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지음/ 김형수 역음
문학동네/ 1만2000원
얼마 전 책방에 들어갔다가 시집을 한 권 샀다. 새 책인데도 어딘지 손 때 묻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독일 시인 라이너 쿤체의 ‘시’(gedichte)였다. 점심 약속을 한 친구는 이 시집을 보더니 쿤체가 누구냐고 물었다. 나도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내가 이 책을 샀던 건 뒤적거리다가 ‘시학’이라는 제목의 시가 눈에 뜨였기 때문이다. 그 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많은 대답들이 있지만/우리는 물을 줄 모른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내 안에서 수많은 지류처럼 큰물로 합수되고 있는 질문들이 떠오른다. 이 짧은 시는 이렇게 이어진다. “시는/시인의 맹인 지팡이/그걸로 시인은 사물을 짚어본다./인식하기 위하여”
어느 철학자는 시를 순간의 형이상학이라고 했다. 그는 시가 우주의 비전과 영혼의 비밀, 그리고 존재와 사물을 동시에 제공해야 한다고 보았다.
시는 이렇게 어둠 속의 지팡이인 것이다. 특히 어둠이 짙어가는 21세기의 동굴 속에서.
물질주의의 불감증 속에서 우리는 질문을 잃어버렸다. 세계는 교조와 상식의 핸드북 속에 신비를 매장했다. 인간은 근원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그 단절 속에서 세상의 사건들은 수많은 파편처럼 어리둥절한 사람들 위로 쏟아져 내린다.
하지만 조지프 캠벨의 영웅 신화들에서처럼 진리를 찾는 길은 위험으로 가득하다. 그렇더라도 성배를 찾는 기사들 같이 따로 따로 흩어져서 위험과 어둠이 가득한 숲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방황이 유일한 길이다. 괴테가 상기시키듯 인간은 추구하는 한 방황한다.
고은의 반세기 시력(詩歷)을 훑으면서 엮은이 김형수는 ‘오십 년의 사춘기’라는 제목을 걸러냈다.
이런 설명이 보인다. “...소년 상태를 그가 시정신의 본령으로 삼는 까닭은 교양이 시대를 폐쇄시키고, 이성과 학문이 자연적인 감정을 약화시킨 결과 동시대인들이 ‘비극 인식의 백치상태’에 놓이는 것을 혐오한 때문일 수 있다.”
엮은이는 “고은의 시는 표절할 수 있지만 고은의 생은 표절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잠언과 같은 다음의 작은 시 속에서 눕기를 거부했던 그의 생이 읽히는 듯싶다. “누우면 끝장이다/앓는 짐승이/필사적으로/서 있는 하루/오늘도 이 세상의 그런 하루였단다 숙아”
그의 광활한 시세계를 한 권의 시집에서 구경하겠다는 내 욕심이 미안하다. 어쨌든 지난 오십 년 동안 이 땅 위에서 벌어진, 그리고 벌어지고 있는 고통의 기록들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면 그를, 그의 시들을 외면할 수는 없다.
고은의 ‘벽시’는 오늘 읽어도 숨이 막힌다. 80년 계엄 하에서 가명으로 발표한 이 시의 마지막 몇 행만 읽어 보자. “우리가 모든 거짓과 깡패 쫓아낸 자리에/아픔의 시여 아픔으로 읽는 시여 진리의 울음이여/어떤 신놈도 어떤 우상놈도 지우지 못하는 민중의 시가 되자/시인이여 마지막 진실이여/오오 어이할 수 없이 열렬한 향기의 인내인 밤이 가면 새벽인 담벼락이여”그는 흔한 표현대로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었다.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온몸으로 가자/허공 뚫고/온몸으로 가자/가서는 돌아오지 말자/박혀서/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화살’ 일부)
이런 역사적 현장에 서는 치열함이 ‘봄비’의 축축한 생명력과 다른 건 아니라고 생각해본다. “이 밤중에 오시나부다/오시는 듯/아니 오시는 듯/오시나부다” 그는 어느 아기의 귀가 이 봄비 오시는 소리를 “들으시나부다”하고, 땅속 잠든 일개미들이 자다 깨어 “어수선하시나부다”하며 귀 기울인다. 그래도 회한은 있다. “봄비 이 밤중에 오시나부다 오로지 내 무능의 고요 죄스러워라”
어쩐지 엘리엇의 ‘황무지’ 끝 대목이 생각난다. 대지의 목마름을 축여줄 물기 품은 천둥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장면. 그 천둥의 ‘다 다 다’하고 울리는 소리가 ‘우파니샤드’의 명령이 되어 떨어지는 그 장면. “다타”(주라!), “다야드밤”(자비를 베풀라!), “담야타”(자제하라!)라는 천상의 명령이 이 땅, 이 황무지 위에 여전히 울리고 있다.
뱀 다리를 더 그리자면 그 엘리엇의 초기작 ‘프루프록의 연가’ 가운데 한 구절이 미국이 해마다 즐기는 4월 ‘시의 달’의 올해 포스터를 꾸몄다. “내가 감히/우주를 뒤흔들 수 있을까?” 습기 어린 유리창 위에 손가락으로 쓴 이 질문이 상투적인 관심 속에 마비된 미국인들 앞에 도전적으로 던져졌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시는 여전히 생명의 길을 더듬는 오르페우스의 노래, 그 투신인 것 같다.
틱낫한은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대가 시인이라면 이 종이 안에 떠다니는 구름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구름과 비, 비와 나무, 나무와 종이처럼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살을 섞고 있다면 그 합일의 노래가 시이고, 진리고, 생명이리라. 시안(詩眼)은 시인의 것만은 아니다.
고은의 ‘자작나무숲으로 가서’를 다시 한 번 읽어 본다. “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 삼거리 술집의 삶은 고기처럼 순하고 싶었다는 그의 목소리가 절절히 울린다. “사람들도 자기가 모든 낱낱 중의 하나임을 깨달을 때가 온다/나는 어린 시절에 이미 늙어버렸다 여기 와서 나는 또 태어나야 한다”
박순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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