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희망이다
김장환 명동상가번영회 명예회장
잊혀졌던 ‘명동국립극장’을 시민 품에
“자식같아요… 내 재산같아요.”
2일 오후 서울 명동예술극장. 연노랑색 일본식 건축물 안팎에는 개관을 축하하는 글귀와 개관기념공연을 알리는 광고물이 눈길을 끈다. 5일은 명동예술극장이 34년만에 다시 관객들에게 내부를 개방하는 날이다.
김장환(80) 서울 명동상가번영회 명예회장은 연노랑색 일본식 건물을 바라보며 “옛날 모습 그대로”라며 감격에 겨워했다.<사진> 그의 눈동자는 꿈꾸듯 아련해졌다. 이 극장을 지켜내기 위해 한결같이 매달려온 10여년 세월이 스쳐가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 회장은 옛 국립극장을 명동예술극장이라는 예술전용공간으로 되살린 주역이다.
‘낭만 명동’을 꿈꾸며 10여년
명동에 국립극장이 있다? ‘남산국립극장’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1975년 사기업에 매각된 옛 국립극장은 낯설기만 하다. 김장환 회장 역시 1990년대 초반에야 그 존재와 가치에 주목했다.
1982년 명동상가번영회가 출범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하면서 김 회장과 번영회에서 관심을 가졌던 게 명동상권 부활이었다. 1980년대 들어 서울 부도심권인 영동 잠실 여의도가 개발되면서 유명 양장점을 비롯한 패션산업이 강남권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던 차였다. 게다가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명동은 각종 정치집회와 시위현장으로 더 익숙한 곳이었다.
1986아시안게임과 1988올림픽을 앞두고 명동 거리단장에 나섰다. 전신주며 전선을 지중화했고 ‘명동의 날’을 지정, 명동축제로까지 키웠다. 그러나 명동으로 대표되는 ‘낭만’까지는 역부족이었다.
“단순한 상권부활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문화와 역사가 빠졌더군요.”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명동 낭만시대’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옛 국립극장이다. 이를 복원하고 명동을 문화와 패션이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발전시키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1993년 마침 서울대학교 옛 본관과 고려대학교 본관·도서관, 중앙고등학교 본관·도서관 등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됐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옛 국립극장은 제외됐다. 당장 보존건물 지정운동에 돌입했다.
그러나 건물은 어디까지나 민간기업 소유였다. 소유주인 대한종합금융이 이듬해 건물을 헐고 10층 규모 신사옥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맞대응했다. 상인들만의 힘으로는 부족하겠다 싶었다. 예술인단체 등과 연대해 서울시와 문화관광부 청와대 등에 보존 건의서를 냈다. 1995년부터는 ‘명동 옛 국립극장 되찾기 운동’으로 방향을 틀었다.
서울시에 문화재지정을 다시 건의하고 2000년부터는 명동 거리에서 1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언론에서 ‘문화재 지정’에 힘을 실어주면서 국회 청원이 만장일치로 통과됐고 2002년 예산처에서 필요한 예산 400억원 중 200억원을 배정, 우선 매매계약을 체결하도록 결정했다. 2004년 문화관광부에서 부지를 매입, 2005년 드디어 복원공사를 시작했다.
매 순간이 고비였다
“사유재산을 재건축한다는데 막는다는 게 쉬운 일이었겠어요. 매 순간이 고비였죠.”
회유도 많았다. ‘새 건물을 지어 한 층을 주겠다’는 유혹도 있었다. 장안의 4대 음식점 중 하나를 경영하던 그가 급작스레 생업을 팽개치고 밖으로 나돌자 집안에서는 당연히 반대했다. 국회의원이며 장관이며 예술인이며,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쫓아다니며 설득하는데 들어가는 시간적 경제적 부담도 컸다.
“순수하게 사재를 털었는데 행여 꼬투리를 잡힐까 싶어 상가번영회 규칙마저 바꿨어요. 부회장 전결로 재산권을 행사하게끔 한 거죠.”
