 지금까지 그 어디에서도 보여준 적이 없는 인간 김영하의 진솔한 면이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
김성배 기자 sb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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