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15일 리만브라더스의 파산보호신청으로 시작된 미국발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곳은 다름아닌 영국이었다. 반면 같은 유럽연합(EU) 역내에 있으면서도 프랑스와 독일에서 나타난 양상은 영국과 판이했고 향후 대응방식도 크게 달랐다. 위기 후 1년이 지난 지금 유럽 각국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도 다양하다. 영국은 여전히 ‘회복이냐 아니냐’를 의심하고 있고 독일은 이 기회에 경제체질을 바꿔야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프랑스는 나름대로 괜찮은 경제지표에 힘입어 국제사회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편 옛 동구권 출신의 발트해 3국은 ‘자본주의 학습비용’을 톡톡히 치르고 있다.
영 국
금융에 의존하다 직격탄 맞다
서비스업 10명 중 1명은 금융업 종사
금리·취업률·파운드가치 역대 최저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제국이자 뉴욕과 어깨를 다투는 금융중심지로 발언권이 높았던 영국이 잔뜩 주눅들어 있다. 화폐가치는 떨어지고 실업률은 1995년 이래 최고수준으로 치솟았다. 수치상으로는 바닥을 쳤다는 신호가 나오지만 체감까지는 아직 거리가 있다.
과연 영국경제에 무엇이 잘못 됐기에 그럴까.
◆GDP 8.2%는 금융업에서 벌어 = 영국의 산업구조를 보면 왜 금융위기에 극히 취약할 수밖에 없는지 그 답이 나온다. 영국 산업의 75.9%를 서비스가 떠받들고 있으며 서비스업 종사자 10명 가운데 1명이 금융가에서 일하고 있다. 국내총생산(GDP)의 8.2%가 금융산업에서 발생한다. 또 부동산과 건축의 GDP 비중이 6.3%나 된다. 이번 금융위기가 집값폭락과 주택담보대출 부실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영국경제가 망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영국 런던의 부동산 값은 고점대비 최고 45%까지 떨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취약해진 경제체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고용지표다. 올 2분기까지 영국에서는 27만1000명이 직장을 잃어 실업률이 7.8%로 올라갔다. 전체 실업자 숫자는 240만명으로 1995년 이래 최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영란은행(BOE) 금융안정성 최고책임자인 앤디 할데인은 “대규모 대출을 일으키면서 집적된 정보를 활용하는 과정에 위험이 있었던 것”이라며 “지난 10년을 지켜봤을 때 은행이란 크다고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과도한 금융업 의존도가 결국 영국경제에 폭탄이 돼 돌아왔다는 얘기다.
◆체면구긴 파운드화 = 유로존 가입까지 거부하며 지켜냈던 자존심의 파운드화도 체면을 구기고 있다. 지난해 9월 리먼브라더스 파산 이래 달러 대비 파운드화 가치는 총 8.8% 하락한 것으로 집계됐다.
금융산업에 큰 타격을 입은 영국은 노던록 등 주요 은행들을 국유화하고 추가부실을 막기 위해 약 1조2000억파운드의 재정을 할당했다. 영국 GDP의 약 90%에 이르는 막대한 액수다. 이처럼 영국정부의 재정악화와 불황 여파로 파운드화 가치가 떨어지고 이는 파운드화 매도공세로 이어져 악순환을 야기하고 있다.
지난해말 도미니크 스트라우스 칸 IMF 총재는 영국정부가 구제금융을 신청할 가능성에 대해 “절대 없다고는 할 수 없다”며 우려를 표명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지난 5월 신용평가사 S&P도 영국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조종한 바 있다.
