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 무량수전에 서서 백두대간을 보자
“장엄한 자연과 인공의 건축물이 조화의 극치를 이룬 원융(圓融)의 세계.”
한국화가 이호신씨는 부석사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원융(圓融)’은 불교 용어로 일체 제법의 사리가 골고루 융통되어 가장 뛰어남을 뜻한다. 도
대체 부석사가 어떤 절집이길래 몇해째 현지 답사와 사생을 통해 우리나라 가람의 풍광과 진경(眞
景)을 그리고 있는 이 화백이 이렇게 평가하는 것일까.
부석사는 백두대간 선달산(1236m)에서 뻗어 내린 봉황산(818m) 자락에 자리한다. 봉황산 서쪽으
로는 소백산―죽령―속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동쪽으로는 옥적산―문수산―천등산 줄기가
달려간다.
삼국통일 직후에 창건된 화엄종찰 000
이 두 산줄기 사이에 위치한 부석사는 크고 작은 산들이 머리를 조아린 듯, 사방으로 넓게 트인
시야를 확보하고 있다. 또 멀리 산 아래에서부터 사찰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 화엄종의 종찰로서 웅
장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경주 토함산에서 불국사와 석굴암이 통일신라의 독창적 예술세계를 빚어내고 있을 무렵, 전국각
지의 이름난 산에는 다양한 모습의 사찰들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왜 절이 도시를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갔을까. 여기에는 큰산을 신령스러운 곳으로 생각하는 우리 민족 특유의 산악숭배사상과 여러
가지 종교적 이념이 작용하고 있었다.
자장이 창건한 통도사, 진표가 창건을 주도한 금산사와 법주사는 중국 유학승들이 가져온 석가
모니의 진신사리와 옷가지 등을 신령한 산에 모시고 절을 지은 예이다. 의상이 창건한 낙산사는 관
음이 머물고 계신 곳에 절을 세운 경우인데, 이는 당시 관음신앙이 유행했음을 반증한다.
특히 의상이 중국에서 가져온 화엄사상의 성행은 사찰이 산간에 확산된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화엄 사찰은 그 배치나 건물구성이 도시형(평지형) 사찰과는 전혀 달랐다. 산세에 따라 건물을 배치
함으로써 회랑으로 둘러싸인 쌍탑식 가람배치에서 벗어난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갔던 것이다.
당나라 침략 앞두고 서둘러 귀국 000
의상은 백제가 멸망한 후인 661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10년 전 의상은 현장법사의 귀국소식
을 듣고 원효와 함께 중국으로 떠났으나 고구려 순라군에게 잡혀 실패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이번
에는 당나라 사신이 돌아가는 배를 탔다.
그런데 중국행(行)에 성공한 의상은 현장법사가 아니라 지엄(智儼)을 찾았다. 지엄은 중국 화엄
종의 제2조(祖)로 화엄사상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당시 중국은 수나라의 강권에 의한 통일이 무
너지고 당나라의 이념통치가 확립되던 때였다. 광활한 국토에 다양한 민족, 여러가지 신앙이 뒤엉킨
통일중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강력한 이념적 통일이 필요했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있거나 일어나는 법이 없다.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 … 화엄의 이런 가르침은
서로 대립하고 항쟁을 거듭하는 국가와 사회를 정화하고, 사람들의 대립도 지양시켜 마음을 통일하
게 한다. 이는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같은 전제적인 통일국가의 정신적 뒷받침이 되었다.
― 이기영. <화엄사상>.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의상은 명실상부한 지엄의 수제자였다. 그는 중국 화엄학의 3대조로 일컬어지는 법장 ― 측천무
후를 도와 당나라의 이념체계를 세운 승려 ― 의 선배였으며 38세에서 44세에 이르는 중요한 시기
8년 동안 지엄으로부터 《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배웠다.