금세라도 될 듯 싶었는데 물거품이 되는 순간도 여러번이었다. 그때는 딱 포기하고만 싶었다. 1998년 서울시장을 사석에서 만나 설득, 500억원 지원을 약속받았던 일도 그 중 하나다. 함께 뛰던 한 예술인이 ‘허물어져가는 옛날 극장 복구할 돈 있으면 차라리 예술인회관이나 지어달라’고 서울시에 항의해 하룻밤새 무산됐던 아픈 기억이다.
2002년 예산을 확보한 뒤에도 예기치 못한 난관을 만났다. 400억원이던 건물이 2003년 7월 재감정에서 2배가 넘는 840억원으로 나온 것이다. 확보된 예산 200억원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입찰을 관장하는 수석부장판사를 찾아가 각계의 정성이 무위로 돌아갈 처지를 설명하고 현장입찰을 요청했다. 유찰될 경우 재입찰 공고기간을 최대한 짧게 해달라는 부탁도 했다. 하늘이 그의 편이었는지 법원에서는 흔쾌히 동의했다. 20일간 8번이나 유찰, 결국 395억원에 수의계약할 수 있었다.
다음 걸림돌은 건축법이었다. 당시 명동은 상업지역이라 건폐율이 60%였는데 극장은 그 이전에 지어진 건물이라 건폐율이 80%에 달했다. 증개축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절망에 빠진 그에게 한 건축공무원이 ‘신도시에는 중심상업지구’라는 개념이 있다고 귀띔해줬다. 일반상업지구와 달리 건폐율이 최대 90%까지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당장 서울시에 건의했다. 명동은 기존 상업지구로는 처음으로 중심상업지구로 변경, 1종 지구단위계획을 적용받는 사례가 됐다.
그를 ‘믿어줬던’ 사람들
“내가 사기꾼처럼은 안보였나봐요. 사람들이 내가 하는 말을 믿어줬고 그래서 고비고비마다 일이 풀릴 수 있었어요.”김장환 회장은 “내 공이라기엔 너무 과분하다”며 그에게 힘을 주었던 사람들에게 감사인사를 돌렸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가 고 김수환 추기경이다. 1998년 “같은 편이라고 믿었던” 예술인에 뒤통수를 맞은 뒤 좌절했을 때였다. 추기경은 ‘극장이 있음으로 명동이 산다’며 그에게 다시 뛸 것을 요구했다.
“예술인 차원을 벗어나 사회 각계 여론을 형성하기로 하고 ‘명동 국립극장 되살리기 추진위원회’를 구성했어요. 추기경께서 첫 위원으로 서명해주셨죠. 2호 위원도 역시 종교계 거물인 송월주 스님이에요. 일면식도 없었는데 ‘뜻이 좋다’고 흔쾌히 응해주셨어요.”
백남용 당시 명동성당 주임신부는 이익집단인 상가번영회가 전면에 나서면 뜻이 훼손될까 우려한 김 회장 마음을 읽고 자신의 일처럼 대신 뛰어주었다. 도영심 전 한국방문의해 위원장과 조홍규 전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비롯해 김재기 전 한국관광협회장, 박 웅 전 연극협회 이사장, 김정옥 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이들이다. 물론 건축법에 대해 천금같은 정보를 주었던 당시 서울시 담당 공무원 김동구씨(현 송파구청 근무)도 ‘잊을 수 없는’ 사람 중 하나다.
명동 일대 부동산 중개인들은 건물 매입에 중대한 역할을 해줬다. 40여명에 달하는 중개인들은 옛 국립극장 건물 중개를 하지 않기로 결의했고 몇몇은 경매 현장에도 매번 입회해 힘이 돼주었다.
“매입결정이 나고는 건물에 ‘문화재로 지정됐다’는 현수막도 내걸었고 중개인들이 ‘문화재라 극장을 할 사람에게만 판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죠. 극장을 하면 연간 27억원 가량 적자를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살짝 귀띔해줬구요.”
경매 전날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찔아찔한 순간을 그들 지지 덕분에 넘길 수 있었다.
