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신문은 연중기획 ‘사람이 희망이다’를 연재하며 ‘사람’에게 희망을 찾으려 합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돌파구를 찾으려 노력하는 우리 이웃과 동료를 만나 그들이 일구어가는 희망을 함께 나누려 합니다. 지면 만들기에 독자 여러분도 동참하실 수 있습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 희망을 가꾸는 이웃과 동료를 소개해주세요.(문의:내일신문 자치행정팀 02-2287-2266)
비브리오 패혈증 연구 한우물 팠다
불모지 전남 화순에 백신산업 유치
“개인의 연구 성과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결코 자신의 성취욕이나 출세를 위한 발판으로 삼지 마십시오.”
이준행(49) 전남대 의대 교수가 실험실 후배나 제자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얘기다. 그는 이 같은 삶의 원칙을 고수하며 지난 20여년간 비브리오 패혈증 연구에 매달렸고, 연구 성과를 사회에 환원했다. 이런 활동 덕분에 지난 2007년 국가균형발전위원회의 지역혁신리더로 선정되는 영광도 안았다.
비브리오 패혈증 연구에 매달린 20여년
혈기 왕성하던 스물한 살 때 광주항쟁을 직접 체험한 그는 ‘잘나가는 의사’를 포기하고 사회에 기여할 방법을 찾다가 기초의학인 면역학을 선택했다. 몇 년 뒤인 1984년, 인생의 전기가 될 만한 사건이 터졌다. 당시 괴저병으로 불렸던 비브리오 패혈증 파동이 일어난 것이다. 어패류를 익히지 않고 먹은 전남 해안가 주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이 병에 걸렸고, 감염자 대다수가 사망했다. 어민은 어민대로, 횟집 주인은 주인대로 죽겠다고 아우성쳤다.
이 때 지도교수였던 정선식 교수가 ‘비브리오 패혈증 연구’라는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그는 망설였다.
“순간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했죠. 연구를 하다 자칫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렵기도 했지만 곧 응급실에서 사경을 헤매는 환자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결국 정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처음엔 몇년만 버티면 후배들이 들어오고, 다시 면역학을 공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막상 연구를 시작하자 모든 게 막막했다. 비브리오 패혈증 파동이 수그러들면서 사람들의 관심도 멀어졌다. 연구비 지원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같이 연구할 사람이 없어 약대 대학원에 다니던 여동생을 데려오기도 했다.
어쩌다 비브리오 패혈증 환자가 들어오면 직접 시료를 채취했다. 피펫(액체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유리 기구)이 부러져 볼펜대에 연결해 사용하고, 자동피펫이 없어 위험을 무릅쓰고 입으로 균을 직접 빨기도 했다. 시약과 실험기구를 사느라 외상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시약상에게 ‘투자 한다고 생각하고 도와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주변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뭐하려고 고생을 사서 하냐’는 핀잔도 뒤따랐다.
그렇다고 한번 시작한 일을 중단할 수도 없었다. 무조건 앞만 보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연구 성과가 차츰 빛을 보기 시작했다. 1990년 초반 에틸렌디아민 사초산(EDTA)이라는 화학물질로 어패류를 씻으면 균이 완전히 죽는 것도 발견했다. 1996년 비브리오 패혈증을 진단하는 중합효소 연쇄반응(PCR)을 개발했다. 지난 2001년 비브리오 패혈증 균이 사람을 죽이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새 독소도 밝혀냈다.
이 교수 연구팀은 이런 성과를 인정받아 지난 2001년 최고 실험실을 지정하는 ‘국가지정연구실’로 선정됐다. 그 뿐인가. 2004년에는 비브리오균 유전체를 완전 해독해 미국국립생물정부센터에 등재하는 영광까지 안았다. 연구가 빛을 발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러브콜’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실험실만 고집했다.
냉담한 기업반응 넘어 백신공장 유치
국가지정연구실로 선정되면서 연구비 걱정에선 해방됐다. 그러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항상 국민세금으로 연구한다는 강박관념에 짓눌렸다.
그러던 차에 지역의 비전을 고민하는 ‘광주전남혁신연구회(혁신연구회)’에서 일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실험실 일로 몸은 고단했지만 순순히 응했다. 이 때문에 생각하지 못했던 ‘지역혁신과 클러스터’를 공부했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의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이 때 그의 눈을 사로잡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전남 화순에 인플루엔자 백신생산기반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 사업은 당시 6개 회사가 참여했지만 의견 차이로 표류하고 있었다. 탄광촌인 화순에 ‘무슨 백신생산이냐’는 회의론까지 확산됐다. 위기를 돌파할 ‘히든카드’가 절실했다.