◆위기는 끝났는가 = 머빈 킹 영란은행(BOE) 총재는 16일 의회에 출석해 영국 경제가 2차대전 후 최악의 위기에서 서서히 빠져나오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생산 감소가 전반적으로 종착점에 도착했다”면서 “이제 매우 미미하나마 긍정적인 성장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같은 날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영란은행이 지급준비금에 대해 제공하는 금리를 마이너스(-)로 내릴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지준금리가 마이너스가 되면 시중은행은 중앙은행에 지급준비금을 예치하고도 오히려 이자를 내야한다. 그렇게라도 해서 시중에 돈을 더 풀겠다는 뜻이다. 스웨덴 중앙은행이 지난 7월 지준금리를 -0.25%로 인하한 사례도 있다.
경기회복 기미에도 불구하고 영국 은행들이 향후 몇 년간 악성부채로 인해 추가손실도 우려된다.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14일 영국 은행권이 손실만회를 위해 2008년말까지 1100억 파운드, 2009년 중반까지 1200억 파운드의 신규자금을 조달하거나 채무재조정을 했으나 영국 경제의 회복속도가 기대보다 느릴 경우 추가 손실이 최대 2500억 파운드에 이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 경우 은행권 수익성이 악화되는 것은 물론 현재 논의중인 규제강화 효과도 빛을 바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과도한 금융의존도에서 시작된 영국경제의 위기는 ‘위기를 탈출하기 전에는 비정상적인 금융산업에 메스를 가하기 어려운’ 함정에 빠져버린 모양새가 됐다.
국제금융센터 김위대 연구위원은 “저금리가 유지되고 시중은행의 유동성도 상당히 공급돼 있어 현재로서는 대형 금융기관의 부도위험이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며 “만약 영국 금융계가 위기에 빠진다면 한국은 물론 세계경제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숭호 기자 shcho@naeil.com
독 일
게르만의 저력, 계속 믿어도 되나
‘수출중심 흑자과잉’ 경제체질 개선론 제기
금융위기가 오기 전, 유럽이 경상수지 적자를 미국만의 문제라며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데에는 ‘독일효과’가 적지 않았다. 소비에 붐이 일어나고 저축률이 줄면서 각국 경상수지 적자는 GDP의 6% 수준으로까지 늘었지만 독일의 거대한 무역수지 흑자가 스페인, 독일, 그리스, 포르투갈의 적자를 메워 유로존 전체로는 괜찮아 보이게 했던 것. 2007년 기준 독일 흑자 규모는 2630억 달러로 중국의 3720억 달러에 이은 세계 2위였다.
금융위기로 세계경제가 위축되고 수요가 줄면서 독일 경제도 타격을 입었다. 고점 대비 독일 GDP도 7%가 줄었다. 하지만 중국과 독일 같은 나라들이 내수진작과 이를 통한 경상수지 불균형을 해소하지 않으면 미국이 저축을 늘리고 적자폭을 줄일 방법이란 없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한쪽이 막대한 흑자를 쌓으면 어느 곳에선가 적자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단 올해 1분기 독일 경상수지 흑자는 GDP의 3.4%로 최근 5년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으로 줄어들어 위축된 세계경제에 숨통을 틔워주긴 했다. 0에 가까웠던 재정적자도 올해 4%(GDP 대비), 내년 6%로 늘려 내수를 진작할 계획이다. 하지만 독일의 경제체질을 수출주도형에서 내수중심으로 전환하는 게 가능하지 않다는 데 문제 핵심이 있다.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정밀기계류 등 독일 제조업이 내수시장만으로는 지탱될 수가 없고 마땅히 수출설비를 늘릴 매력도 느끼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저축률은 늘고 투자는 줄어들고 있다(표 참조).
독일에서는 창업하기도 어렵다. 세계은행 2009년 조사대상 181개국 가운데 창업편의성 측면에서102위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더구나 독일은 경제위기 때 임금을 포함한 생산단가를 낮추는 방식으로 수출경쟁력을 유지해 왔다. 1970년대 브레튼우즈체제가 무너져 환율위기가 왔을 때도, 1990년대 통일 후유증에 시달릴 때도 그랬다. 상대적으로 유럽국가들의 임금수준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동안 독일 임금은 동결되다시피 했고 이 때문에 내수진작 체력을 쌓을 기회를 놓쳤다. 저임금구조로 인해 기술인력의 해외진출 유혹은 높아진 반면 저임금 국내 서비스산업 성장은 지연돼 왔다. 내수를 의도적으로 늘리려고 해서 이를 뒷받침할 마땅한 토대가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번 금융위기가 지나친 서비스업 의존구조에서 생긴 만큼 ‘수출형 제조업 대신 내수형 서비스 육성’이라는 대안을 독일사람들이 얼마나 받아들일지가 미지수다.