‘명동을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
“극장이 개관하면 명동 밤문화가 되살아날텐데 주차장이 턱없이 부족해요. 공공기관과 대형 업소 대표들이 모여 야간에 비는 주차장을 싸게 개방하자고 합의했어요.. 상가와 지역 주민이 앞장서 명동발전을 이끌자는 거죠. 명동성당부터 참여하겠다고 했어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묻자 “없어요 없어”라며 고개를 젓지만 그의 내심엔 명동에 대한 고민이 한가득이다. 2일도 인터뷰 직전 구청에 다녀오는 길이라 했다. 거리의 흉물처럼 튀어나와있는 관광안내소를 건물 안으로 집어넣고 활성화하는 방안을 제안하기 위해서다.
“누가 시켰으면 이렇게 못했을 거예요.”
김장환 회장은 그저 웃기만 한다.
김진명 기자 jmkim@naeil.com
‘김장환’을 재조명한 중구청
10여년에 걸친 힘겨운 싸움이었지만 정작 복원공사가 시작되면서 ‘김장환’은 잊혀졌다. 명동예술극장은 문화부 사업 중 하나가 됐을 뿐 그 공간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은 주목받지 못했다.
서울 중구청은 그런 김장환을 다시 세상에 알렸다. 김 회장은 “중구청에서 복원 과정을 백서로 제작해 기록을 남기게 됐다”고 말했다. 3월 발간된 ‘명동예술극장과 낭만명동’이다. 지난했던 복원과정과 복원 주역들을 다각도로 조명했다. 정동일 중구청장은 “옛 국립극장을 명동예술극장으로 되찾기까지 자발적 시민운동과 복원활동은 서울시민들 승리의 발자취로 남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중구는 명동예술극장을 중심으로 명동을 문화와 관광 상업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재도약시킨다는 방침이다. 극장 일대를 ‘관광특구 환경개선사업’에 포함시켜 극장 앞 도로를 정돈하고 조형물같은 벤치를 비치한 데 이어 명동 3개 지역에 이동식 야외무대를 설치해 거리문화공연을 활성화할 계획이다.
김진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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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장환 명동상가번영회 명예회장
잊혀졌던 ‘명동국립극장’을 시민 품에
“자식같아요… 내 재산같아요.”
2일 오후 서울 명동예술극장. 연노랑색 일본식 건축물 안팎에는 개관을 축하하는 글귀와 개관기념공연을 알리는 광고물이 눈길을 끈다. 5일은 명동예술극장이 34년만에 다시 관객들에게 내부를 개방하는 날이다.
김장환(80) 서울 명동상가번영회 명예회장은 연노랑색 일본식 건물을 바라보며 “옛날 모습 그대로”라며 감격에 겨워했다.<사진> 그의 눈동자는 꿈꾸듯 아련해졌다. 이 극장을 지켜내기 위해 한결같이 매달려온 10여년 세월이 스쳐가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김 회장은 옛 국립극장을 명동예술극장이라는 예술전용공간으로 되살린 주역이다.
‘낭만 명동’을 꿈꾸며 10여년
명동에 국립극장이 있다? ‘남산국립극장’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1975년 사기업에 매각된 옛 국립극장은 낯설기만 하다. 김장환 회장 역시 1990년대 초반에야 그 존재와 가치에 주목했다.
1982년 명동상가번영회가 출범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하면서 김 회장과 번영회에서 관심을 가졌던 게 명동상권 부활이었다. 1980년대 들어 서울 부도심권인 영동 잠실 여의도가 개발되면서 유명 양장점을 비롯한 패션산업이 강남권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던 차였다. 게다가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명동은 각종 정치집회와 시위현장으로 더 익숙한 곳이었다.
1986아시안게임과 1988올림픽을 앞두고 명동 거리단장에 나섰다. 전신주며 전선을 지중화했고 ‘명동의 날’을 지정, 명동축제로까지 키웠다. 그러나 명동으로 대표되는 ‘낭만’까지는 역부족이었다.
