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장 문화유적 한눈에 쏙'

우저서원, 고인돌 등 우리고장 문화유적 체험학습 인기

지역내일 2001-08-08
"우리고장 역사체험을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김포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됐어요. 다른 친구들도 방학 기간동안 부모님과 함께 꼭 둘러보았으면 좋겠어요"
지난달 26일 김포문화의집이 주최한 '우리고장역사순례' 체험학습에 참여한 풍무초등학교 5학년 유웅비군의 유적지 답사 소감이다.
이날 행사에 참여한 김포시내 초등학교 4·5·6학년 학생 30여명은 오전9시 문화의집에서 우리고장 유적지와 역사적인 인물들을 소개한 간단한 슬라이드를 보고, 오전 10시경 감정동에 위치한 우저서원으로 향했다. 이번 체험학습에 지도강사로 나선 유지만 전 김포문화원장은 우저서원에 도착해 낯선 유적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어린 학생들을 향해 김포에서 나고 자란 중봉 조헌 선생의 일대기와 인물됨을 알기 쉽게 설명하느라 한여름의 무더위도 잊었다.
학생들은 오후 4시까지 '마산리 고인돌'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한재당' 등 6곳을 차례로 답사하고 유적지 이름과 느낀 점을 꼼꼼히 적어 체험학습 노트를 만들었다.
김포문화의집에서는 지난해부터 여름방학 기간동안 초등학생들에게 우리고장의 역사와 문화유산 등 발자취를 돌아볼 수 있는 '우리고장 역사순례프로그램'과 자연학습프로그램을 마련해 일일 체험학습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요즘 들어 부쩍 체험학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으로 나누어 운영되는 문화의집 체험학습프로그램에 학생과 학부모의 참여 열기도 높아지는 추세다.

우리 동네 유적지 돌아보기
너무 가까이 있어 오히려 무심코 넘어가기 쉬운 우리 고장 유적지 답사하기. 여름방학이라고 늦잠자고 밤늦도록 컴퓨터 게임에만 매달리는 아이들이 있다면 단 하루 동안 일상에서 손쉽게 체험해 볼 수 있는 우리 고장 유적지를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아이들에게 교육적 효과는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김포에 대한 관심과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우저서원
김포시 감정동에 소재한 우저서원은 지방유형문화재 제10호로 중봉 조헌선생의 제사를 받들기 위해 인조 26년(1648)에 창건되어, 숙종 원년(1675)에 사액(賜額) 되었다.
조헌(趙憲, 1544-1592)은 본관이 배천이고 김포시 감정동 태생이다. 명종 22년(1567)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벼슬길에 올랐다. 그는 항상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을 정도로 학구적이고 효도가 남달랐다. 올곧은 성품으로 충성어린 상소를 많이 했고, 반면 모함도 많이 받았다. 선조 24년(1591) 일본사신이 오자 왜침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조정은 이를 외면했다. 이듬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그 해 8월에 승장 영규가 이끄는 승병과 함께 청주를 수복하고 금산싸움에서 7백 의병과 최후까지 분전하다 다함께 순절했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중봉은 의병장이기에 앞서 이율곡과 성우제의 후학으로 실학사상을 연구한 학성이다.
▷마산리 고인돌
김포시 양촌면 마산리 산 8, 87, 89번지 일대의 고인돌. 청동기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이 지석묘는 인천시 검단면의 대곡리 지석묘B군과 약 200m 떨어진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금은 인천 새날기도원에서 운유산으로 가는 비포장도로의 동쪽에 해당된다. 현재 상태가 가장 완전히 남아 있는 1호를 중심으로 서쪽에 여러개의 석재가 분포되어 있지만 도로를 넓히기 위해 파낸 토사가 위에 쌓여 있어 정확한 형태나 수량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1호 지석묘는 4매의 긴 판석을 하부구조로 하고 있는 북방식 지석묘로, 석실은 비스듬하게 무너져 내린채 내부가 노출되어 있다. 개석은 장방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지방기념물 제108호로 지정된 갑곶나루는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와 강화섬의 갑곶리 사이를 배편으로 연결하던 나루터이다. '갑곶'이라는 명칭은 고려 고종이 몽고군의 침입을 당하여 강화도로 피난갈 때 이곳이 건너편 섬과의 거리도 짧고 수심이 얕아 군사들이 갑옷을 벗어 쌓아놓고 건널 수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나루터 없이 이용되었으나 조선초(1419-1432) 박신(朴信)이 석축로를 만들어 1900년대까지도 강화도와 육지를 오가는 사람들의 중요한 통행시설로 이용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에 새로운 나루터가 생겨 옛나루터는 폐쇄되었고 해방 후 부근에 선박으로 자동차를 운반하는 나루터가 생겨 이용되다가 1970년 강화대교가 건설되면서 두 나루터 모두 페쇄 되었다. 주변의 제방설치 등 공사로 인해 원래의 시설들이 상당부분 없어지고 현재는 김포쪽 해안에 폭 12m, 길이 40m, 전면높이 1.2m의 대형 석재 약 35개가 확인되고 있으며, 강화대교 검문소 뒤편 100m 강안에 석축 일부와 화강석 암반이 간조 수위 때 갯벌위로 드러나고 있는데 노폭이 35-50m, 길이가 35m, 전면 높이 1.5m로 수면 위에 나타나는 대형석재는 15개 정도이다.
▷한재당
지방기념물 제47호로 지정된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에 위치한 한재당은 무오사화 때 28세의 젊은 나이로 화를 입은 이목(李穆, 1471-1498)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1848년에 건립된 구사당과 1974년에 건립한 신사당이 있다. 이목선생은 하성면 가금리 태생이며, 본관은 전주(全州)로 19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왕대비가 성균관에서 굿을 하자 무녀를 쫓아냈고, 윤필상의 간교함을 상소탄핵하다 공주로 유배되었다. 뒤에 풀려나 연산군 1년(1495)에 중광문과에 장원을 했고, 영안도 평사가 되었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 윤필상의 모함으로 김일손, 권오복 등과 함께 처형되었고,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당했다. 중종반정 뒤 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공주 충현서원에 제향되었고, 호는 한재(寒齋)이다. 출생지인 가금리에 사당인 한재당이 있고, 동북쪽 산자락에 묘소가 있다. (도움말 : 유지만 전 김포문화원장)
조금희 리포터 hada20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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