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59주년 ''한반도에 평화를''] ① 기억조차 하기싫은 전쟁의 참상
민간인 100만명 사망·학살·행불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올해로 59년. 긴 세월이 흘렀지만 전쟁의 상처는 좀체 아물지 않고 있다. 6·25전쟁으로 민간인을 포함 200만명 이상의 한국인이 희생됐고 이산가족만 2000만명을 헤아릴 정도다. 1953년 휴정협정 체결과 함께 전쟁은 일단 끝이 났지만 한반도는 둘로 나뉘어졌고 전쟁의 불안감은 여전하다.
특히 최근 10년간 ‘대화와 협력’으로 다져진 한반도 평화체제는 이명박정부 출범과 함께‘압박과 대치’로 바뀌면서 한반도에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일부에선 이 대통령이‘전쟁’이란 단어까지 언급하며 대북 강경책을 밀어붙이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당장 서해북방 한계선(NLL)부근에서 북한이 국지적 군사도발을 선제 감행할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는 등 어느 때보다 군사적 충돌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6·25 전쟁과 같은 비극이 한반도에서 더 이상 일어나선 안된다는 것은 골백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나 ‘참혹하고 참혹한’전쟁을 겪었기 때문이다.
방어 능력 없는 부녀자 노인 몰아 놓고 무차별 사격
군경, 재소자 집단학살 … “유례없는 비인도적 행위”
진실규명 제대로 안돼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민족 간에 서로 피를 흘리며 싸운 처참한 비극이었다. 특히 남북한 양측에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를 입혔다.
국방군사연구소 ‘한국전쟁피해 통계’에 따르면 남한에서 이 전쟁으로 인해 군인들은 13만5000명이 전사하고 44만3000명이 부상을 당했다. 특히 100만 명에 가까운 민간인이 사망, 학살, 부상, 납치, 행방불명 등으로 직접적 피해를 입었다.
◆통계로 본 전쟁의 상흔 = 또 8333명의 군인이 북한에서 포로가 되어 갖은 고초를 겪다 포로교환 때 생환했다. 포로교환이 끝난 1953년말 이후 4만명 이상의 포로를 북한이 억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조사에 따르면 남한이 입은 물질적 피해의 규모는 4123억 원에 달한다.
북한 역시 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수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북한은 그러나 피해규모 등에 대해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이 없다. 다만 구소련 자료에 따르면 최소 38만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7만5823명의 군인이 UN측에 포로가 되었다가 포로교환에 의해 북한으로 돌아갔다. 민간인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약 80만명이 남한으로 넘어왔고 28만명이 전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전쟁으로 남북간에 흩어져 고통 받고 있는 이산가족은 2000만명에 달한다.
◆민간인 사망자 군인보다 많아 = 한국전쟁은 전쟁사상 군인보다 민간인 사망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최초의 전쟁으로 기록됐다. 방어할 능력이 없는 민간인들에 대한 여러 유형의 학살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와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단체 등에 따르면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났을 때 최소 200만명의 희생됐는데 이들 중 반 이상은 민간인이었다. 특히 민간인 학살은 전쟁초기에 집중적으로 자행됐다.
지난 1950년 겨울 전남 함평과 전북 남원 순창 등지에선 대규모 학살이 벌어졌다. 육군 11사단에 의해서 주도된 토벌작전의 결과이기도 했다. 전북 임실에서는 50년 11월에서 51년 3월에 걸쳐서 수백명의 민간인이 학살됐고 같은 기간 고창에서도 수백명이, 순창에서는 1000여명의 주민이 이유 없이 국군에 의해 학살됐다.
전남 함평에서도 1월 12일 월야면 동촌마을 등 9개면 9개 마을에서 500여명의 주민들이 토벌대의 습격으로 집단 학살당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51년 2월 초순 11사단 9연대는 경남 산청, 거창, 함양 등지에서 활동하는 빨치산을 인민군의 춘계공세 이전에 소탕한다는 목적으로 이른바 ‘견벽청야’ 작전에 나섰다. 말 그대로 ‘거점은 지키되 빨치산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인적, 물적 자원 은 없애버리라’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이로 인해 51년 2월 8일 산청군 금서면 가현마을에서는 토벌대가 마을을 포위하고 집집마다 사람과 가축을 모두 몰아낸 후 집에 불을 질렀다. 가죽과 베 등 돈이 될 만한 것은 모두 따로 모은 군인들은 동네사람들을 모두 마을 앞 산신당 골짜기로 몰아넣은 후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당시 주민 123명이 즉사하고 6명만이 생존했다. 같은 만행은 이웃 방곡리, 점촌리, 자혜리, 화계리, 주상리에서도 반복됐다. 이 날 하루 동안 529명으로 추정되는 주민들이 학살됐다. 같은 해 2월 10일 거창군 신원면에 출동하 ‘공비들 때문에 위험하니 피난을 가야 한다’며 신원국민학교로 마을주민들을 몰아넣고 가는 도중 행렬을 잘라 뒷줄은 탄량골에 밀어 넣고 군인가족을 골라낸 뒤 집단 총살했다.
