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은 아련한 동경이다. 낭만과 신화가 가득 쟁여져 있는 곳이다. 섬마을 선생님은 왠지 달콤한 로맨스와 깊은 사연을 지닌 주인공 일 것만 같다. 그래서 섬마을 유람에 나섰다. 섬마을 선생님들의 훈훈한 휴먼스토리와 낙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지면에 담아낼 작정이다. 서해의 백령·연평군도에서 남해 한려수도를 돌아 동해의 울릉도까지….
그가 포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어선 네 척이 나란히 정렬해 있는 조그마한 선착장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스포츠형 짧은 머리에 땅딸막한 체구, 옅은 갈색 톤을 입힌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중년남자다. 마치 객지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동기간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섬으로 접근하는 배 쪽을 향해 목을 빼고 기웃거린다. 섬에 내리는 손님은 나 혼자뿐이었다. 그가 다가와 손을 내밀며 인사를 한다.
전남 신안군 서소우이도에 있는 도초초등학교 서리분교장인 홍준호(57) 선생님이다. 목포교대 10회 출신으로 올해 교직 경력 31년째인 베테랑이다.
앞장서서 걷는 선생님의 뒤를 따르며 동네를 둘러본다. 선착장을 중심으로 20여 채의 집들이 들어서 있다. 그나마 마당엔 잡초들이 무성하고 서까래가 내려앉은 빈집들이 대부분이다. 이보다 40배나 더 큰 우이도 본 섬에도 없는 학교가 어떻게 이곳에는 남아 있는 걸까.
“한때는 꽃게 잡이 때문에 부자들이 많이 나온다고 떠들썩했던 마을입니다. 지금도 꽃게, 새우 잡이를 하는 어민들이 섬을 지키고 있어요. 그래봤자 이젠 모두 여섯 집만 남았습니다.”
학교는 마을이 들어서 있는 언덕의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동네 어린이 놀이터 넓이만한 운동장과 개인 주택 규모만한 교사로 이루어진 학교다. 그래도 교사는 분홍색 페인트로 예쁘게 단장하고 있었다. 교사 앞 낡은 시멘트 표지석이 눈길을 끌었다.
‘박정희대통령 하사교사. 착공 1967. 8. 25, 준공 1967. 10. 10. 시공자 삼아건설 이복헌.’
피식 웃음이 나온다. 학교 하나를 짓는 데 어떻게 뚝딱 한 달 반 만에 지었을까. 게다가 국민세금으로 지은 학교를 어떻게 박정희대통령 하사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관사는 콧구멍만한 공간이다. 주방을 겸하는 비좁은 거실과 두 사람이 겨우 누울만한 작은 방 두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 쪽 방은 옷장 겸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아침 식사 하셔야지요.”
그러고 보니 아직 오전 8시도 안된 시간이다. 선생님이 가스렌지 위의 된장찌개를 데우고, 냉장고에서 김치와 밑반찬을 주섬주섬 내놓는다. 플라스틱 용기에 정갈하게 담긴 음식들이다.
“한 달에 한두 번 목포 집으로 나가면 아내가 이것저것 챙겨줍니다. 처음엔 혼자 밥 챙겨 먹는 게 청승맞더니 이젠 괜찮아요.”
사람이 고팠을까, 말이 고팠을까. 모처럼 이야기 상대를 만났다는 듯 선생님은 식사를 하면서 끊임없이 말을 이어간다.
“이곳으로 오기 전 목포에서만 8년을 근무했어요. 오지 근무도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곳 근무를 자청했답니다.”
그러나 세상일이 의욕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서소우이도는 한마디로 코딱지만한 섬이다. 면적 0.27㎢, 해안선길이 12㎞, 최고점 해발 72m…. 가벼운 조깅조차 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감옥에 갇힌 것처럼 가슴이 옥죄어 오기 시작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하고 고독했다.
게다가 고독에 술을 대적할 만한 친구가 없었다. 그는 타고난 애주가였다. 다른 건 다 맺고 끊는 성격인데 술만큼은 “커트라인이 없다”고 했다. 처음 부임했을 땐 울적해서 마시고, 비 온다고 마시고, 이장이나 뱃사람들이 부른다고 또 한 잔 마셨다.