조숭호 기자 shcho@naeil.com
프랑스
“금융규제 강화” “ 새 GDP 모형 도입”
빠른 경기회복 힘입어 국제사회 발언권 높여
미국과 영국사람들이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에게 눈살을 찌푸리는 것은 작은 키를 숨기려는 굽높이 구두만이 아니다. 프랑스가 상대적으로 경기 하강정도가 낮았고 주요국 중 가장 빠른 회복속도를 발판으로 국제경제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표 참조).
G20 금융정상회의를 앞두고 “무분별한 금융권 보너스 체계에 칼을 대라”고 요구한 사르코지 대통령은 최근 “국내총생산(GDP) 산출기준을 바꾸라”는 요구를 새롭게 내놓았다. 14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세계는 지금 숫자에 대한 숭배에 사로잡혀 있다”며 지난해부터 노벨상 수상자인 스티글리츠 교수를 중심으로 Insee 연구소에서 제시한 새 GDP 모형 도입을 촉구했다. 경제 발전 정도를 측정할 때 GDP 중심에서 웰빙과 지속가능성으로 주안점을 옮겨야 한다는 것. 사르코지는 “사람들은 그 동안 우리(당국자)가 거짓말하고 있다고, 또 숫자가 조작됐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15일 사설에서 “지속가능성을 무시하고 자원을 낭비시켜가며 이룩한 성장률은 미래에 낮아지기 마련”이라며 새 모형에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그렇다고 기존의 GDP 모형이 ‘행복’을 측정하는 기준에게 그 자리를 모두 내줘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사실 사르코지 대통령이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사회복지수준과 긴 여가시간 등을 GDP 항목에 포함시킨 이 모형에 따르면 프랑스 GDP는 크게 올라가는 반면 미국 GDP는 내려가게 돼 있다. 새 GDP 모형만 도입해도 프랑스 성장률은 0.5%p나 올라갈 수 있다. 현재 14%p 차이나는 미국과의 GDP 격차도 절반수준으로 좁혀진다.
영·미 언론이 사르코지 대통령을 곱지 않게 보는 이유다.
프랑스는 지난달 G20 재무장관회의에 이어 이달 미국 피츠버그에서 시작되는 G20 정상회담에서도 금융권의 과도한 급여체계에 제동을 걸 예정이다. 금융위기가 ‘고위험·고수익’형 머니게임에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타당한 지적이다.
하지만 금융산업 비중이 높은 미국·영국은 프랑스 주장 자체도 못마땅하지만 사르코지 발언의 저의도 의심하고 있다. 유럽대륙의 금융기관들은 정부로부터 ‘하이브리드 채권’ 발행을 통한 자금조달이 가능하지만 미·영 금융기관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영업환경 자체가 다르다는 분석이다. 프랑스는 GDP 대비 민간부채 수준(107.9%)이 영국(211.1%), 스페인(198.1%)의 절반수준에 불과하고 가계자산 중 금융자산이 차지하는 비중도 독일·이탈리아를 밑돌아 금융위기에서 빠른 탈출이 가능했다. 하지만 GDP에서 수출비중이 낮아 본격적인 경기회복 국면에서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성장속도가 늦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때문에 주요국 정상들은 활보하는 사르코지를 보면서 ‘마지막 웃는 자가 진정 웃는 자’라며 칼을 갈고 있을 지 모른다.
