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업의 첫 번째 민영화 성공사례로 알려진 영국 브리티시텔레콤이 7년동안 추진한 구조조정을 보면 한국통신이 배울 점이 많다.
브리티시텔레콤은 1988~1989년에 23만1982명이던 임직원을 1997~1998년 절반 규모인 11만4304명으로 줄였다. 경상비중 노무비의 비율이 구조조정 전 51%에서 구조조정후 31%로 떨어졌다.
그러나 브리티시텔레콤 노사는 고통스런 구조조정을 처리하는 방식이 한국통신과 판이했다. 1987년 현장선로 기술직의 1주일 파업, 1997년 런던 선로기술직의 1일 파업, 1999년 11월 콜센터 직원의 1일 파업 등 몇 차례 갈등이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노사협력적인 기조를 유지했다.
경영권 해당사항에서도 교섭권 인정
신뢰를 바탕으로 한 노사협력 분위기는 이 회사가 민영화되기 전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영국 정부는 공기업이 노사관계에서 모범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 덕에 노동조합은 임금과 노동조건에 관련된 사항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라면 경영권에 속한다고 할 사항들이 직제 직무 신기술 도입 등의 영역에서 발언권과 교섭권을 행사해 왔다.
경영진은 노동조합에 회사의 고위간부만이 보는 핵심정보를 제공하면서 노동조합이 구조조정과정에 일정하게 참여해 그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어떤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거나 변화를 이룰 때는 노사협의를 거쳐 노동조합의 참여 속에 일부 지역에서 시범적 사업(pilot project)을 운영했다. 시범사업 결과를 놓고 노동자들에게 불리한 측면을 어떻게 보완할 것인지에 대한 단체협약서를 체결한 뒤 전국적으로 시행에 들어갔다.
199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인력감축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 많다. 민영화 당시 브리티시텔레콤의 인력은 낡은 네트워크와 시설 및 직무통제 중심의 노동관행 때문에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과잉인력을 줄이려는 인력조정은 23만여명에서 11만여명으로 줄이는 고통스런 과정이었다. 대규모 인력감축은 거의 모든 사업분야에서 공정의 합리화와 관료적 조직구조의 수평화를 수반했다.
노동조합이 높은 조직력을 갖고 있었지만, 심각한 노사간의 갈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회사는 낡은 네트워크의 현대화와 노동절약적 기술의 도입에 따른 인력과잉 및 통신서비스 시장의 경쟁심화, 이에따른 비용절감 필요성에 관한 체계적인 정보를 노동조합에 제공했다.
노조, 감원 받아들이고 실리 택해
노동조합에서도 브리티시텔레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력과잉 문제를 해결하고 비용을 절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 대신 노동조합은 근로자들의 자유의사에 반한 정리해고가 있으면 파업을 하겠다는 배수진을 쳤다. 다만 우리나라의 명예퇴직과 같은 자발적 퇴직은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노동조합은 회사와 자발적 퇴직조건에 관한 협상을 벌여 당시 영국에서는 최고조건인 1인당 2만5000~3만5000 파운드(약 4500만~6300만원)의 일시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또 장기근속자가 정년 전에 퇴직하더라도 회사연금을 정년퇴직자와 같은 수준으로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성과를 얻어냈다.
물론 이와 같은 후한 퇴직급여는 회사가 상당한 정도로 이익을 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와 같은 인력조정으로 회사는 인건비를 절약하고 공정합리화를 통해 3~4년 만에 흑자폭을 더욱 크게 늘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인력을 감축한 결과 후유증도 있었다. 1998년부터 시작된 초고속통신망 건설 붐, 인터넷사업의 확장으로 숙련된 현장기술인력(네트워크 유지·보수)이 부족하게 되어 2000여명 이상을 새로 고용해야만 했다.
콜센터나 번호안내 분야에서 비정규직 숫자를 늘리고, 생산성 증가를 위해 업무감시를 강화하면서 현장에서 불만이 높았다. 1999년 11월에는 콜센터 노동자들이 12년만에 1일 파업을 벌여 회사측의 지나친 비용절감 방침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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