“바닷바람과 권커니 잣거니 했지요. 바람이 한잔씩 뺏어 마시니까 쉽게 취하지도 않아요. 그렇게 시름도 고독도 모두 술 한 잔에 타서 마셔버리고는 했답니다. 처음엔 정말 감옥 같았어요. 오죽했으면 달력에 군 제대날짜 꼽듯이 하루하루 표시를 해 나갔겠어요.”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는 뭘까. 둘 다 세상과 고립되어 있는 공간이고, 음식 역시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일본의 기업가 마쓰스타 고노스케가 그랬다던가.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는 불평을 하느냐, 감사를 하느냐에 있을 뿐이라고. 마음을 다스리기에 따라 감옥이 수도원이 될 수 있고, 반대로 수도원이 감옥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기막힌 통찰이다.
“문득 내가 이래서는 안 되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루하루를 즐기자, 이런 곳에 온 김에 조용히 수양도 하고 공부도 하자며 마음을 다졌습니다. 운동을 하기 시작했어요. 술독에 빠져 살던 몸인데 이젠 술독(毒)이 쏙 빠져버렸어요. 몸도 마음도 아주 가벼워졌답니다.”
막 아침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배와 감을 먹고 있는데 바깥이 왁자지껄 소란하다.
“개구쟁이들이 등교를 하는 모양입니다. 오늘은 손님이 온 걸 알고 호기심 때문에 일찍 온 것 같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교실에 들어서니 두 녀석이 후다닥 의자에 앉는다. 서리분교의 두 주인공인 4학년 민혁이 2학년 민재다.
“두 녀석이 형제예요. 정말 못 말리는 말썽꾸러기들이지만 잡초 같은 강인함을 지닌 아이들입니다. 자립심이 아주 강해요. 지금 당장 도시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녀석들입니다. 민혁이는 공부도 잘해요. 특히 수학 머리는 타고 났어요.”
형제를 단련시키는 건 바다다. 아버지는 한번 고기잡이를 나가면 며칠씩 집을 비우고, 엄마 역시 일을 보러 자주 목포에 나간다. 그러면 형제는 둘이서 밥을 챙겨먹고, 학교에도 가고, 밤이 되면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들기도 한다.
“부모들이 자상하게 아이들을 챙겨주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밥 차려 먹는 정도는 자기들끼리 척척 잘하지요. 이따금씩 내가 밥도 챙겨주고, 라면도 끓여주고 그래요. 잔정이 많은 아이들이라 먹을 것 생기면, 선생님 잡숴보세요, 하며 들고 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애환이 얽힌 사제간의 섬 생활도 이번 겨울로 막을 고한다. 민혁이와 민재 부모님이 아이들을 목포로 전학시키기로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선생님은 뭍으로 떠나고, 학교는 영영 문을 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학교는 무엇인가. 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기능적 공간이 아니다. 학교는 한 시대의 지식과 문화, 지역사회의 소통이 매개되는 장소다. 한때 선생님과 학생 간엔 ‘유별’과 ‘유친’이 함께 있었고, 운동회나 학예회는 온 동네 사람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친교의 공간이었다. 선생님은 제사축문을 대신 써주거나 간단한 관공서 민원을 풀어주는 해결사 노릇도 겸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학교와 선생님이 서우이도에서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온갖 상념이 다 들지요. 2년 동안 애환이 깃든 학교가 없어진다고 하니까 시원섭섭하면서도 쓸쓸하고…. 여기서 가르친 저 두 녀석이 어떻게 성장할지 진짜 궁금합니다. 목포에 가면 서로 연락 하면서 지내기로 약속을 했어요. 먼 훗날 저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고, 또 사회인이 돼서 만났을 땐 이곳 섬에서 함께 쌓은 추억들이 좋은 소주 안주가 되겠지요.”
수업을 더 방해할 수 없었다. 사진을 몇 장 찍고는 포구로 나왔다. 선창가 양지바른 곳에서 할머니 한 분이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올해 칠순이라는 김순애 할머니가 힐끗 낯선 길손을 올려다보시고는 다시 그물로 눈을 돌린다.