조숭호 기자 shcho@naeil.com
동유럽은 아직도 자본주의에 적응중
발트해 3국, IMF 구제금융 받고도 회복 미미
평균 10% 성장에서 올해 -20% 성장으로 급락
20여년전 소비에트연방에서 독립,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 ‘귀환’한 성공사례였던 발트해3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이 금융위기 충격에서 벗어날 기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2001~2008년 연평균 7%에서 10%의 고성장을 구가했던 이들 나라는 구매력에 힘입어 지난 20년간 평균 4배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 성장세를 보여왔다. 2004년에는 유럽연합(EU) 가입도 허용됐다.
하지만 급하게 먹는 밥은 체하기 마련인가.
지난해 금융위기 이전부터 이들 3국은 부동산 투기와 과도한 해외차입으로 인해 경기과열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동산 시장에서 유동성 위기로 이어지는 거품이 터지자 고성장은 곧 급격한 경제후퇴로 바뀌었다. 리투아니아의 올 2분기 성장율은 자그마치 -20%. 1분기 성장율은 -13%였다. 라트비아(-20%), 에스토니아(-17%)도 그다지 사정이 낫지 않다. 수출은 줄고 실업률은 올라가며 정부부채는 빠르게 늘고 있다. 라트비아는 지난해 12월 국제통화기금(IMF)로부터 24억 달러를 빌리고도 부족해 올 8월 2억7800만 달러를 추가로 빌리기로 했다.
고통은 숫자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3국 공히 환율방어를 위해 공공지출을 과도하게 억제함으로써 당장의 생활이 고통받고 있다. 라트비아 수도 리가 병원에서는 외래환자는 물론 응급실에 실려온 환자조차 돌려보내는 일이 목격되고 있다.
‘환율절상(통화평가절하)’이 고전적인 대책일 수 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높아진 환율이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은 다소 높이겠지만 주요 수출대상인 서유럽국가들이 여전히 불황이어서 얼마나 구매로 이어질 지 미지수이기 때문. 높아진 환율이 얼마나 해외투자자를 끌어들일지도 확신하기 어렵다.
2013년 유로존 가입(유로화 사용)과 ‘시장경제 전환 완성’을 목표로 잰걸음을 하던 발트3국이 금융위기 충격 속에 현재 갈 길을 못 찾고 헤매고 있다.
조숭호 기자 shcho@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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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국
금융에 의존하다 직격탄 맞다
서비스업 10명 중 1명은 금융업 종사
금리·취업률·파운드가치 역대 최저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제국이자 뉴욕과 어깨를 다투는 금융중심지로 발언권이 높았던 영국이 잔뜩 주눅들어 있다. 화폐가치는 떨어지고 실업률은 1995년 이래 최고수준으로 치솟았다. 수치상으로는 바닥을 쳤다는 신호가 나오지만 체감까지는 아직 거리가 있다.
과연 영국경제에 무엇이 잘못 됐기에 그럴까.
◆GDP 8.2%는 금융업에서 벌어 = 영국의 산업구조를 보면 왜 금융위기에 극히 취약할 수밖에 없는지 그 답이 나온다. 영국 산업의 75.9%를 서비스가 떠받들고 있으며 서비스업 종사자 10명 가운데 1명이 금융가에서 일하고 있다. 국내총생산(GDP)의 8.2%가 금융산업에서 발생한다. 또 부동산과 건축의 GDP 비중이 6.3%나 된다. 이번 금융위기가 집값폭락과 주택담보대출 부실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영국경제가 망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영국 런던의 부동산 값은 고점대비 최고 45%까지 떨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취약해진 경제체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고용지표다. 올 2분기까지 영국에서는 27만1000명이 직장을 잃어 실업률이 7.8%로 올라갔다. 전체 실업자 숫자는 240만명으로 1995년 이래 최대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영란은행(BOE) 금융안정성 최고책임자인 앤디 할데인은 “대규모 대출을 일으키면서 집적된 정보를 활용하는 과정에 위험이 있었던 것”이라며 “지난 10년을 지켜봤을 때 은행이란 크다고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과도한 금융업 의존도가 결국 영국경제에 폭탄이 돼 돌아왔다는 얘기다.