그 사이 삼국이 통일되고(668) 당과 통일신라의 7년 전쟁이 예고되고 있었다. 이 전쟁이 터지기
직전, 의상은 서둘러 신라로 돌아온다. 《삼국유사》는 “의상이 당나라 고종의 신라 침략을 본국에
알리기 위해 서둘러 귀국했다”고 기록한다.
부석사의 창건은 신라 문무왕 16년(676),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의 일이다. 당시 문무왕은
의상대사로 하여금 화엄종의 근본도량으로 부석사를 창건하게 하고, 그 북쪽에 나생군(삼천당)이라
는 군단을 조직하여 배치했다.
같은 시기에 백두대간을 축으로 남쪽과 북쪽에 절과 군대를 신설한 것은 통일 직후 당나라 침략
군에 대한 적극적인 방비책이었다. 《삼국사기》는 이 지역을 신라와 고구려의 영토 쟁탈전이 가장
심했던 군사적 요충지로 기록한다. 아직 비포장으로 남아 있는 부석리―마구령―주막거리―고치령
(경북·충북 경계)―영춘(온달성 일대) 고갯길은 당시 경주에서 한강 유역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통
로 가운데 하나였다.
안동지방에만 있는 중국식 전탑 000
의상은 당시 신라의 문무왕과 직접 교류할 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가 왜 서
라벌 장안이 아닌 태백산 쪽 변방에 절을 짓고 화엄의 가르침을 펼쳐나갔을까.
“그때 신라의 기득권들은 의상의 서라벌 입성을 반대했다. 그러자 의상은 영남이 한눈에 내려
다보이는 태백산 줄기 봉황산 기슭에 ‘해동화엄종찰’ 부석사를 창건했다.”
안동대 국학부 이효걸 교수는 “결국 의상은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화엄사상의 새로운 문화지대
를 만들어 경주로 입성하게 된다. 이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안동지방에만 집중적으로 세워진 중국식
전탑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의상은 비록 유학파였지만 당시 국내에서 활동하던 원효의 ‘정토사상’을 토대로 화엄사상을
펼쳐나갔다. 화엄사상은 대중들이 인식하기에 무척 어려운 우주론적 인식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이 땅이 곧 정토’라는 원효의 가르침은 대중적인 이해가 빠르다. 의상은 원효의 정토사상을 통해
대중들을 화엄의 세계로 이끌어낸 위대한 스승이었다.
부석사는 이런 그의 사상적 특징 ― 중국식 화엄종이 아닌 우리식 화엄종 ― 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찰이다. 이효걸 교수는 △《관무량수경》의 ‘3배9품’ 이론을 적용한 진입로 층계 구성 △주전
에 비로자나불이 아닌 아미타불을 모신 점 등을 들어 “화엄종찰인 부석사가 사실은 가장 완벽한
정토종 사찰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고 분석한다.
부석사 무량수전 아미타여래(무량수불)는 좌우에 아무런 협시보살 없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서쪽에 앉아 있는 아미타여래에게 경배하는 사람들은 자연히 그 뒤에 있는 소백산 비로봉을 향해
절을 하게 된다. 비로봉은 곧 비로자나여래를 뜻한다. 이는 아미타여래와 비로자나여래를 동일시했
던 의상의 신라식 화엄사상을 잘 보여준다.
석축과 축의 굴절로 변화무쌍한 구성 000
창건 이래 몇차례 외침과 화재를 겪었지만 부석사는 원래의 가람 배치 형식을 비교적 잘 간직하
고 있는 절이다.
수십 편의 학위논문에서 다루고 있을 만큼 부석사의 가람 배치는 아주 짜임새 있고 과학적이다.
건축학을 전공한 이들은 부석사를 “지형의 변화를 이용한 석축과 축의 굴절을 통해 전체적으로 변
화무쌍한, 드라마틱한 구성을 이루고 있는 사찰”이라고 평가한다.
부석리에서 일주문으로 들어가 천왕문―범종각―안양루를 거쳐 무량수전, 다시 조사당과 웅진
전까지 가는 길을 천천히 올라가 보자. 서둘러 올라가면 힘만 들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는 흙 바닥에 넓은 자연석이 깔린 비탈길이다. 은행잎이 떨어질 무렵 이
길은 온통 노란 양탄자를 깔아놓은 샛노란 은행잎으로 뒤덮힌다.
