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과 서러움의 5월
황풍년 (‘전라도닷컴’ 편집장)
5월 23일 아침, 광주 시민들도 가눌 수 없는 슬픔에 통곡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과거와 현재의 비극이 엎친 데 덮쳐져 더욱 참담했다. 광주에서 5월은 가뜩이나 서럽고 우울한 날들이다. 잔혹한 학살의 상처는 유족과 부상자 등 피해 당사자들은 물론 시민 모두에게 아물지 않는 생생한 고통이다.
80년 5월, 쿠데타군이 총칼을 휘둘렀던 18일부터 옛 전남도청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시민군이 진압되던 27일까지 광주 곳곳은 피로 얼룩졌다. 5월이 그저 장미 흐드러진 호시절일 수 없는 이유다. 광주 시민들의 마음엔 꽃보다 더 붉은 치욕과 분노가 5월 내내 피었다 진다. 머리에도 가슴에도 찐득하게 들러붙은 울화가 자꾸만 시큰거리는 지독한 ‘5월병’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 23일 역시 쿠데타군이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날이다. 29년 전 그날, 쿠데타군은 광주 주남마을 앞을 지나던 버스에 무차별 총질을 해댔다. 15명이 버스 안에서 즉사했고, 생존자 3명 중 2명의 부상자는 귀찮다는 이유로 마을 뒷산에 끌고 가 살해했다. 이토록 천인공노할 만행이 생생하게 증언되던 국회 광주특위 현장에서 국회의원 노무현도 치를 떨었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5·18 민주묘역엔 고관대작들이 줄줄이 찾아와 머리를 조아렸다. 속내야 어쩔망정 입으로는 한사코 “이 땅의 민주주의는 5월 광주의 희생 위에 이뤄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2009년 5월 광주는 우울했다. ‘5·18 민주화운동 29주기 기념식’에 이명박 대통령은 오지 않았다. 기념사조차 보내지 않았으니, ‘5월 광주는 모멸감마저 느껴야 했다.
보기 드문 ‘경상도 친구’
광주에서 노무현을 그리워한 건 당연했다. 학살자들을 향해 사자후를 토하던 20년 전 ‘광주청문회’의 노무현은 광주 시민들에게 보기 드문 경상도 친구였다.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와의 3당 야합에 맞서 절규하던 그의 모습은 5월 광주와 흡사하기까지 했다. 낙선이 불 보듯 뻔한 그의 정치적 선택은 민주주의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 5월영령들을 닮아 있었다.
돈도 없고 계파도 조직도 미미한 그가 광주에서 호남출신 후보들을 제치고 제16대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 1위라는 기적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5월의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민주주의와 인권, 지역감정 타파를 외치며 자신을 희생해온 노무현은 5월 광주의 정서와 통했음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진정 이 땅의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를 함께 꿈꾸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 노무현은 5월 광주에 성의를 다했다. 해마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찾아와 광주의 아픔을 어루만졌다. 물론 광주가 대통령 노무현에게 마냥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미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대미 굴욕외교’라 비난하며 막아서는 시위대에 막혀 쪽문을 통해 5·18 기념식장에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5월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애정을 접지 않았다. 그는 서민적이고 소탈했다. 얍삽하고 노회한 처세의 달인들이 판치는 정치권에서 그는 안타까울만큼 솔직했다. 스스로 최고 권력자의 권위를 내려놓았고 보수와 진보 양쪽으로부터 가혹한 공격에 시달렸다.
그가 봉하마을의 촌부로 귀향해 “이야! 기분 좋다”라 외칠 때 공과를 떠나 축하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기실 인간 노무현의 모습이 대한민국 보통 서민들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5월 광주와 오늘의 현실
5·18 29주기를 맞은 광주 금남로의 추모 인파는 눈에 띄게 줄어 스산한데, 그를 애도하는 시민들이 옛 전남도청에 마련된 빈소 앞에 늘어서 있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통해 5월 광주를 되살리며 오늘의 현실을 새삼 절감한다.
부동산 졸부들의 감세는 자본주의의 철칙이 되었다. 서울과 수도권은 비대해지고 지역의 피폐는 속도를 더한다. 무차별적 경쟁교육으로 학교는 병들어간다. 남과 북의 대결은 조마조마 위태롭다. 모든 집회와 시위는 사실상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철거민들이,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생존권을 부르짖고 있다.