‘거창 양민학살’로 세상에 알려진 이 사건으로 약 1500여명의 무고한 주민들이 11사단 9연대의 초토화 작전의 제물이 됐다. 이들 희생자중 대다수가 50,60대 노년층 혹은 10대미만의 어린아이와 여자들이었다는 점에서 거창학살은 비극성을 더한다.
일부 지역에선 북한 인민군과 국군이 번갈아 민간인을 학살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는 “전남 영암에서 1949년 7월∼1951년 5월에는 인민군과 좌익세력이, 1950년 10월∼1951년 3월에는 국군과 경찰이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밝혔다. 인민군과 좌익세력은 경제적으로 부유하다는 등의 이유로 영암군 군서면 등 9곳 읍·면에서 최소 149명을 학살했다. 국군과 경찰은 전쟁 때 북측에 협조한 사람을 색출하겠다며 영암군 금정면 등지에서 최소 234명을 숨지게 했다.
◆형무소에서도 민간인 학살 = 민간인 학살 대규모 민간인 학살은 형무소에서도 자행됐다. 진실화해위원는 최근 “한국전쟁 발발 직후 형무소에 갇힌 재소자와 민간인 3400여명이 군인과 경찰, 교도관 등에 의해 희생된 사실을 처음 확인했다”고 밝혔다.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은 제주 4ㆍ3 사건과 여순사건 등으로 전국 형무소 20여곳에 수감 중이던 최소 2만명의 재소자와, 예비검속으로 구금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군경에 집단 학살돼 암매장되거나 수장된 사건이다.
진실화해위가 진실을 규명한 곳은 부산과 마산, 진주 형무소 등 3곳이며 국가가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을 조사해 실태를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동춘 상임위원은 “인민군 비점령지역으로 부산, 경남 지역에서 이미 신병이 확보돼 격리 중이던 재소자와 민간인 수천명을 군경이 일방적이고 임의로 집단 학살한 것은 사상 유례가 없는 비인도적 행위였다”고 말했다.
◆‘학살 규명’제대로 안돼 = 한국전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을 포함해 항일독립운동, 인권침해 등 현재 진실화해위에 접수된 진실규명 요구건수 1만988건 가운데 진실규명이 이뤄진 것은 29%인 3187건에 불과하다.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사건만 56.7%인 6227건이지만 1년 안에 진실을 규명하기엔 무리라는 것이 진실위 안팎의 판단이다.
올해 유해발굴지는 전국 30여곳 이상의 유해매장 추정지 중 전남 함평군 불갑산 일대, 진주시 문산읍 명석면 일대 등 4곳만이 선정됐다. 문제는 진실위원회 활동시한이 내년 4월로 1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진실위의 기한연장 없이는 사실상 이번이 마지막인 셈이다.
고병수 기자 byng8@naeil.com
●미군 자행 첫 한국민 학살‘노근리 사건’
주민 226명‘적으로 간주’
AP보도로 세계가 주목 … 미국측 보상없어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노근리의 철교 밑 터널. 속칭 쌍굴다리 속에 피신하고 있던 마을 주민 수백 명을 향해 미군들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사진 아래>이 사격으로 300여 명이 살해됐다. 당시 미군은 노근리 부근에서 발견되는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명령에 따라 학살사건은 자행됐다
지난 1999년 9월29일 미국 AP통신은 한국 전쟁 도중 발생한 미군의 한국인 양민 총격 사건인‘노근리 학살 사건’에 관한 첫 기사를 보도했다. AP통신의 이 기사가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충북 영동군 노근리의 속칭 ‘쌍굴다리 학살 사건’은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이 보도를 계기로 미국 측과 한국 측은 한국전 당시 발생한 양민학살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현지 조사를 벌였다. AP통신 찰스 핸리 기자(61)는 노근리 보도로 퓰리처상(탐사보도 부문)을 수상했다.
그러나 ‘노근리 학살 사건’이 외부에 처음 드러난 것은 1960년 민주당 정권 때 유족들이 미군 소청심사위원회에 소청을 제기하면서였다. 당시 미군측은 소청을 기각하였고 이 사건은 그대로 역사의 미궁 속에 묻힌 것처럼 보였다. 지난 1994년 4월 ‘노근리 양민학살 대책위원회’ 정은용 위원장이 유족들의 비극을 담은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실록 소설을 출간하면서 이 사건은 다시 일반에게 알려지게 됐다.
미군에 의해 자행된 첫 한국민 학살사건인‘노근리 사건’은 2008년말 기준 226명이 희생당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2000년 초 한미합동조사가 이뤄졌고 미국 측에서는 클린턴 전 대통령이 유감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지난 2004년 ‘노근리사건희생자심사 및 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이 공포됐다. 특별법에 따라 희생자 조사를 해 나갔다. 2004년 7월~10월 사이에 희생자 신고를 받아서 보증인, 참고인 등을 조사하는 형식으로 이뤄졌으며 1000여명 가까이 조사했다. 희생자들에게는 특별히 보상을 하지 않았다. 명예회복만이 이뤄졌을 뿐이다.
고병수 송현경 byng8@naeil.com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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