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역사도 유기체의 삶과 유사하다. 마을이 개척되고 성하다가 쇠퇴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 기록으로 남기지 않으면 잊혀져 버릴 마을들이 있다. 우리 구미에는 공단 조성으로 이미 많은 마을들이 사라졌다. 최근에는 택지개발, 4공단 조성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고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오늘 찾아보는 마을은 금오산 정상아래 내성(內城) 안에 자리 잡았던 성안 마을이다. 적게 잡아도 수 백년 동안 사람들이 살던 성안마을이 사라진 것은 70년대이다. 당시 내무부는 화전민정리사업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전국의 수많은 산골과 섬에서 독가촌들이 철거되었다. 해발 약 800m, 산 속의 분지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마을이 사라졌다.
조선시대인 1789년의 기록에 금오산의 원호(元戶)가 180호이고 451명이 살았다고 하였다.
1832년에 나온 〈청구도〉에는 내성안 마을에 40호가 거주한다고 하였다. 70년대까지 마을에 살았던 분들은 지금의 내성 분지만을 성안이라 하지 않고 외성 안은 모두 성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광복을 전후해서는 10여 호가 살았고 전쟁기간을 거치면서 주둔한 미 공군 통신대와 국군의 주둔은 다시 한번 이 성안마을에 활기를 가져왔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이 통신대와 관련된 일을 하던 임시고용인들이거나 출퇴근자였고 군대가 철수하면서 함께 산을 내려갔다.
● 성안의 감자술
성안마을의 사람들은 농사를 지었다. 벼농사도 시도 해보았지만 기후가 맞지 않았다. 오직 밭농사에만 의존하였다.
오늘날 고랭지 채소에 해당하는 성안 배추는 일품이었다고 한다. 밭작물의 소출을 지게에 지고 내려와 쌀과 바꾸어 먹기도 하였다. 약초를 캐서는 약목, 대구 등지로 내다 팔기도 하였다.
부족한 쌀을 대신하여 감자를 함께 넣어서 막걸리를 빚었다. 이것이 성안 감자술이다. 강원도 평창 등지의 감자술과는 좀 달랐던 것 같다. 성안 감자술을 맛본 이들은 그 풍미를 매우 칭찬하는 경향인데, 해발 800m에서 먹는 술이 맛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그 추억을 못 잊어하여 한번은 무형문화재로 지정신청을 하기도 하였다.
● 외로운 중수송공비(重修頌功碑)
지금 성안에는 ‘금오산성중수송공비’만이 성안 분지를 지키고 있다. 대원군의 섭정 때에 세운 이 비문의 내용에는 누각만 해도 100여 칸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그 많던 건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이전부터 금오산의 정상부와 내성 분지에는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진남사란 절을 비롯하여, 군량미와 군기를 보관한 창고, 성문루, 장대 등 마을 외에도 군사시설과 사찰 시설들이 있었다. 채 100년이 못된 세월에 쓰러지고 뜯겨 나가고 그 유지만 겨우 흔적을 남기고 있다.
● 소가 오르내리는 길
마을 사람들이 장을 보거나 산 아래와 연결되는 길은 지금과 같이 남통동으로 통하는 길과 지경리(김천 남면)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경작을 위해 이용되는 소는 이 가파른 두 길로는 다니지 못한다.
금오산 서쪽 자락에는 수점마을이 있다. 수점의 남쪽에는 그 유명한 갈항사지가 있는 갈항마을이 있다.
그 중간에 우장마을이 있다. 금오산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우장을 ‘쇠바탱이’라고 불렀다. 이 쇠바탱이에서 금오산을 오르는 길은 비교적 완만하다. 소가 걸어서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밭을 갈기 위해 빌린 소를 끌고 성안마을로 들어 왔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길로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금오산성 수축과 위한 군수물자를 날랐을 것이다. 전시에 병참기지였던 금오산성에는 인근 군현에서 많은 군수물자를 비축해 두었다. 조선시대에 그린 지도에서도 금오산성 내에 숱한 창고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쇠바탱이-성안마을은 수송의 주요 루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라 상상한다. TV 드라마 ‘여로’가 유행하던 시절, 부상마을(김천 남면)과 그 인근 주민들이 금오산 정상에 있는 통신대에 TV를 보기 위해 드나들었던 길도 이 길이라고 한다.