“할머니 뭐 하세요?”
“아, 보다시피 그물 꿰매고 있잖아. 김장할 때 쓰는 잔 새우 잡는 그물이야.”
“여기 학교가 없어진다면서요?”
“그러게 말이야. 우리 손자, 손녀들 공부를 하던 곳인데, 아주 문을 닫는다고 하니까 맘이 안 좋아. 암만해도 학교 선생님이 있으면 마음이 든든한데….”
귀마개까지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쓴 할아버지 한 분이 밧줄 뭉치 위에 앉아 볕을 쬐고 계셨다. 그 옆으로 ‘협진상회’라고 쓰인 낡은 페인트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오래 전 문을 닫아 먼지만 뽀얗게 내려앉아 있는 빈 가게다.
그러니까 사람도, 학교도, 가게도 다 제 수명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일 게다. 한 때는 저 할아버지에게도 거친 바다를 누비던 청춘이 있었을 것이고, 학교도 학생들로 북적거리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고, 지금은 문을 닫은 저 가게에도 문턱이 닳도록 손님들이 들락거리던 전성기가 있었을 터였다.
할아버지가 꼼짝도 하지 않고 먼 바다를 응시한다. 꿈을 꾸는 듯한 저 할아버지의 눈은 무엇을 바라보고 계실까?
박상주 오지여행가
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우이군도
바다에도 ‘마을버스’가 다닌다. 섬사랑 6호는 뭍으로 치자면 골목골목 다 들르는 ‘마을버스’다. 177t짜리인 섬사랑 6호는 목포와 도초도, 우이도 사이를 시속 13노트(시속24km)로 느릿느릿 오간다. 주민들은 전기장판이 깔려 있는 뜨끈뜨끈한 선실에서 허리도 지지고, 삼삼오오 화투판도 벌이고, 친구들끼리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한다.
우이도는 본섬과 동소우이도, 서소우이도 등 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섬사랑 6호는 본섬의 성촌, 돈목, 예리, 진리 등 4개 마을과 동소우이도, 서소우이도를 빼놓지 않고 들른다.
서소우이도는 워낙 작은 섬이라 민박집도 하나 없다. 잠자리도 구할 겸 바로 옆에 있는 우이도 본 섬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우이도로 들어올 때 새벽 배에서 만났던 집배원 아줌마를 또 다시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돈목마을에서 내리려는데 아줌마도 짐을 챙긴다.
“우리 집이 돈목마을이에요.”
쭐레쭐레 아줌마를 따라 간다. 돈목마을은 돌담을 두른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었다. 아줌마에게 괜찮은 민박집 하나 소개시켜 달라고 했더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한다. 알고 보니 아줌마 집이 민박집이었다. 남편은 마을 이장 일을 보고 있었다. 안팎으로 참 부지런하게 사는 분들이었다. 아줌마가 부엌으로 들어가면서 코치를 한다.
“저녁 준비해 놓을 테니 얼른 가서 돈목해수욕장 일몰 보고 오세요. 참 예뻐요.”
석양이 비끼기 시작했다. 억새밭이 노을을 받아 황금빛으로 일렁인다. 억새밭을 넘어서니 아늑한 ''U‘자 형 만(灣)이 나타나고 그 안쪽으로 널찍한 백사장이 펼쳐진다. 돈목해수욕장이다.
돈목해수욕장의 북쪽 끝자락인 성촌마을을 향해 걷는다. 고운 모래밭에 발이 폭폭 부드럽게 빠진다. 서편은 황금노을을 품고 잔잔하게 일렁이는 바다요, 동편으로는 부챗살처럼 펼쳐진 산 능선이다.
그런데 저 건 또 무엇이냐. 성촌마을 동편 비탈을 커다란 모래언덕이 덮고 있었다. 조물주가 일부러 그 부분만 하늘에서 모래를 퍼붓기라도 한 듯한 모양새다. 우리나라 유일의 모래언덕으로 세계적인 생태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풍성사구다. 날씨와 빛에 따라 시시각각 그 신비로운 형태와 질감이 다르게 느껴진다는 곳이다.