그와 혁신연구회 회원들은 과기부에서 추진하는 연구개발(R&D) 클러스터 구축사업에 뛰어들기로 했다. 목표가 생기자 행동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우선 전남대 의과대학 연구 인력을 중심으로 ‘임상백신 연구개발사업단(사업단)’을 만들었다. 다음은 돈이 문제였다. 전남도에 1억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안 될 일에 매달리지 말고 그만 두는 게 어떠냐’는 답변이 되돌아왔다. 사업단은 이런 난관을 뚫고 1차 평가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 이후 회의적이던 전남도 분위기도 달라졌다. 화순이 지역구인 최인기 국회의원(민주당)도 과기부 현지실사 때 참여해 ‘입지 조건’을 설명했다. 지역 국회의원까지 나서자 심사위원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마침내 지난 2004년 R&D클러스터 사업에 선정됐다.
이제 백신공장만 유치하면 백신산업의 윤곽이 어느 정도 잡히게 됐다.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의욕이 넘쳐났다. 이 교수는 기업 유치를 위해 녹십자 등 기업체를 노크했다.
예상대로 기업의 반응은 냉담했다. 설상가상 경기도가 기업 유치에 나섰다. 생산기반이 전남보다 훨씬 좋은 경기도가 나서면서 결과는 예측하기 힘들게 됐다. 믿는 건 ‘열정과 발품’밖에 없었다. 다행히 전남대에서 기업이 원하면 연구팀을 만들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자 기업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외국기업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2005년 7월 마침내 화순이 백신산업 최종 입지로 선정됐다. 녹십자는 화순 인플루엔자 백신생산 공장에 2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당시 외국에서 이 소식을 접한 이 교수는 “국가지정연구실로 선정됐던 때보다 더 큰 감동이 가슴에서 용솟음쳤다”고 말했다. 녹십자는 올해부터 백신을 실험 생산할 예정이다. 이로 인해 화순군은 연간 1500억원에 이르는 경제적 파급효과와 3000개 이상의 일자리를 기대하고 있다.
백신클러스터 만들어야
하지만 이 교수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며 “더 많은 기업을 유치해 명실상부한 백신클러스터를 만들기 위해 ‘민·관·학’이 다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이 교수가 실험실로 돌아간 사이 많은 게 바뀌었다. 우선 전남도 등 주력부대가 현실에 안주했다. ‘이 정도 했으면 다 된 것 아니냐’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외국 백신에 의존하고 있는 국내 제약회사의 관행이 더 큰 문제다. 그는 “기껏 백신을 개발하면 뭐 합니까. 임상실험을 해야 하는데도 국내 제약회사들이 손해가 두려워 선뜻 나서지 않아요.”
그는 다시 신발 끈을 동여맬 생각이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난을 이겨온 이 교수. 그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할지 기대된다.
화순 방국진 기자 kjb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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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브리오 패혈증 연구 한우물 팠다
불모지 전남 화순에 백신산업 유치
“개인의 연구 성과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돌려줘야 합니다. 결코 자신의 성취욕이나 출세를 위한 발판으로 삼지 마십시오.”
이준행(49) 전남대 의대 교수가 실험실 후배나 제자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얘기다. 그는 이 같은 삶의 원칙을 고수하며 지난 20여년간 비브리오 패혈증 연구에 매달렸고, 연구 성과를 사회에 환원했다. 이런 활동 덕분에 지난 2007년 국가균형발전위원회의 지역혁신리더로 선정되는 영광도 안았다.
비브리오 패혈증 연구에 매달린 20여년
혈기 왕성하던 스물한 살 때 광주항쟁을 직접 체험한 그는 ‘잘나가는 의사’를 포기하고 사회에 기여할 방법을 찾다가 기초의학인 면역학을 선택했다. 몇 년 뒤인 1984년, 인생의 전기가 될 만한 사건이 터졌다. 당시 괴저병으로 불렸던 비브리오 패혈증 파동이 일어난 것이다. 어패류를 익히지 않고 먹은 전남 해안가 주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이 병에 걸렸고, 감염자 대다수가 사망했다. 어민은 어민대로, 횟집 주인은 주인대로 죽겠다고 아우성쳤다.
이 때 지도교수였던 정선식 교수가 ‘비브리오 패혈증 연구’라는 뜻밖의 제안을 해왔다. 그는 망설였다.
“순간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했죠. 연구를 하다 자칫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렵기도 했지만 곧 응급실에서 사경을 헤매는 환자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결국 정 교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처음엔 몇년만 버티면 후배들이 들어오고, 다시 면역학을 공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막상 연구를 시작하자 모든 게 막막했다. 비브리오 패혈증 파동이 수그러들면서 사람들의 관심도 멀어졌다. 연구비 지원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같이 연구할 사람이 없어 약대 대학원에 다니던 여동생을 데려오기도 했다.
어쩌다 비브리오 패혈증 환자가 들어오면 직접 시료를 채취했다. 피펫(액체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유리 기구)이 부러져 볼펜대에 연결해 사용하고, 자동피펫이 없어 위험을 무릅쓰고 입으로 균을 직접 빨기도 했다. 시약과 실험기구를 사느라 외상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시약상에게 ‘투자 한다고 생각하고 도와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주변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뭐하려고 고생을 사서 하냐’는 핀잔도 뒤따랐다.
