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대통령’의 아름다운 퇴장
차미례 (언론인. 번역가. 전 문화일보문화부장)
이봉주 선수가 21일 대전에서 제 90회 전국체육대회를 마치고 은퇴했다. 1990년 10월 전국체육대회에서 첫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지 19년만에 같은 대회에서 우승으로 아름다운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이 40세의 노장 선수는 생애 41번째 마라톤 풀코스를 2시간 15분 25초의 좋은 기록으로 완주하는 멋진 모습을 보였다. 19년간 달린 국내외 대회 공식 완주 총거리만도 1730km. 매주 수백 킬로미터의 연습량을 소화한 선수생활의 총 주행거리까지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타고난 조건도 별로 좋지 않은데다 짝발 때문에 피를 흘리며 남달리 고통스럽게 달려온 그다.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 2001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위업이다. 오직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 초인적 인내심과 두뇌싸움으로 ‘ 자기만의 레이스’를 펼쳐온 결과다.
나는 2001년 4월 그가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보스턴 마라톤 105회 대회를 제패하던 광경을 잊을 수 없다. 그 날 새벽 한국에서 몇 년씩의 힘든 연습 끝에 모든 마라토너들의 꿈인 보스턴 마라톤 출전자격을 따내 보스턴까지 날아온 25명의 마스터스(일반인선수)들은 출발점 홉킨튼에서 추위에 떨고 있었다. 대부분 40~50대의 이들은 교통 통제 때문에 출발시간인 낮 12시까지 6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초인적 인내심으로 펼친 레이스
그런데 오전 11시쯤 이들 앞에 나타난 이봉주 선수의 표정없는 얼굴이 기쁨과 놀라움으로 가득찼다. 한국인들의 출전이 간혹 있긴 했지만 25명이나 대거 출전한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봉주 선수는 한국 교민과 달림이들에게 국가원수 같은 감격의 환영을 받았고 함께 아마추어선수들의 구호 “힘! 힘! ”을 외친뒤 각자의 출발위치로 달려갔다. 그도 힘을 받았을 것이다.
몇시간 뒤 나는 코플리 광장의 결승선에 서서 이봉주 선수가 1위로 골인하는 것을 보았다. 대회날 아침까지도 케냐 선수들만 계속 소개하던 미국의 메이저 방송들은 중계 후반에야 이봉주 선수에게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 선수의 마지막 스퍼트와 역주, 골인 장면을 대대적으로 방송한 건 이미 연도를 메운 50여만명의 함성과 환호가 있은 뒤였다. 그는 땀에 흠뻑 젖은 채 별로 지친 기색도 없이 월계관을 쓰고 제왕처럼 의연하게 전세계 언론의 인터뷰 세례를 받고 있었다. 본부석 뒤편 보일스톤 거리에선 뒤늦게 한국인 완주자들이 골인한 뒤 이봉주의 우승 사실을 알고 감격의 만세를 불렀다. 50대의 정형외과의, 전직 차관, 40대 포철직원들, 문경의 자영상인, 항공정비사, 보험회사 직원, 뉴욕의 재미동포 할 것 없이 초면인데도 서로 젖은 몸을 얼싸안고 이봉주를 향해 환호하는 모습에서 나는 국민 단합의 한 표본을 보았다.
마라토너들은 한결같이 “마라톤은 노력한 결과가 그대로 나오는 정직한 운동”이라고 말한다. 꼼수가 없다. 이번 은퇴 보도후 시청자들에게 ‘이봉주 선수에게 한마디’를 주문한 방송사 프로그램에 ‘마라톤 대통령’ ‘지도자’ 호칭이 쏟아진 것도 무리가 아니다. 조금만 인기가 높으면 ‘국민’을 붙이는 바람에 ‘국민 고등어 ’까지 나오는 판이지만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는 진짜다. 인생의 반환점에서 아름답게 퇴장했고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묵묵히 달리는 성실성
동갑인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가 영웅인 건 타고난 천재성에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비롯해 단 8차례의 완주로 금메달 3개의 위업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은퇴하고 감독과 강사로 인기인이 된 황영조와 달리 이봉주는 ‘달리 대안이 없는’ 한국 마라톤계를 위해 끝없이 신발끈을 조이고 주로에 나서야 했다. 마라토너들의 단합과 우정을 들어 ‘차라리 마라톤 당을 만들면 나라가 잘될것’이라는 농담도 있다. 정말 이봉주를 대통령후보로 밀면 어떻게 될까. 급발진 급제동 급선회에 능한 정치인들 틈에서 앞만 보고 묵묵히 달리는 그 성실성만으로 잘 해낼 수 있을까. 어쩌면 소통과 연대의 마라톤 정신이 한줄기 맑은 샘물처럼 혼탁한 정치 풍토에 신선한 충격을 주어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화제만발이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차미례 (언론인. 번역가. 전 문화일보문화부장)
이봉주 선수가 21일 대전에서 제 90회 전국체육대회를 마치고 은퇴했다. 1990년 10월 전국체육대회에서 첫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지 19년만에 같은 대회에서 우승으로 아름다운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이 40세의 노장 선수는 생애 41번째 마라톤 풀코스를 2시간 15분 25초의 좋은 기록으로 완주하는 멋진 모습을 보였다. 19년간 달린 국내외 대회 공식 완주 총거리만도 1730km. 매주 수백 킬로미터의 연습량을 소화한 선수생활의 총 주행거리까지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타고난 조건도 별로 좋지 않은데다 짝발 때문에 피를 흘리며 남달리 고통스럽게 달려온 그다. 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 2001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위업이다. 오직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 초인적 인내심과 두뇌싸움으로 ‘ 자기만의 레이스’를 펼쳐온 결과다.