성촌마을을 지나 북쪽 해변으로 나섰더니 또 길다랗게 백사장이 펼쳐진다. 섬 북쪽 해변을 거의 덮다시피 한 성촌 해수욕장과 띠발너머 해수욕장이다. 오랜 해식작용으로 갖가지 형상으로 깎인 암벽들이 병풍처럼 해수욕장 뒤편으로 둘러쳐져 있다. 바다와 백사장, 모래언덕, 기암괴석, 산이 어우러진 독특한 풍광이다.
민박집으로 돌아오니 완전히 어둠이 깔린다. 마침 저녁상을 들이고 있었다. 주인장인 이장님과 함께 반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술은 참 사람을 친하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한 잔 들어가니 다소 과묵하던 이장님이 솔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우리 옆집이 바로 김대중 대통령 측근 중 측근인 한화갑씨 집이야. 우리 사촌 형님이지. 참 똑똑하고 부지런한 분이었어. 방학 때 고향으로 내려오면 놀지 않고 산에서 나무 베어다 학비 마련하고 그랬어.”
다음 날 아침 목포로 나오는 배를 탔는데 이장님이 동행을 했다. 목포에 볼 일이 있으시단다. 3시간 반 동안 훌륭한 동행이 생긴 셈이다. 이장님이 또 섬에 얽힌 이야기를 구수하게 시작한다.
“조선시대 순조임금 치세 때 문순득이라는 어부가 있었어.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겨울 날 이었다지. 이 양반이 홍어를 팔기 위해 배를 타고 우이도에서 나주 영산포로 나가다가 그만 표류를 당하고야 말았단 말이야. 처음엔 일본 오키나와로 떠밀려갔다가 베트남과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를 한 바퀴 돈 뒤 중국을 거쳐 다시 조선으로 되돌아 왔다는 거야. 그 모험담이 당시 우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정약전 귀에 들어갔고, 그래서 글로 남게 되었다는 거지. 문순득 어른의 후손이 지금도 우이도 진리에서 살고 있어. 문채옥이라는 분인데 올해로 만 89세야. 우리 아버지와 나이가 같아 기억하고 있지.”
갑자기 기분이 찝찝해 진다. 만사를 제쳐두고 만났어야 하는 분이었는데…. 아쉽지만 여행을 하다보면 항상 미련이 남게 마련. 그 분 돌아가시기 전에 다시 한 번 오면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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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포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어선 네 척이 나란히 정렬해 있는 조그마한 선착장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스포츠형 짧은 머리에 땅딸막한 체구, 옅은 갈색 톤을 입힌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중년남자다. 마치 객지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동기간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섬으로 접근하는 배 쪽을 향해 목을 빼고 기웃거린다. 섬에 내리는 손님은 나 혼자뿐이었다. 그가 다가와 손을 내밀며 인사를 한다.
전남 신안군 서소우이도에 있는 도초초등학교 서리분교장인 홍준호(57) 선생님이다. 목포교대 10회 출신으로 올해 교직 경력 31년째인 베테랑이다.
앞장서서 걷는 선생님의 뒤를 따르며 동네를 둘러본다. 선착장을 중심으로 20여 채의 집들이 들어서 있다. 그나마 마당엔 잡초들이 무성하고 서까래가 내려앉은 빈집들이 대부분이다. 이보다 40배나 더 큰 우이도 본 섬에도 없는 학교가 어떻게 이곳에는 남아 있는 걸까.
“한때는 꽃게 잡이 때문에 부자들이 많이 나온다고 떠들썩했던 마을입니다. 지금도 꽃게, 새우 잡이를 하는 어민들이 섬을 지키고 있어요. 그래봤자 이젠 모두 여섯 집만 남았습니다.”
학교는 마을이 들어서 있는 언덕의 뒤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동네 어린이 놀이터 넓이만한 운동장과 개인 주택 규모만한 교사로 이루어진 학교다. 그래도 교사는 분홍색 페인트로 예쁘게 단장하고 있었다. 교사 앞 낡은 시멘트 표지석이 눈길을 끌었다.
‘박정희대통령 하사교사. 착공 1967. 8. 25, 준공 1967. 10. 10. 시공자 삼아건설 이복헌.’
