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모으기 노사정합의 등 화합으로 위기극복
기업 금융 체질 개선 ... 금융위기 충격 줄여
“잘못하다가는 나라가 파산할지도 모를 위기에 당면해 있다. 6.25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 할 수 있는 외환위기가 닥쳐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98년 2월 25일 취임사를 통해 국민들에게 현재 우리의 처지를 설명했다. “막대한 부채를 안고 매일같이 밀려오는 만기외채를 갚는 데 급급하고 있다”며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97년 대통령직 인수위에서부터 ‘경제대통령’의 행보를 이어가며 위기극복방안을 만들었고 강한 추진력으로 실행에 옮겼다. 2001년 8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빌린 돈을 모두 갚고 2년여만에 ‘경제독립’을 선언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재벌개혁, 정경분리, 금융시장 구조조정 등을 통해 우리나라 경제체질을 강하게 단련시켰다.
◆준비된 위기극복 프로그램 = 김 전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위기극복 프로그램을 발표하기 전에 국민들의 이해를 구했다. 그는 “물가는 오르고 실업은 늘어날 것”이라며 “소득은 떨어지고 기업 도산은 속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했다. 정치 경제 금융을 이끌어온 지도자의 정경유착과 관치금융, 대기업들의 문어발 확장을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꼽았다.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시장경제를 먼저 원칙으로 제시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한 정책으로 물가 안정을 내놓았으며 대기업엔 자율성 보장을, 중소기업엔 집중 지원을 약속했다. △기업의 투명성 △상호지급보증의 금지 △건전한 재무구조 △핵심기업의 설정과 중소기업에 대한 협력 △지배주주와 경영자의 책임성 확립 등 인수인 시절 대기업과 약속한 5대 개혁을 반드시 관철시키겠다는 다짐도 잊지 않았다. “자율성을 보장하겠지만 자기개혁 노력도 엄격히 요구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경제 원리를 철저하게 적용하고 IT강국을 만들겠다는 의지도 보여줬다. 특히 “벤처기업은 새로운 세기의 꽃”이라며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고 벤처기업을 통해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 실업문제를 해소하겠다”고 밝혔다.
또 외국자본 투자유치는 외채를 갚고 국내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면서 우리 경제의 투명성을 높일 수 있는 ‘1석 3조’로 봤다.
◆국민 화합이 먼저 =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 인수인 시절에 이미 금 모으기 운동과 노사정 합의로 국민화합을 이끌어냈다.
그는 “국민이 위기 극복을 위해 ‘금 모으기’에 나섰고 노동자와 사용자, 정부는 대화를 통한 대타협으로 국난극복의 주춧돌을 놓았다”며 흥분했다.
국민과의 소통과 통합을 바탕으로 그는 준비한 위기극복 프로그램을 실천해 나갔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가장 적극적이었던 부분은 외국인 투자자금 유치다. 98년 4월에 외국인 투자유치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곧바로 다음 달엔 외국인 주식투자한도를 완전히 폐지했다. 99년 4월엔 제1단계 외환거래자유화 계획을 발표했다. 경상수지가 흑자로 돌아서고 외국인들이 주식시장에 대거 유입되면서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빠르게 늘었다.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동시에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이들에 대한 구조조정이 발빠르게 단행됐다. 금융권 구조조정이 먼저 일어났다. IMF관리체제로 들어가기 전날인 98년 12월 2일에 9개 종금사에 대한 영업정지명령이 내려졌다. 2000년 4월엔 부실덩어리 투신사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을 결정했고 12월엔 예보를 통해 5개 부실은행에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2001년 4월에 국민-주택은행 합병협상을 타결 짓고 현대투신증권은 푸르덴셜에 팔았다.
금융권과 연결돼 있던 기업들에 대한 구조조정도 이어졌다. 98년 6월, 퇴출 대상 55개 기업명단이 발표됐고 10월엔 117개 기업 워크아웃 대상기업도 선정됐다. 99년 3월엔 퇴출 과 여신중단 대상 80개 기업 중 25개사를 정리하기로 했다.