천왕문을 지나면 1300년이 넘은 장대한 석축이 있고 이 석축을 오르면 종무소 종각 범종각 등의
당우(堂宇)가 나타난다. 길은 이제 정연한 돌축대와 돌계단으로 이루어진 인공의 길이다. 앞은 팔작
지붕이지만 뒤는 맞배지붕인 범종각 누(樓)를 통과하면 또 하나의 석축이 나타난다.
두번째 석축을 오르면 길은 왼쪽으로 약간 꺾이며 정면으로 안양루, 좌우로는 취현암과 응향각
이 보이는 부석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을 연출한다. 안양루 뒤로 세번째 석축이 있고 누 밑으로
통과하면서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 무량수전이 차츰차츰 뚜렷하게 나타난다. 단아한 석등 하나만
놓인 무량수전 앞마당은 흙바닥이다.
무량수전 위에서 해질녘을 기다린다 000
무량수전에서 오른쪽(동쪽)으로 올라가면 조사당과 자인당, 웅진전에 이르는데, 이 길은 다시
산길이다.
흙을 밟으며 오르는 이 길은 자연과 하나가 되는 묘한 여운을 남긴다. 다시 내려와 무량수전 언
덕 위에 있는 삼층석탑 옆에 서면 안양루와 범종루 뒤로 국망봉―비로봉(소백산)―연화봉―죽령―
도솔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연봉들이 호위하듯 펼쳐진다.
부석사의 참맛을 아는 이들은 오후 무렵 이 길을 오른다. 그리고 삼층석탑 옆에서 해질녘을 기다
린다. 안양루 뒤로 소백산 비로봉에 저녁 해가 걸릴 때, 부석사와 백두대간의 만남은 비로소 완성된
다.
부석사=글·사진 남준기 기자 jknam@naeil.com
화엄사상>
“장엄한 자연과 인공의 건축물이 조화의 극치를 이룬 원융(圓融)의 세계.”
한국화가 이호신씨는 부석사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원융(圓融)’은 불교 용어로 일체 제법의 사리가 골고루 융통되어 가장 뛰어남을 뜻한다. 도
대체 부석사가 어떤 절집이길래 몇해째 현지 답사와 사생을 통해 우리나라 가람의 풍광과 진경(眞
景)을 그리고 있는 이 화백이 이렇게 평가하는 것일까.
부석사는 백두대간 선달산(1236m)에서 뻗어 내린 봉황산(818m) 자락에 자리한다. 봉황산 서쪽으
로는 소백산―죽령―속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동쪽으로는 옥적산―문수산―천등산 줄기가
달려간다.
삼국통일 직후에 창건된 화엄종찰 000
이 두 산줄기 사이에 위치한 부석사는 크고 작은 산들이 머리를 조아린 듯, 사방으로 넓게 트인
시야를 확보하고 있다. 또 멀리 산 아래에서부터 사찰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 화엄종의 종찰로서 웅
장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경주 토함산에서 불국사와 석굴암이 통일신라의 독창적 예술세계를 빚어내고 있을 무렵, 전국각
지의 이름난 산에는 다양한 모습의 사찰들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왜 절이 도시를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갔을까. 여기에는 큰산을 신령스러운 곳으로 생각하는 우리 민족 특유의 산악숭배사상과 여러
가지 종교적 이념이 작용하고 있었다.
자장이 창건한 통도사, 진표가 창건을 주도한 금산사와 법주사는 중국 유학승들이 가져온 석가
모니의 진신사리와 옷가지 등을 신령한 산에 모시고 절을 지은 예이다. 의상이 창건한 낙산사는 관
음이 머물고 계신 곳에 절을 세운 경우인데, 이는 당시 관음신앙이 유행했음을 반증한다.