피식 웃음이 나온다. 학교 하나를 짓는 데 어떻게 뚝딱 한 달 반 만에 지었을까. 게다가 국민세금으로 지은 학교를 어떻게 박정희대통령 하사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관사는 콧구멍만한 공간이다. 주방을 겸하는 비좁은 거실과 두 사람이 겨우 누울만한 작은 방 두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 쪽 방은 옷장 겸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아침 식사 하셔야지요.”
그러고 보니 아직 오전 8시도 안된 시간이다. 선생님이 가스렌지 위의 된장찌개를 데우고, 냉장고에서 김치와 밑반찬을 주섬주섬 내놓는다. 플라스틱 용기에 정갈하게 담긴 음식들이다.
“한 달에 한두 번 목포 집으로 나가면 아내가 이것저것 챙겨줍니다. 처음엔 혼자 밥 챙겨 먹는 게 청승맞더니 이젠 괜찮아요.”
사람이 고팠을까, 말이 고팠을까. 모처럼 이야기 상대를 만났다는 듯 선생님은 식사를 하면서 끊임없이 말을 이어간다.
“이곳으로 오기 전 목포에서만 8년을 근무했어요. 오지 근무도 한번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곳 근무를 자청했답니다.”
그러나 세상일이 의욕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서소우이도는 한마디로 코딱지만한 섬이다. 면적 0.27㎢, 해안선길이 12㎞, 최고점 해발 72m…. 가벼운 조깅조차 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감옥에 갇힌 것처럼 가슴이 옥죄어 오기 시작했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하고 고독했다.
게다가 고독에 술을 대적할 만한 친구가 없었다. 그는 타고난 애주가였다. 다른 건 다 맺고 끊는 성격인데 술만큼은 “커트라인이 없다”고 했다. 처음 부임했을 땐 울적해서 마시고, 비 온다고 마시고, 이장이나 뱃사람들이 부른다고 또 한 잔 마셨다.
“바닷바람과 권커니 잣거니 했지요. 바람이 한잔씩 뺏어 마시니까 쉽게 취하지도 않아요. 그렇게 시름도 고독도 모두 술 한 잔에 타서 마셔버리고는 했답니다. 처음엔 정말 감옥 같았어요. 오죽했으면 달력에 군 제대날짜 꼽듯이 하루하루 표시를 해 나갔겠어요.”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는 뭘까. 둘 다 세상과 고립되어 있는 공간이고, 음식 역시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일본의 기업가 마쓰스타 고노스케가 그랬다던가.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는 불평을 하느냐, 감사를 하느냐에 있을 뿐이라고. 마음을 다스리기에 따라 감옥이 수도원이 될 수 있고, 반대로 수도원이 감옥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기막힌 통찰이다.
“문득 내가 이래서는 안 되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루하루를 즐기자, 이런 곳에 온 김에 조용히 수양도 하고 공부도 하자며 마음을 다졌습니다. 운동을 하기 시작했어요. 술독에 빠져 살던 몸인데 이젠 술독(毒)이 쏙 빠져버렸어요. 몸도 마음도 아주 가벼워졌답니다.”
막 아침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배와 감을 먹고 있는데 바깥이 왁자지껄 소란하다.
“개구쟁이들이 등교를 하는 모양입니다. 오늘은 손님이 온 걸 알고 호기심 때문에 일찍 온 것 같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교실에 들어서니 두 녀석이 후다닥 의자에 앉는다. 서리분교의 두 주인공인 4학년 민혁이 2학년 민재다.
“두 녀석이 형제예요. 정말 못 말리는 말썽꾸러기들이지만 잡초 같은 강인함을 지닌 아이들입니다. 자립심이 아주 강해요. 지금 당장 도시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녀석들입니다. 민혁이는 공부도 잘해요. 특히 수학 머리는 타고 났어요.”
형제를 단련시키는 건 바다다. 아버지는 한번 고기잡이를 나가면 며칠씩 집을 비우고, 엄마 역시 일을 보러 자주 목포에 나간다. 그러면 형제는 둘이서 밥을 챙겨먹고, 학교에도 가고, 밤이 되면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들기도 한다.