5대 대기업들은 특히 정부에 의한 ‘빅딜’에 참여했다. 99년에 현대그룹이 구조조정계획을 발표하고 대우그룹 12개 계열사도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현대건설이 1차 부도가 난 후 대우차, 동아건설 등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동시다발적인 구조조정과 외국인투자유치 등으로 우리나라는 계획보다 2년 앞선 2001년 8월에 IMF관리체제를 졸업했다.
◆체질 튼튼해진 경제 = 김 전 대통령의 외환위기 처방은 국내 기업, 은행, 국민들의 경쟁력과 체질을 강화시켰다. 정부도 막대한 외환보유액으로 외세의 방어력을 키웠다.
공약대로 물가를 2%대에서 안정시켰다.
기업 부채비율은 97년 392.2%에서 2007년말엔 108.0%까지 떨어졌다. 지난해에는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124.5%까지 높아졌지만 여전히 안정권에 들어가 있다.
은행권 건전성을 보여주는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7.0%에서 최근엔 13%대까지 올랐다.
89억달러에 머물러 있던 외환보유액은 2008년 3월엔 2642억달러까지 뛰어올랐고 지난달엔 2375억달러를 기록했다.
성장률은 취임초인 98년에 -6.7%로 떨어졌고 1인당 국민소득은 6742달러로 내려앉았다. 96년 1만1380달러, 97년 1만307달러 등 2년간의 1만달러 시대어서 고꾸라졌다. 그러나 99년 10.7% 성장하며 8581달러로 1인당 국민소득을 올려놨고 IMF관리체제를 벗어난 2001년엔 1만달러대를 회복했다. 이듬해엔 1만1499만달러를 기록했다. 이를 발판으로 1만달러를 돌파한 후 6년만인 2007년에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시대를 열었다.
윤지호 한화증권 투자전략팀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기업구조조정을 통해 기업경쟁력이 강화했고 내수를 확대시켰다”며 “이는 코스피 ‘마의 1000p’를 넘어서 견조한 상승세의 기반을 깔아놨다”며 “한국이 재평가받는 큰 변화의 출발점이었다”고 평가했다.
강현철 우리투자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외환위기를 맞아서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금융과 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혁신적으로 단행, 이후 우리나라 경제와 기업들이 외부의 충격에도 강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준규 김형선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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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금융 체질 개선 ... 금융위기 충격 줄여
“잘못하다가는 나라가 파산할지도 모를 위기에 당면해 있다. 6.25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 할 수 있는 외환위기가 닥쳐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98년 2월 25일 취임사를 통해 국민들에게 현재 우리의 처지를 설명했다. “막대한 부채를 안고 매일같이 밀려오는 만기외채를 갚는 데 급급하고 있다”며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97년 대통령직 인수위에서부터 ‘경제대통령’의 행보를 이어가며 위기극복방안을 만들었고 강한 추진력으로 실행에 옮겼다. 2001년 8월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빌린 돈을 모두 갚고 2년여만에 ‘경제독립’을 선언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재벌개혁, 정경분리, 금융시장 구조조정 등을 통해 우리나라 경제체질을 강하게 단련시켰다.
◆준비된 위기극복 프로그램 = 김 전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위기극복 프로그램을 발표하기 전에 국민들의 이해를 구했다. 그는 “물가는 오르고 실업은 늘어날 것”이라며 “소득은 떨어지고 기업 도산은 속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했다. 정치 경제 금융을 이끌어온 지도자의 정경유착과 관치금융, 대기업들의 문어발 확장을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꼽았다.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시장경제를 먼저 원칙으로 제시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한 정책으로 물가 안정을 내놓았으며 대기업엔 자율성 보장을, 중소기업엔 집중 지원을 약속했다. △기업의 투명성 △상호지급보증의 금지 △건전한 재무구조 △핵심기업의 설정과 중소기업에 대한 협력 △지배주주와 경영자의 책임성 확립 등 인수인 시절 대기업과 약속한 5대 개혁을 반드시 관철시키겠다는 다짐도 잊지 않았다. “자율성을 보장하겠지만 자기개혁 노력도 엄격히 요구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경제 원리를 철저하게 적용하고 IT강국을 만들겠다는 의지도 보여줬다. 특히 “벤처기업은 새로운 세기의 꽃”이라며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경제를 발전시키고 벤처기업을 통해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 실업문제를 해소하겠다”고 밝혔다.