◆체면구긴 파운드화 = 유로존 가입까지 거부하며 지켜냈던 자존심의 파운드화도 체면을 구기고 있다. 지난해 9월 리먼브라더스 파산 이래 달러 대비 파운드화 가치는 총 8.8% 하락한 것으로 집계됐다.
금융산업에 큰 타격을 입은 영국은 노던록 등 주요 은행들을 국유화하고 추가부실을 막기 위해 약 1조2000억파운드의 재정을 할당했다. 영국 GDP의 약 90%에 이르는 막대한 액수다. 이처럼 영국정부의 재정악화와 불황 여파로 파운드화 가치가 떨어지고 이는 파운드화 매도공세로 이어져 악순환을 야기하고 있다.
지난해말 도미니크 스트라우스 칸 IMF 총재는 영국정부가 구제금융을 신청할 가능성에 대해 “절대 없다고는 할 수 없다”며 우려를 표명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지난 5월 신용평가사 S&P도 영국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조종한 바 있다.
◆위기는 끝났는가 = 머빈 킹 영란은행(BOE) 총재는 16일 의회에 출석해 영국 경제가 2차대전 후 최악의 위기에서 서서히 빠져나오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생산 감소가 전반적으로 종착점에 도착했다”면서 “이제 매우 미미하나마 긍정적인 성장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같은 날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영란은행이 지급준비금에 대해 제공하는 금리를 마이너스(-)로 내릴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지준금리가 마이너스가 되면 시중은행은 중앙은행에 지급준비금을 예치하고도 오히려 이자를 내야한다. 그렇게라도 해서 시중에 돈을 더 풀겠다는 뜻이다. 스웨덴 중앙은행이 지난 7월 지준금리를 -0.25%로 인하한 사례도 있다.
경기회복 기미에도 불구하고 영국 은행들이 향후 몇 년간 악성부채로 인해 추가손실도 우려된다.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14일 영국 은행권이 손실만회를 위해 2008년말까지 1100억 파운드, 2009년 중반까지 1200억 파운드의 신규자금을 조달하거나 채무재조정을 했으나 영국 경제의 회복속도가 기대보다 느릴 경우 추가 손실이 최대 2500억 파운드에 이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 경우 은행권 수익성이 악화되는 것은 물론 현재 논의중인 규제강화 효과도 빛을 바랠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라 과도한 금융의존도에서 시작된 영국경제의 위기는 ‘위기를 탈출하기 전에는 비정상적인 금융산업에 메스를 가하기 어려운’ 함정에 빠져버린 모양새가 됐다.
국제금융센터 김위대 연구위원은 “저금리가 유지되고 시중은행의 유동성도 상당히 공급돼 있어 현재로서는 대형 금융기관의 부도위험이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며 “만약 영국 금융계가 위기에 빠진다면 한국은 물론 세계경제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숭호 기자 shcho@naeil.com
독 일
게르만의 저력, 계속 믿어도 되나
‘수출중심 흑자과잉’ 경제체질 개선론 제기
금융위기가 오기 전, 유럽이 경상수지 적자를 미국만의 문제라며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데에는 ‘독일효과’가 적지 않았다. 소비에 붐이 일어나고 저축률이 줄면서 각국 경상수지 적자는 GDP의 6% 수준으로까지 늘었지만 독일의 거대한 무역수지 흑자가 스페인, 독일, 그리스, 포르투갈의 적자를 메워 유로존 전체로는 괜찮아 보이게 했던 것. 2007년 기준 독일 흑자 규모는 2630억 달러로 중국의 3720억 달러에 이은 세계 2위였다.