“부모들이 자상하게 아이들을 챙겨주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밥 차려 먹는 정도는 자기들끼리 척척 잘하지요. 이따금씩 내가 밥도 챙겨주고, 라면도 끓여주고 그래요. 잔정이 많은 아이들이라 먹을 것 생기면, 선생님 잡숴보세요, 하며 들고 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애환이 얽힌 사제간의 섬 생활도 이번 겨울로 막을 고한다. 민혁이와 민재 부모님이 아이들을 목포로 전학시키기로 결정을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선생님은 뭍으로 떠나고, 학교는 영영 문을 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학교는 무엇인가. 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기능적 공간이 아니다. 학교는 한 시대의 지식과 문화, 지역사회의 소통이 매개되는 장소다. 한때 선생님과 학생 간엔 ‘유별’과 ‘유친’이 함께 있었고, 운동회나 학예회는 온 동네 사람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친교의 공간이었다. 선생님은 제사축문을 대신 써주거나 간단한 관공서 민원을 풀어주는 해결사 노릇도 겸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학교와 선생님이 서우이도에서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온갖 상념이 다 들지요. 2년 동안 애환이 깃든 학교가 없어진다고 하니까 시원섭섭하면서도 쓸쓸하고…. 여기서 가르친 저 두 녀석이 어떻게 성장할지 진짜 궁금합니다. 목포에 가면 서로 연락 하면서 지내기로 약속을 했어요. 먼 훗날 저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고, 또 사회인이 돼서 만났을 땐 이곳 섬에서 함께 쌓은 추억들이 좋은 소주 안주가 되겠지요.”
수업을 더 방해할 수 없었다. 사진을 몇 장 찍고는 포구로 나왔다. 선창가 양지바른 곳에서 할머니 한 분이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다. 올해 칠순이라는 김순애 할머니가 힐끗 낯선 길손을 올려다보시고는 다시 그물로 눈을 돌린다.
“할머니 뭐 하세요?”
“아, 보다시피 그물 꿰매고 있잖아. 김장할 때 쓰는 잔 새우 잡는 그물이야.”
“여기 학교가 없어진다면서요?”
“그러게 말이야. 우리 손자, 손녀들 공부를 하던 곳인데, 아주 문을 닫는다고 하니까 맘이 안 좋아. 암만해도 학교 선생님이 있으면 마음이 든든한데….”
귀마개까지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쓴 할아버지 한 분이 밧줄 뭉치 위에 앉아 볕을 쬐고 계셨다. 그 옆으로 ‘협진상회’라고 쓰인 낡은 페인트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오래 전 문을 닫아 먼지만 뽀얗게 내려앉아 있는 빈 가게다.
그러니까 사람도, 학교도, 가게도 다 제 수명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일 게다. 한 때는 저 할아버지에게도 거친 바다를 누비던 청춘이 있었을 것이고, 학교도 학생들로 북적거리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고, 지금은 문을 닫은 저 가게에도 문턱이 닳도록 손님들이 들락거리던 전성기가 있었을 터였다.
할아버지가 꼼짝도 하지 않고 먼 바다를 응시한다. 꿈을 꾸는 듯한 저 할아버지의 눈은 무엇을 바라보고 계실까?
박상주 오지여행가
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우이군도
바다에도 ‘마을버스’가 다닌다. 섬사랑 6호는 뭍으로 치자면 골목골목 다 들르는 ‘마을버스’다. 177t짜리인 섬사랑 6호는 목포와 도초도, 우이도 사이를 시속 13노트(시속24km)로 느릿느릿 오간다. 주민들은 전기장판이 깔려 있는 뜨끈뜨끈한 선실에서 허리도 지지고, 삼삼오오 화투판도 벌이고, 친구들끼리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한다.
우이도는 본섬과 동소우이도, 서소우이도 등 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섬사랑 6호는 본섬의 성촌, 돈목, 예리, 진리 등 4개 마을과 동소우이도, 서소우이도를 빼놓지 않고 들른다.
서소우이도는 워낙 작은 섬이라 민박집도 하나 없다. 잠자리도 구할 겸 바로 옆에 있는 우이도 본 섬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우이도로 들어올 때 새벽 배에서 만났던 집배원 아줌마를 또 다시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돈목마을에서 내리려는데 아줌마도 짐을 챙긴다.