특히 의상이 중국에서 가져온 화엄사상의 성행은 사찰이 산간에 확산된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화엄 사찰은 그 배치나 건물구성이 도시형(평지형) 사찰과는 전혀 달랐다. 산세에 따라 건물을 배치
함으로써 회랑으로 둘러싸인 쌍탑식 가람배치에서 벗어난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갔던 것이다.
당나라 침략 앞두고 서둘러 귀국 000
의상은 백제가 멸망한 후인 661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10년 전 의상은 현장법사의 귀국소식
을 듣고 원효와 함께 중국으로 떠났으나 고구려 순라군에게 잡혀 실패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이번
에는 당나라 사신이 돌아가는 배를 탔다.
그런데 중국행(行)에 성공한 의상은 현장법사가 아니라 지엄(智儼)을 찾았다. 지엄은 중국 화엄
종의 제2조(祖)로 화엄사상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당시 중국은 수나라의 강권에 의한 통일이 무
너지고 당나라의 이념통치가 확립되던 때였다. 광활한 국토에 다양한 민족, 여러가지 신앙이 뒤엉킨
통일중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강력한 이념적 통일이 필요했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있거나 일어나는 법이 없다.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 … 화엄의 이런 가르침은
서로 대립하고 항쟁을 거듭하는 국가와 사회를 정화하고, 사람들의 대립도 지양시켜 마음을 통일하
게 한다. 이는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같은 전제적인 통일국가의 정신적 뒷받침이 되었다.
― 이기영. <화엄사상>.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의상은 명실상부한 지엄의 수제자였다. 그는 중국 화엄학의 3대조로 일컬어지는 법장 ― 측천무
후를 도와 당나라의 이념체계를 세운 승려 ― 의 선배였으며 38세에서 44세에 이르는 중요한 시기
8년 동안 지엄으로부터 《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배웠다.
그 사이 삼국이 통일되고(668) 당과 통일신라의 7년 전쟁이 예고되고 있었다. 이 전쟁이 터지기
직전, 의상은 서둘러 신라로 돌아온다. 《삼국유사》는 “의상이 당나라 고종의 신라 침략을 본국에
알리기 위해 서둘러 귀국했다”고 기록한다.
부석사의 창건은 신라 문무왕 16년(676),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의 일이다. 당시 문무왕은
의상대사로 하여금 화엄종의 근본도량으로 부석사를 창건하게 하고, 그 북쪽에 나생군(삼천당)이라
는 군단을 조직하여 배치했다.
같은 시기에 백두대간을 축으로 남쪽과 북쪽에 절과 군대를 신설한 것은 통일 직후 당나라 침략
군에 대한 적극적인 방비책이었다. 《삼국사기》는 이 지역을 신라와 고구려의 영토 쟁탈전이 가장
심했던 군사적 요충지로 기록한다. 아직 비포장으로 남아 있는 부석리―마구령―주막거리―고치령
(경북·충북 경계)―영춘(온달성 일대) 고갯길은 당시 경주에서 한강 유역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통
로 가운데 하나였다.
안동지방에만 있는 중국식 전탑 000
의상은 당시 신라의 문무왕과 직접 교류할 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가 왜 서
라벌 장안이 아닌 태백산 쪽 변방에 절을 짓고 화엄의 가르침을 펼쳐나갔을까.
“그때 신라의 기득권들은 의상의 서라벌 입성을 반대했다. 그러자 의상은 영남이 한눈에 내려
다보이는 태백산 줄기 봉황산 기슭에 ‘해동화엄종찰’ 부석사를 창건했다.”
안동대 국학부 이효걸 교수는 “결국 의상은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화엄사상의 새로운 문화지대
를 만들어 경주로 입성하게 된다. 이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안동지방에만 집중적으로 세워진 중국식
전탑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의상은 비록 유학파였지만 당시 국내에서 활동하던 원효의 ‘정토사상’을 토대로 화엄사상을
펼쳐나갔다. 화엄사상은 대중들이 인식하기에 무척 어려운 우주론적 인식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이 땅이 곧 정토’라는 원효의 가르침은 대중적인 이해가 빠르다. 의상은 원효의 정토사상을 통해
대중들을 화엄의 세계로 이끌어낸 위대한 스승이었다.