금융위기로 세계경제가 위축되고 수요가 줄면서 독일 경제도 타격을 입었다. 고점 대비 독일 GDP도 7%가 줄었다. 하지만 중국과 독일 같은 나라들이 내수진작과 이를 통한 경상수지 불균형을 해소하지 않으면 미국이 저축을 늘리고 적자폭을 줄일 방법이란 없다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한쪽이 막대한 흑자를 쌓으면 어느 곳에선가 적자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단 올해 1분기 독일 경상수지 흑자는 GDP의 3.4%로 최근 5년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으로 줄어들어 위축된 세계경제에 숨통을 틔워주긴 했다. 0에 가까웠던 재정적자도 올해 4%(GDP 대비), 내년 6%로 늘려 내수를 진작할 계획이다. 하지만 독일의 경제체질을 수출주도형에서 내수중심으로 전환하는 게 가능하지 않다는 데 문제 핵심이 있다.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정밀기계류 등 독일 제조업이 내수시장만으로는 지탱될 수가 없고 마땅히 수출설비를 늘릴 매력도 느끼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때문에 저축률은 늘고 투자는 줄어들고 있다(표 참조).
독일에서는 창업하기도 어렵다. 세계은행 2009년 조사대상 181개국 가운데 창업편의성 측면에서102위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더구나 독일은 경제위기 때 임금을 포함한 생산단가를 낮추는 방식으로 수출경쟁력을 유지해 왔다. 1970년대 브레튼우즈체제가 무너져 환율위기가 왔을 때도, 1990년대 통일 후유증에 시달릴 때도 그랬다. 상대적으로 유럽국가들의 임금수준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동안 독일 임금은 동결되다시피 했고 이 때문에 내수진작 체력을 쌓을 기회를 놓쳤다. 저임금구조로 인해 기술인력의 해외진출 유혹은 높아진 반면 저임금 국내 서비스산업 성장은 지연돼 왔다. 내수를 의도적으로 늘리려고 해서 이를 뒷받침할 마땅한 토대가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번 금융위기가 지나친 서비스업 의존구조에서 생긴 만큼 ‘수출형 제조업 대신 내수형 서비스 육성’이라는 대안을 독일사람들이 얼마나 받아들일지가 미지수다.
조숭호 기자 shcho@naeil.com
프랑스
“금융규제 강화” “ 새 GDP 모형 도입”
빠른 경기회복 힘입어 국제사회 발언권 높여
미국과 영국사람들이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에게 눈살을 찌푸리는 것은 작은 키를 숨기려는 굽높이 구두만이 아니다. 프랑스가 상대적으로 경기 하강정도가 낮았고 주요국 중 가장 빠른 회복속도를 발판으로 국제경제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표 참조).
G20 금융정상회의를 앞두고 “무분별한 금융권 보너스 체계에 칼을 대라”고 요구한 사르코지 대통령은 최근 “국내총생산(GDP) 산출기준을 바꾸라”는 요구를 새롭게 내놓았다. 14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세계는 지금 숫자에 대한 숭배에 사로잡혀 있다”며 지난해부터 노벨상 수상자인 스티글리츠 교수를 중심으로 Insee 연구소에서 제시한 새 GDP 모형 도입을 촉구했다. 경제 발전 정도를 측정할 때 GDP 중심에서 웰빙과 지속가능성으로 주안점을 옮겨야 한다는 것. 사르코지는 “사람들은 그 동안 우리(당국자)가 거짓말하고 있다고, 또 숫자가 조작됐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15일 사설에서 “지속가능성을 무시하고 자원을 낭비시켜가며 이룩한 성장률은 미래에 낮아지기 마련”이라며 새 모형에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그렇다고 기존의 GDP 모형이 ‘행복’을 측정하는 기준에게 그 자리를 모두 내줘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사실 사르코지 대통령이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사회복지수준과 긴 여가시간 등을 GDP 항목에 포함시킨 이 모형에 따르면 프랑스 GDP는 크게 올라가는 반면 미국 GDP는 내려가게 돼 있다. 새 GDP 모형만 도입해도 프랑스 성장률은 0.5%p나 올라갈 수 있다. 현재 14%p 차이나는 미국과의 GDP 격차도 절반수준으로 좁혀진다.