“우리 집이 돈목마을이에요.”
쭐레쭐레 아줌마를 따라 간다. 돈목마을은 돌담을 두른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었다. 아줌마에게 괜찮은 민박집 하나 소개시켜 달라고 했더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한다. 알고 보니 아줌마 집이 민박집이었다. 남편은 마을 이장 일을 보고 있었다. 안팎으로 참 부지런하게 사는 분들이었다. 아줌마가 부엌으로 들어가면서 코치를 한다.
“저녁 준비해 놓을 테니 얼른 가서 돈목해수욕장 일몰 보고 오세요. 참 예뻐요.”
석양이 비끼기 시작했다. 억새밭이 노을을 받아 황금빛으로 일렁인다. 억새밭을 넘어서니 아늑한 ''U‘자 형 만(灣)이 나타나고 그 안쪽으로 널찍한 백사장이 펼쳐진다. 돈목해수욕장이다.
돈목해수욕장의 북쪽 끝자락인 성촌마을을 향해 걷는다. 고운 모래밭에 발이 폭폭 부드럽게 빠진다. 서편은 황금노을을 품고 잔잔하게 일렁이는 바다요, 동편으로는 부챗살처럼 펼쳐진 산 능선이다.
그런데 저 건 또 무엇이냐. 성촌마을 동편 비탈을 커다란 모래언덕이 덮고 있었다. 조물주가 일부러 그 부분만 하늘에서 모래를 퍼붓기라도 한 듯한 모양새다. 우리나라 유일의 모래언덕으로 세계적인 생태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풍성사구다. 날씨와 빛에 따라 시시각각 그 신비로운 형태와 질감이 다르게 느껴진다는 곳이다.
성촌마을을 지나 북쪽 해변으로 나섰더니 또 길다랗게 백사장이 펼쳐진다. 섬 북쪽 해변을 거의 덮다시피 한 성촌 해수욕장과 띠발너머 해수욕장이다. 오랜 해식작용으로 갖가지 형상으로 깎인 암벽들이 병풍처럼 해수욕장 뒤편으로 둘러쳐져 있다. 바다와 백사장, 모래언덕, 기암괴석, 산이 어우러진 독특한 풍광이다.
민박집으로 돌아오니 완전히 어둠이 깔린다. 마침 저녁상을 들이고 있었다. 주인장인 이장님과 함께 반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술은 참 사람을 친하게 만드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한 잔 들어가니 다소 과묵하던 이장님이 솔솔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우리 옆집이 바로 김대중 대통령 측근 중 측근인 한화갑씨 집이야. 우리 사촌 형님이지. 참 똑똑하고 부지런한 분이었어. 방학 때 고향으로 내려오면 놀지 않고 산에서 나무 베어다 학비 마련하고 그랬어.”
다음 날 아침 목포로 나오는 배를 탔는데 이장님이 동행을 했다. 목포에 볼 일이 있으시단다. 3시간 반 동안 훌륭한 동행이 생긴 셈이다. 이장님이 또 섬에 얽힌 이야기를 구수하게 시작한다.
“조선시대 순조임금 치세 때 문순득이라는 어부가 있었어.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겨울 날 이었다지. 이 양반이 홍어를 팔기 위해 배를 타고 우이도에서 나주 영산포로 나가다가 그만 표류를 당하고야 말았단 말이야. 처음엔 일본 오키나와로 떠밀려갔다가 베트남과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를 한 바퀴 돈 뒤 중국을 거쳐 다시 조선으로 되돌아 왔다는 거야. 그 모험담이 당시 우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정약전 귀에 들어갔고, 그래서 글로 남게 되었다는 거지. 문순득 어른의 후손이 지금도 우이도 진리에서 살고 있어. 문채옥이라는 분인데 올해로 만 89세야. 우리 아버지와 나이가 같아 기억하고 있지.”
갑자기 기분이 찝찝해 진다. 만사를 제쳐두고 만났어야 하는 분이었는데…. 아쉽지만 여행을 하다보면 항상 미련이 남게 마련. 그 분 돌아가시기 전에 다시 한 번 오면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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