“단순한 상권부활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문화와 역사가 빠졌더군요.”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명동 낭만시대’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옛 국립극장이다. 이를 복원하고 명동을 문화와 패션이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발전시키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1993년 마침 서울대학교 옛 본관과 고려대학교 본관·도서관, 중앙고등학교 본관·도서관 등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됐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옛 국립극장은 제외됐다. 당장 보존건물 지정운동에 돌입했다.
그러나 건물은 어디까지나 민간기업 소유였다. 소유주인 대한종합금융이 이듬해 건물을 헐고 10층 규모 신사옥을 세우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맞대응했다. 상인들만의 힘으로는 부족하겠다 싶었다. 예술인단체 등과 연대해 서울시와 문화관광부 청와대 등에 보존 건의서를 냈다. 1995년부터는 ‘명동 옛 국립극장 되찾기 운동’으로 방향을 틀었다.
서울시에 문화재지정을 다시 건의하고 2000년부터는 명동 거리에서 1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언론에서 ‘문화재 지정’에 힘을 실어주면서 국회 청원이 만장일치로 통과됐고 2002년 예산처에서 필요한 예산 400억원 중 200억원을 배정, 우선 매매계약을 체결하도록 결정했다. 2004년 문화관광부에서 부지를 매입, 2005년 드디어 복원공사를 시작했다.
매 순간이 고비였다
“사유재산을 재건축한다는데 막는다는 게 쉬운 일이었겠어요. 매 순간이 고비였죠.”
회유도 많았다. ‘새 건물을 지어 한 층을 주겠다’는 유혹도 있었다. 장안의 4대 음식점 중 하나를 경영하던 그가 급작스레 생업을 팽개치고 밖으로 나돌자 집안에서는 당연히 반대했다. 국회의원이며 장관이며 예술인이며,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쫓아다니며 설득하는데 들어가는 시간적 경제적 부담도 컸다.
“순수하게 사재를 털었는데 행여 꼬투리를 잡힐까 싶어 상가번영회 규칙마저 바꿨어요. 부회장 전결로 재산권을 행사하게끔 한 거죠.”
금세라도 될 듯 싶었는데 물거품이 되는 순간도 여러번이었다. 그때는 딱 포기하고만 싶었다. 1998년 서울시장을 사석에서 만나 설득, 500억원 지원을 약속받았던 일도 그 중 하나다. 함께 뛰던 한 예술인이 ‘허물어져가는 옛날 극장 복구할 돈 있으면 차라리 예술인회관이나 지어달라’고 서울시에 항의해 하룻밤새 무산됐던 아픈 기억이다.
2002년 예산을 확보한 뒤에도 예기치 못한 난관을 만났다. 400억원이던 건물이 2003년 7월 재감정에서 2배가 넘는 840억원으로 나온 것이다. 확보된 예산 200억원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입찰을 관장하는 수석부장판사를 찾아가 각계의 정성이 무위로 돌아갈 처지를 설명하고 현장입찰을 요청했다. 유찰될 경우 재입찰 공고기간을 최대한 짧게 해달라는 부탁도 했다. 하늘이 그의 편이었는지 법원에서는 흔쾌히 동의했다. 20일간 8번이나 유찰, 결국 395억원에 수의계약할 수 있었다.
다음 걸림돌은 건축법이었다. 당시 명동은 상업지역이라 건폐율이 60%였는데 극장은 그 이전에 지어진 건물이라 건폐율이 80%에 달했다. 증개축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절망에 빠진 그에게 한 건축공무원이 ‘신도시에는 중심상업지구’라는 개념이 있다고 귀띔해줬다. 일반상업지구와 달리 건폐율이 최대 90%까지 적용된다는 것이었다. 당장 서울시에 건의했다. 명동은 기존 상업지구로는 처음으로 중심상업지구로 변경, 1종 지구단위계획을 적용받는 사례가 됐다.
그를 ‘믿어줬던’ 사람들
“내가 사기꾼처럼은 안보였나봐요. 사람들이 내가 하는 말을 믿어줬고 그래서 고비고비마다 일이 풀릴 수 있었어요.”김장환 회장은 “내 공이라기엔 너무 과분하다”며 그에게 힘을 주었던 사람들에게 감사인사를 돌렸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가 고 김수환 추기경이다. 1998년 “같은 편이라고 믿었던” 예술인에 뒤통수를 맞은 뒤 좌절했을 때였다. 추기경은 ‘극장이 있음으로 명동이 산다’며 그에게 다시 뛸 것을 요구했다.