나는 2001년 4월 그가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보스턴 마라톤 105회 대회를 제패하던 광경을 잊을 수 없다. 그 날 새벽 한국에서 몇 년씩의 힘든 연습 끝에 모든 마라토너들의 꿈인 보스턴 마라톤 출전자격을 따내 보스턴까지 날아온 25명의 마스터스(일반인선수)들은 출발점 홉킨튼에서 추위에 떨고 있었다. 대부분 40~50대의 이들은 교통 통제 때문에 출발시간인 낮 12시까지 6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초인적 인내심으로 펼친 레이스
그런데 오전 11시쯤 이들 앞에 나타난 이봉주 선수의 표정없는 얼굴이 기쁨과 놀라움으로 가득찼다. 한국인들의 출전이 간혹 있긴 했지만 25명이나 대거 출전한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봉주 선수는 한국 교민과 달림이들에게 국가원수 같은 감격의 환영을 받았고 함께 아마추어선수들의 구호 “힘! 힘! ”을 외친뒤 각자의 출발위치로 달려갔다. 그도 힘을 받았을 것이다.
몇시간 뒤 나는 코플리 광장의 결승선에 서서 이봉주 선수가 1위로 골인하는 것을 보았다. 대회날 아침까지도 케냐 선수들만 계속 소개하던 미국의 메이저 방송들은 중계 후반에야 이봉주 선수에게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이 선수의 마지막 스퍼트와 역주, 골인 장면을 대대적으로 방송한 건 이미 연도를 메운 50여만명의 함성과 환호가 있은 뒤였다. 그는 땀에 흠뻑 젖은 채 별로 지친 기색도 없이 월계관을 쓰고 제왕처럼 의연하게 전세계 언론의 인터뷰 세례를 받고 있었다. 본부석 뒤편 보일스톤 거리에선 뒤늦게 한국인 완주자들이 골인한 뒤 이봉주의 우승 사실을 알고 감격의 만세를 불렀다. 50대의 정형외과의, 전직 차관, 40대 포철직원들, 문경의 자영상인, 항공정비사, 보험회사 직원, 뉴욕의 재미동포 할 것 없이 초면인데도 서로 젖은 몸을 얼싸안고 이봉주를 향해 환호하는 모습에서 나는 국민 단합의 한 표본을 보았다.
마라토너들은 한결같이 “마라톤은 노력한 결과가 그대로 나오는 정직한 운동”이라고 말한다. 꼼수가 없다. 이번 은퇴 보도후 시청자들에게 ‘이봉주 선수에게 한마디’를 주문한 방송사 프로그램에 ‘마라톤 대통령’ ‘지도자’ 호칭이 쏟아진 것도 무리가 아니다. 조금만 인기가 높으면 ‘국민’을 붙이는 바람에 ‘국민 고등어 ’까지 나오는 판이지만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는 진짜다. 인생의 반환점에서 아름답게 퇴장했고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묵묵히 달리는 성실성
동갑인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가 영웅인 건 타고난 천재성에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비롯해 단 8차례의 완주로 금메달 3개의 위업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은퇴하고 감독과 강사로 인기인이 된 황영조와 달리 이봉주는 ‘달리 대안이 없는’ 한국 마라톤계를 위해 끝없이 신발끈을 조이고 주로에 나서야 했다. 마라토너들의 단합과 우정을 들어 ‘차라리 마라톤 당을 만들면 나라가 잘될것’이라는 농담도 있다. 정말 이봉주를 대통령후보로 밀면 어떻게 될까. 급발진 급제동 급선회에 능한 정치인들 틈에서 앞만 보고 묵묵히 달리는 그 성실성만으로 잘 해낼 수 있을까. 어쩌면 소통과 연대의 마라톤 정신이 한줄기 맑은 샘물처럼 혼탁한 정치 풍토에 신선한 충격을 주어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화제만발이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위 기사의 법적인 책임과 권한은 내일엘엠씨에 있습니다.
<저작권자 ©내일엘엠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