오늘 찾아보는 마을은 금오산 정상아래 내성(內城) 안에 자리 잡았던 성안 마을이다. 적게 잡아도 수 백년 동안 사람들이 살던 성안마을이 사라진 것은 70년대이다. 당시 내무부는 화전민정리사업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전국의 수많은 산골과 섬에서 독가촌들이 철거되었다. 해발 약 800m, 산 속의 분지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마을이 사라졌다.
조선시대인 1789년의 기록에 금오산의 원호(元戶)가 180호이고 451명이 살았다고 하였다.
1832년에 나온 〈청구도〉에는 내성안 마을에 40호가 거주한다고 하였다. 70년대까지 마을에 살았던 분들은 지금의 내성 분지만을 성안이라 하지 않고 외성 안은 모두 성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광복을 전후해서는 10여 호가 살았고 전쟁기간을 거치면서 주둔한 미 공군 통신대와 국군의 주둔은 다시 한번 이 성안마을에 활기를 가져왔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이 통신대와 관련된 일을 하던 임시고용인들이거나 출퇴근자였고 군대가 철수하면서 함께 산을 내려갔다.
● 성안의 감자술
성안마을의 사람들은 농사를 지었다. 벼농사도 시도 해보았지만 기후가 맞지 않았다. 오직 밭농사에만 의존하였다.
오늘날 고랭지 채소에 해당하는 성안 배추는 일품이었다고 한다. 밭작물의 소출을 지게에 지고 내려와 쌀과 바꾸어 먹기도 하였다. 약초를 캐서는 약목, 대구 등지로 내다 팔기도 하였다.
부족한 쌀을 대신하여 감자를 함께 넣어서 막걸리를 빚었다. 이것이 성안 감자술이다. 강원도 평창 등지의 감자술과는 좀 달랐던 것 같다. 성안 감자술을 맛본 이들은 그 풍미를 매우 칭찬하는 경향인데, 해발 800m에서 먹는 술이 맛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그 추억을 못 잊어하여 한번은 무형문화재로 지정신청을 하기도 하였다.
● 외로운 중수송공비(重修頌功碑)
지금 성안에는 ‘금오산성중수송공비’만이 성안 분지를 지키고 있다. 대원군의 섭정 때에 세운 이 비문의 내용에는 누각만 해도 100여 칸을 중수하였다고 한다. 그 많던 건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이전부터 금오산의 정상부와 내성 분지에는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진남사란 절을 비롯하여, 군량미와 군기를 보관한 창고, 성문루, 장대 등 마을 외에도 군사시설과 사찰 시설들이 있었다. 채 100년이 못된 세월에 쓰러지고 뜯겨 나가고 그 유지만 겨우 흔적을 남기고 있다.
● 소가 오르내리는 길
마을 사람들이 장을 보거나 산 아래와 연결되는 길은 지금과 같이 남통동으로 통하는 길과 지경리(김천 남면)로 통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경작을 위해 이용되는 소는 이 가파른 두 길로는 다니지 못한다.
금오산 서쪽 자락에는 수점마을이 있다. 수점의 남쪽에는 그 유명한 갈항사지가 있는 갈항마을이 있다.
그 중간에 우장마을이 있다. 금오산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우장을 ‘쇠바탱이’라고 불렀다. 이 쇠바탱이에서 금오산을 오르는 길은 비교적 완만하다. 소가 걸어서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밭을 갈기 위해 빌린 소를 끌고 성안마을로 들어 왔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길로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금오산성 수축과 위한 군수물자를 날랐을 것이다. 전시에 병참기지였던 금오산성에는 인근 군현에서 많은 군수물자를 비축해 두었다. 조선시대에 그린 지도에서도 금오산성 내에 숱한 창고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쇠바탱이-성안마을은 수송의 주요 루트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라 상상한다. TV 드라마 ‘여로’가 유행하던 시절, 부상마을(김천 남면)과 그 인근 주민들이 금오산 정상에 있는 통신대에 TV를 보기 위해 드나들었던 길도 이 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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