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피맛골 유감(박상주 2009.01.16)

지역내일 2009-01-16
피맛골 유감
박상주 (칼럼니스트·참미디어연구소장)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뒤편에 이따금씩 들르던 음식점이 있었다. 생태 탕으로 소문난 집이었다. 며칠 전 지인들과 함께 그 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약속 장소에 나갔다가 한 동안 망연자실 거리에 서 있었다. 소문난 맛집들이 즐비하던 그 일대의 건물들이 모두 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량한 콘크리트 잔해 더미들만이 을씨년스런 모습으로 쌓여 있었다.
애지중지하던 물건을 빼앗긴 것 같은 상실감이 가슴 가득 밀려들었다. 오랜 세월 드나들던 피맛골의 정든 음식점들이 재개발 바람에 밀려나고 있었다. 열차집과 경원집, 장원집, 서린낙지 등 아직까지 영업을 하고 있는 집들도 코앞에 철거 날짜를 받아 놓고 있었다. 피맛골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자 석쇠 위에 생선을 굽는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파전을 부치느라 기름 냄새를 풀풀 풍기는 집도 있다. 얼마 후면 영영 사라질 정겨운 풍경 이었다.
600년 역사를 지닌 피맛골이 재개발 바람에 밀려 퇴출되고 있다. 피맛골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타고 가던 가마를 피하기 위해 생겨났다는 골목이다. 빈대떡과 막걸리, 생선구이, 낙지, 족발 등 서민들이 즐겨 찾는 메뉴들을 내놓는 유서 깊은 맛집들이 영영 역사의 뒤안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서울의 진미(珍味)와 역사의 손때를 고스란히 간직한 피맛골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불도저에 부서진 맛과 멋
한때는 내놓으라 하는 시인, 묵객, 언론인들이 어울려 밤새 술판을 벌이던 곳이었다. 때론 시낭송회와 출판기념회가 열리던 문화공간이기도 했던 곳이었다.
도시에도 ‘맛’이 있다. 그 도시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랜 세월 묵히면서 만들어내는 독특한 맛이다. ‘카페 레 뒤 마고’와 ‘카페 드 플로르’ 등 유서 깊은 카페들이 몰려 있는 파리의 생제르맹, 헌책방들이 늘어선 런던의 차링 크로스, 수많은 카페와 식당, 클럽, 바, 기념품 가게들이 들어찬 뉴욕 맨해튼의 워싱턴 스퀘어 파크 등은 세월의 흔적을 담뿍 안은 채 그 도시만의 고유한 맛을 발하고 있는 곳들이다.
선진국 사람들은 숱한 역사적 사연들을 간직한 유서 깊은 골목들을 보물단지처럼 애지중지 가꾼다. 거기서 오래된 장맛처럼 진득한 도시의 맛이 우러나온다. 어떤 곳은 너저분하고 소란스럽기도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 그 도시만의 맛이 우러나온다.
종로 일대가 재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벌써 오래 전 일이다. 무교동 낙지 골목, 청진동 해장국 골목에 이어 이번엔 피맛골이 그 대상이다. 이미 재개발 공사를 끝낸 청진동 해장국 골목은 어떻게 변모했을까.
청진동은 한때 30여개소의 해장국집들이 몰린 장안의 명소 중 하나였다. 새벽녘엔 밤새도록 술을 마신 장안의 주당들이 몰려들어 뜨끈한 해장국으로 쓰린 속을 달래던 곳이었고, 야근을 마친 인근 신문사의 기자들이 갓 인쇄된 싱싱한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들어와서는 소주잔을 기울이던 곳이었다. 오후엔 북한산 등반을 마친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막걸리 뒤풀이를 벌이는 장소이기도 했다.
청진동 해장국 집들이 몰려 있던 자리엔 국적불명의 이름을 한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섰다. 하늘을 찌를 듯 위풍당당한 현대식 빌딩이다. 오랜 세월 서울시민들의 사랑을 받던 청진옥 등 인근 음식점 중 일부가 그 건물에 입주했다.

우리 모습 간직한 뒷골목 소중
그러나 예전 청진동의 낭만과 정취는 찾아보기 어렵다. 재개발 불도저들이 청진동의 오랜 음식점들을 밀어버릴 때, 묵힌 장맛처럼 달게 익었던 청진동의 맛과 멋도 함께 부서져 나갔을 터이다.
재개발이 필요하다면 그 공간이 지녔던 문화와 추억, 정취 등을 보전하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한다. 그러나 서울 구석구석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작금의 재개발은 콘크리트 건물의 상품성과 효율성만을 내세운 천박으로 범벅이 되고 있다. 성급한 재개발은 문화와 전통에 대한 폭력이 될 수 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고, 초밥을 먹기 위해 서울에 오는 건 아니다. 촌스럽고 누추하더라도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을 간직한 뒷골목은 그 자체가 소중한 문화자산이요 관광자원이다. 서울의 정든 공간들이 마구잡이 재개발로 쓸려나가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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