그렇다고 한번 시작한 일을 중단할 수도 없었다. 무조건 앞만 보고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연구 성과가 차츰 빛을 보기 시작했다. 1990년 초반 에틸렌디아민 사초산(EDTA)이라는 화학물질로 어패류를 씻으면 균이 완전히 죽는 것도 발견했다. 1996년 비브리오 패혈증을 진단하는 중합효소 연쇄반응(PCR)을 개발했다. 지난 2001년 비브리오 패혈증 균이 사람을 죽이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새 독소도 밝혀냈다.
이 교수 연구팀은 이런 성과를 인정받아 지난 2001년 최고 실험실을 지정하는 ‘국가지정연구실’로 선정됐다. 그 뿐인가. 2004년에는 비브리오균 유전체를 완전 해독해 미국국립생물정부센터에 등재하는 영광까지 안았다. 연구가 빛을 발하면서 여기저기에서 ‘러브콜’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실험실만 고집했다.
냉담한 기업반응 넘어 백신공장 유치
국가지정연구실로 선정되면서 연구비 걱정에선 해방됐다. 그러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항상 국민세금으로 연구한다는 강박관념에 짓눌렸다.
그러던 차에 지역의 비전을 고민하는 ‘광주전남혁신연구회(혁신연구회)’에서 일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실험실 일로 몸은 고단했지만 순순히 응했다. 이 때문에 생각하지 못했던 ‘지역혁신과 클러스터’를 공부했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의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이 때 그의 눈을 사로잡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전남 화순에 인플루엔자 백신생산기반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 사업은 당시 6개 회사가 참여했지만 의견 차이로 표류하고 있었다. 탄광촌인 화순에 ‘무슨 백신생산이냐’는 회의론까지 확산됐다. 위기를 돌파할 ‘히든카드’가 절실했다.
그와 혁신연구회 회원들은 과기부에서 추진하는 연구개발(R&D) 클러스터 구축사업에 뛰어들기로 했다. 목표가 생기자 행동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우선 전남대 의과대학 연구 인력을 중심으로 ‘임상백신 연구개발사업단(사업단)’을 만들었다. 다음은 돈이 문제였다. 전남도에 1억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안 될 일에 매달리지 말고 그만 두는 게 어떠냐’는 답변이 되돌아왔다. 사업단은 이런 난관을 뚫고 1차 평가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 이후 회의적이던 전남도 분위기도 달라졌다. 화순이 지역구인 최인기 국회의원(민주당)도 과기부 현지실사 때 참여해 ‘입지 조건’을 설명했다. 지역 국회의원까지 나서자 심사위원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마침내 지난 2004년 R&D클러스터 사업에 선정됐다.
이제 백신공장만 유치하면 백신산업의 윤곽이 어느 정도 잡히게 됐다.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의욕이 넘쳐났다. 이 교수는 기업 유치를 위해 녹십자 등 기업체를 노크했다.
예상대로 기업의 반응은 냉담했다. 설상가상 경기도가 기업 유치에 나섰다. 생산기반이 전남보다 훨씬 좋은 경기도가 나서면서 결과는 예측하기 힘들게 됐다. 믿는 건 ‘열정과 발품’밖에 없었다. 다행히 전남대에서 기업이 원하면 연구팀을 만들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자 기업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외국기업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2005년 7월 마침내 화순이 백신산업 최종 입지로 선정됐다. 녹십자는 화순 인플루엔자 백신생산 공장에 2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당시 외국에서 이 소식을 접한 이 교수는 “국가지정연구실로 선정됐던 때보다 더 큰 감동이 가슴에서 용솟음쳤다”고 말했다. 녹십자는 올해부터 백신을 실험 생산할 예정이다. 이로 인해 화순군은 연간 1500억원에 이르는 경제적 파급효과와 3000개 이상의 일자리를 기대하고 있다.
백신클러스터 만들어야
하지만 이 교수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며 “더 많은 기업을 유치해 명실상부한 백신클러스터를 만들기 위해 ‘민·관·학’이 다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이 교수가 실험실로 돌아간 사이 많은 게 바뀌었다. 우선 전남도 등 주력부대가 현실에 안주했다. ‘이 정도 했으면 다 된 것 아니냐’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외국 백신에 의존하고 있는 국내 제약회사의 관행이 더 큰 문제다. 그는 “기껏 백신을 개발하면 뭐 합니까. 임상실험을 해야 하는데도 국내 제약회사들이 손해가 두려워 선뜻 나서지 않아요.”
그는 다시 신발 끈을 동여맬 생각이다.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난을 이겨온 이 교수. 그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어떤 선택을 할지 기대된다.
화순 방국진 기자 kjb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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