사방팔방이 꽉 막혀 옴쭉도 할 수 없는 불통의 5월에 그는 떠났다. 사람 사는 세상은 정녕 신기루였던가. ‘바보 노무현’의 순정한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음이 왜 이다지 억울한 걸까. 그리움과 서러움이 5월의 녹음마냥 짙어간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황풍년 (‘전라도닷컴’ 편집장)
5월 23일 아침, 광주 시민들도 가눌 수 없는 슬픔에 통곡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과거와 현재의 비극이 엎친 데 덮쳐져 더욱 참담했다. 광주에서 5월은 가뜩이나 서럽고 우울한 날들이다. 잔혹한 학살의 상처는 유족과 부상자 등 피해 당사자들은 물론 시민 모두에게 아물지 않는 생생한 고통이다.
80년 5월, 쿠데타군이 총칼을 휘둘렀던 18일부터 옛 전남도청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던 시민군이 진압되던 27일까지 광주 곳곳은 피로 얼룩졌다. 5월이 그저 장미 흐드러진 호시절일 수 없는 이유다. 광주 시민들의 마음엔 꽃보다 더 붉은 치욕과 분노가 5월 내내 피었다 진다. 머리에도 가슴에도 찐득하게 들러붙은 울화가 자꾸만 시큰거리는 지독한 ‘5월병’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 23일 역시 쿠데타군이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한 날이다. 29년 전 그날, 쿠데타군은 광주 주남마을 앞을 지나던 버스에 무차별 총질을 해댔다. 15명이 버스 안에서 즉사했고, 생존자 3명 중 2명의 부상자는 귀찮다는 이유로 마을 뒷산에 끌고 가 살해했다. 이토록 천인공노할 만행이 생생하게 증언되던 국회 광주특위 현장에서 국회의원 노무현도 치를 떨었었다.
올해도 어김없이 5·18 민주묘역엔 고관대작들이 줄줄이 찾아와 머리를 조아렸다. 속내야 어쩔망정 입으로는 한사코 “이 땅의 민주주의는 5월 광주의 희생 위에 이뤄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2009년 5월 광주는 우울했다. ‘5·18 민주화운동 29주기 기념식’에 이명박 대통령은 오지 않았다. 기념사조차 보내지 않았으니, ‘5월 광주는 모멸감마저 느껴야 했다.
보기 드문 ‘경상도 친구’
광주에서 노무현을 그리워한 건 당연했다. 학살자들을 향해 사자후를 토하던 20년 전 ‘광주청문회’의 노무현은 광주 시민들에게 보기 드문 경상도 친구였다.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신군부와의 3당 야합에 맞서 절규하던 그의 모습은 5월 광주와 흡사하기까지 했다. 낙선이 불 보듯 뻔한 그의 정치적 선택은 민주주의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 5월영령들을 닮아 있었다.
돈도 없고 계파도 조직도 미미한 그가 광주에서 호남출신 후보들을 제치고 제16대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 1위라는 기적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5월의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민주주의와 인권, 지역감정 타파를 외치며 자신을 희생해온 노무현은 5월 광주의 정서와 통했음이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진정 이 땅의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를 함께 꿈꾸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 노무현은 5월 광주에 성의를 다했다. 해마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찾아와 광주의 아픔을 어루만졌다. 물론 광주가 대통령 노무현에게 마냥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미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대미 굴욕외교’라 비난하며 막아서는 시위대에 막혀 쪽문을 통해 5·18 기념식장에 들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5월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에 대한 애정을 접지 않았다. 그는 서민적이고 소탈했다. 얍삽하고 노회한 처세의 달인들이 판치는 정치권에서 그는 안타까울만큼 솔직했다. 스스로 최고 권력자의 권위를 내려놓았고 보수와 진보 양쪽으로부터 가혹한 공격에 시달렸다.
그가 봉하마을의 촌부로 귀향해 “이야! 기분 좋다”라 외칠 때 공과를 떠나 축하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기실 인간 노무현의 모습이 대한민국 보통 서민들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5월 광주와 오늘의 현실
5·18 29주기를 맞은 광주 금남로의 추모 인파는 눈에 띄게 줄어 스산한데, 그를 애도하는 시민들이 옛 전남도청에 마련된 빈소 앞에 늘어서 있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통해 5월 광주를 되살리며 오늘의 현실을 새삼 절감한다.
부동산 졸부들의 감세는 자본주의의 철칙이 되었다. 서울과 수도권은 비대해지고 지역의 피폐는 속도를 더한다. 무차별적 경쟁교육으로 학교는 병들어간다. 남과 북의 대결은 조마조마 위태롭다. 모든 집회와 시위는 사실상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철거민들이,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생존권을 부르짖고 있다.
사방팔방이 꽉 막혀 옴쭉도 할 수 없는 불통의 5월에 그는 떠났다. 사람 사는 세상은 정녕 신기루였던가. ‘바보 노무현’의 순정한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음이 왜 이다지 억울한 걸까. 그리움과 서러움이 5월의 녹음마냥 짙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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