부석사는 이런 그의 사상적 특징 ― 중국식 화엄종이 아닌 우리식 화엄종 ― 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찰이다. 이효걸 교수는 △《관무량수경》의 ‘3배9품’ 이론을 적용한 진입로 층계 구성 △주전
에 비로자나불이 아닌 아미타불을 모신 점 등을 들어 “화엄종찰인 부석사가 사실은 가장 완벽한
정토종 사찰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고 분석한다.
부석사 무량수전 아미타여래(무량수불)는 좌우에 아무런 협시보살 없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서쪽에 앉아 있는 아미타여래에게 경배하는 사람들은 자연히 그 뒤에 있는 소백산 비로봉을 향해
절을 하게 된다. 비로봉은 곧 비로자나여래를 뜻한다. 이는 아미타여래와 비로자나여래를 동일시했
던 의상의 신라식 화엄사상을 잘 보여준다.
석축과 축의 굴절로 변화무쌍한 구성 000
창건 이래 몇차례 외침과 화재를 겪었지만 부석사는 원래의 가람 배치 형식을 비교적 잘 간직하
고 있는 절이다.
수십 편의 학위논문에서 다루고 있을 만큼 부석사의 가람 배치는 아주 짜임새 있고 과학적이다.
건축학을 전공한 이들은 부석사를 “지형의 변화를 이용한 석축과 축의 굴절을 통해 전체적으로 변
화무쌍한, 드라마틱한 구성을 이루고 있는 사찰”이라고 평가한다.
부석리에서 일주문으로 들어가 천왕문―범종각―안양루를 거쳐 무량수전, 다시 조사당과 웅진
전까지 가는 길을 천천히 올라가 보자. 서둘러 올라가면 힘만 들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는 흙 바닥에 넓은 자연석이 깔린 비탈길이다. 은행잎이 떨어질 무렵 이
길은 온통 노란 양탄자를 깔아놓은 샛노란 은행잎으로 뒤덮힌다.
천왕문을 지나면 1300년이 넘은 장대한 석축이 있고 이 석축을 오르면 종무소 종각 범종각 등의
당우(堂宇)가 나타난다. 길은 이제 정연한 돌축대와 돌계단으로 이루어진 인공의 길이다. 앞은 팔작
지붕이지만 뒤는 맞배지붕인 범종각 누(樓)를 통과하면 또 하나의 석축이 나타난다.
두번째 석축을 오르면 길은 왼쪽으로 약간 꺾이며 정면으로 안양루, 좌우로는 취현암과 응향각
이 보이는 부석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을 연출한다. 안양루 뒤로 세번째 석축이 있고 누 밑으로
통과하면서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 무량수전이 차츰차츰 뚜렷하게 나타난다. 단아한 석등 하나만
놓인 무량수전 앞마당은 흙바닥이다.
무량수전 위에서 해질녘을 기다린다 000
무량수전에서 오른쪽(동쪽)으로 올라가면 조사당과 자인당, 웅진전에 이르는데, 이 길은 다시
산길이다.
흙을 밟으며 오르는 이 길은 자연과 하나가 되는 묘한 여운을 남긴다. 다시 내려와 무량수전 언
덕 위에 있는 삼층석탑 옆에 서면 안양루와 범종루 뒤로 국망봉―비로봉(소백산)―연화봉―죽령―
도솔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연봉들이 호위하듯 펼쳐진다.
부석사의 참맛을 아는 이들은 오후 무렵 이 길을 오른다. 그리고 삼층석탑 옆에서 해질녘을 기다
린다. 안양루 뒤로 소백산 비로봉에 저녁 해가 걸릴 때, 부석사와 백두대간의 만남은 비로소 완성된
다.
부석사=글·사진 남준기 기자 jknam@naeil.com
화엄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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