“예술인 차원을 벗어나 사회 각계 여론을 형성하기로 하고 ‘명동 국립극장 되살리기 추진위원회’를 구성했어요. 추기경께서 첫 위원으로 서명해주셨죠. 2호 위원도 역시 종교계 거물인 송월주 스님이에요. 일면식도 없었는데 ‘뜻이 좋다’고 흔쾌히 응해주셨어요.”
백남용 당시 명동성당 주임신부는 이익집단인 상가번영회가 전면에 나서면 뜻이 훼손될까 우려한 김 회장 마음을 읽고 자신의 일처럼 대신 뛰어주었다. 도영심 전 한국방문의해 위원장과 조홍규 전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비롯해 김재기 전 한국관광협회장, 박 웅 전 연극협회 이사장, 김정옥 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이들이다. 물론 건축법에 대해 천금같은 정보를 주었던 당시 서울시 담당 공무원 김동구씨(현 송파구청 근무)도 ‘잊을 수 없는’ 사람 중 하나다.
명동 일대 부동산 중개인들은 건물 매입에 중대한 역할을 해줬다. 40여명에 달하는 중개인들은 옛 국립극장 건물 중개를 하지 않기로 결의했고 몇몇은 경매 현장에도 매번 입회해 힘이 돼주었다.
“매입결정이 나고는 건물에 ‘문화재로 지정됐다’는 현수막도 내걸었고 중개인들이 ‘문화재라 극장을 할 사람에게만 판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죠. 극장을 하면 연간 27억원 가량 적자를 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살짝 귀띔해줬구요.”
경매 전날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찔아찔한 순간을 그들 지지 덕분에 넘길 수 있었다.
‘명동을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
“극장이 개관하면 명동 밤문화가 되살아날텐데 주차장이 턱없이 부족해요. 공공기관과 대형 업소 대표들이 모여 야간에 비는 주차장을 싸게 개방하자고 합의했어요.. 상가와 지역 주민이 앞장서 명동발전을 이끌자는 거죠. 명동성당부터 참여하겠다고 했어요.”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묻자 “없어요 없어”라며 고개를 젓지만 그의 내심엔 명동에 대한 고민이 한가득이다. 2일도 인터뷰 직전 구청에 다녀오는 길이라 했다. 거리의 흉물처럼 튀어나와있는 관광안내소를 건물 안으로 집어넣고 활성화하는 방안을 제안하기 위해서다.
“누가 시켰으면 이렇게 못했을 거예요.”
김장환 회장은 그저 웃기만 한다.
김진명 기자 jmkim@naeil.com
‘김장환’을 재조명한 중구청
10여년에 걸친 힘겨운 싸움이었지만 정작 복원공사가 시작되면서 ‘김장환’은 잊혀졌다. 명동예술극장은 문화부 사업 중 하나가 됐을 뿐 그 공간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은 주목받지 못했다.
서울 중구청은 그런 김장환을 다시 세상에 알렸다. 김 회장은 “중구청에서 복원 과정을 백서로 제작해 기록을 남기게 됐다”고 말했다. 3월 발간된 ‘명동예술극장과 낭만명동’이다. 지난했던 복원과정과 복원 주역들을 다각도로 조명했다. 정동일 중구청장은 “옛 국립극장을 명동예술극장으로 되찾기까지 자발적 시민운동과 복원활동은 서울시민들 승리의 발자취로 남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중구는 명동예술극장을 중심으로 명동을 문화와 관광 상업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재도약시킨다는 방침이다. 극장 일대를 ‘관광특구 환경개선사업’에 포함시켜 극장 앞 도로를 정돈하고 조형물같은 벤치를 비치한 데 이어 명동 3개 지역에 이동식 야외무대를 설치해 거리문화공연을 활성화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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