또 외국자본 투자유치는 외채를 갚고 국내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면서 우리 경제의 투명성을 높일 수 있는 ‘1석 3조’로 봤다.
◆국민 화합이 먼저 = 김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 인수인 시절에 이미 금 모으기 운동과 노사정 합의로 국민화합을 이끌어냈다.
그는 “국민이 위기 극복을 위해 ‘금 모으기’에 나섰고 노동자와 사용자, 정부는 대화를 통한 대타협으로 국난극복의 주춧돌을 놓았다”며 흥분했다.
국민과의 소통과 통합을 바탕으로 그는 준비한 위기극복 프로그램을 실천해 나갔다.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가장 적극적이었던 부분은 외국인 투자자금 유치다. 98년 4월에 외국인 투자유치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곧바로 다음 달엔 외국인 주식투자한도를 완전히 폐지했다. 99년 4월엔 제1단계 외환거래자유화 계획을 발표했다. 경상수지가 흑자로 돌아서고 외국인들이 주식시장에 대거 유입되면서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빠르게 늘었다.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동시에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이들에 대한 구조조정이 발빠르게 단행됐다. 금융권 구조조정이 먼저 일어났다. IMF관리체제로 들어가기 전날인 98년 12월 2일에 9개 종금사에 대한 영업정지명령이 내려졌다. 2000년 4월엔 부실덩어리 투신사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을 결정했고 12월엔 예보를 통해 5개 부실은행에 공적자금이 투입됐다. 2001년 4월에 국민-주택은행 합병협상을 타결 짓고 현대투신증권은 푸르덴셜에 팔았다.
금융권과 연결돼 있던 기업들에 대한 구조조정도 이어졌다. 98년 6월, 퇴출 대상 55개 기업명단이 발표됐고 10월엔 117개 기업 워크아웃 대상기업도 선정됐다. 99년 3월엔 퇴출 과 여신중단 대상 80개 기업 중 25개사를 정리하기로 했다.
5대 대기업들은 특히 정부에 의한 ‘빅딜’에 참여했다. 99년에 현대그룹이 구조조정계획을 발표하고 대우그룹 12개 계열사도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현대건설이 1차 부도가 난 후 대우차, 동아건설 등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동시다발적인 구조조정과 외국인투자유치 등으로 우리나라는 계획보다 2년 앞선 2001년 8월에 IMF관리체제를 졸업했다.
◆체질 튼튼해진 경제 = 김 전 대통령의 외환위기 처방은 국내 기업, 은행, 국민들의 경쟁력과 체질을 강화시켰다. 정부도 막대한 외환보유액으로 외세의 방어력을 키웠다.
공약대로 물가를 2%대에서 안정시켰다.
기업 부채비율은 97년 392.2%에서 2007년말엔 108.0%까지 떨어졌다. 지난해에는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124.5%까지 높아졌지만 여전히 안정권에 들어가 있다.
은행권 건전성을 보여주는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 7.0%에서 최근엔 13%대까지 올랐다.
89억달러에 머물러 있던 외환보유액은 2008년 3월엔 2642억달러까지 뛰어올랐고 지난달엔 2375억달러를 기록했다.
성장률은 취임초인 98년에 -6.7%로 떨어졌고 1인당 국민소득은 6742달러로 내려앉았다. 96년 1만1380달러, 97년 1만307달러 등 2년간의 1만달러 시대어서 고꾸라졌다. 그러나 99년 10.7% 성장하며 8581달러로 1인당 국민소득을 올려놨고 IMF관리체제를 벗어난 2001년엔 1만달러대를 회복했다. 이듬해엔 1만1499만달러를 기록했다. 이를 발판으로 1만달러를 돌파한 후 6년만인 2007년에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시대를 열었다.
윤지호 한화증권 투자전략팀장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기업구조조정을 통해 기업경쟁력이 강화했고 내수를 확대시켰다”며 “이는 코스피 ‘마의 1000p’를 넘어서 견조한 상승세의 기반을 깔아놨다”며 “한국이 재평가받는 큰 변화의 출발점이었다”고 평가했다.
강현철 우리투자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외환위기를 맞아서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금융과 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혁신적으로 단행, 이후 우리나라 경제와 기업들이 외부의 충격에도 강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준규 김형선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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