영·미 언론이 사르코지 대통령을 곱지 않게 보는 이유다.
프랑스는 지난달 G20 재무장관회의에 이어 이달 미국 피츠버그에서 시작되는 G20 정상회담에서도 금융권의 과도한 급여체계에 제동을 걸 예정이다. 금융위기가 ‘고위험·고수익’형 머니게임에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타당한 지적이다.
하지만 금융산업 비중이 높은 미국·영국은 프랑스 주장 자체도 못마땅하지만 사르코지 발언의 저의도 의심하고 있다. 유럽대륙의 금융기관들은 정부로부터 ‘하이브리드 채권’ 발행을 통한 자금조달이 가능하지만 미·영 금융기관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영업환경 자체가 다르다는 분석이다. 프랑스는 GDP 대비 민간부채 수준(107.9%)이 영국(211.1%), 스페인(198.1%)의 절반수준에 불과하고 가계자산 중 금융자산이 차지하는 비중도 독일·이탈리아를 밑돌아 금융위기에서 빠른 탈출이 가능했다. 하지만 GDP에서 수출비중이 낮아 본격적인 경기회복 국면에서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성장속도가 늦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때문에 주요국 정상들은 활보하는 사르코지를 보면서 ‘마지막 웃는 자가 진정 웃는 자’라며 칼을 갈고 있을 지 모른다.
조숭호 기자 shcho@naeil.com
동유럽은 아직도 자본주의에 적응중
발트해 3국, IMF 구제금융 받고도 회복 미미
평균 10% 성장에서 올해 -20% 성장으로 급락
20여년전 소비에트연방에서 독립,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로 ‘귀환’한 성공사례였던 발트해3국(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이 금융위기 충격에서 벗어날 기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2001~2008년 연평균 7%에서 10%의 고성장을 구가했던 이들 나라는 구매력에 힘입어 지난 20년간 평균 4배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 성장세를 보여왔다. 2004년에는 유럽연합(EU) 가입도 허용됐다.
하지만 급하게 먹는 밥은 체하기 마련인가.
지난해 금융위기 이전부터 이들 3국은 부동산 투기와 과도한 해외차입으로 인해 경기과열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동산 시장에서 유동성 위기로 이어지는 거품이 터지자 고성장은 곧 급격한 경제후퇴로 바뀌었다. 리투아니아의 올 2분기 성장율은 자그마치 -20%. 1분기 성장율은 -13%였다. 라트비아(-20%), 에스토니아(-17%)도 그다지 사정이 낫지 않다. 수출은 줄고 실업률은 올라가며 정부부채는 빠르게 늘고 있다. 라트비아는 지난해 12월 국제통화기금(IMF)로부터 24억 달러를 빌리고도 부족해 올 8월 2억7800만 달러를 추가로 빌리기로 했다.
고통은 숫자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3국 공히 환율방어를 위해 공공지출을 과도하게 억제함으로써 당장의 생활이 고통받고 있다. 라트비아 수도 리가 병원에서는 외래환자는 물론 응급실에 실려온 환자조차 돌려보내는 일이 목격되고 있다.
‘환율절상(통화평가절하)’이 고전적인 대책일 수 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다.
높아진 환율이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은 다소 높이겠지만 주요 수출대상인 서유럽국가들이 여전히 불황이어서 얼마나 구매로 이어질 지 미지수이기 때문. 높아진 환율이 얼마나 해외투자자를 끌어들일지도 확신하기 어렵다.
2013년 유로존 가입(유로화 사용)과 ‘시장경제 전환 완성’을 목표로 잰걸음을 하던 발트3국이 금융위기 충격 속에 현재 갈 길을 못 찾고 헤매고 있다.
조숭호 기자 shcho@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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