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또 한해가 간다. 12월 달력도 이미 절반 넘게 지워졌다. 남은 날이라야 이제 2주가 채 안 된다. 공연히 마음이 바빠진다.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이 큰 탓이다.
연초의 소망을 되돌아본다. ‘천천히 걸으며 생각하고 얻어내는 삶’을 바랐다. 감사하며 마음의 여유를 갖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람은 그저 바람일 뿐이었다. 삶은 오히려 ‘쏜살같이 내달리고 재빨리 계산하며 낚아채는 생활’로 다가왔다.
몸도 마음도 급했다. 일이 있건 없건 항상 쫓겨 다녔다. 주변을 살필 겨를도 없었다. 연말, 구세군의 자선냄비 종소리를 듣고서야 돈 만원의 무게에 눌려 지낸 한해가 야속해진다. 거기다 이 한해 잃어버린 것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무엇보다 웃음과 흥을 잃었다. 즐겁게 한바탕 폭소를 터뜨린 기억은 그저 가물가물하기만 하다. 한해 내내 짓누른 경제위기에 서민의 어깨는 힘없이 내려앉았다. 하루하루의 삶은 고달프고 마냥 팍팍하기만 했다. 희망 또한 쉽게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의 농담에 실없이 웃음을 짓다가도 이내 씁쓸히 거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여유가 없으니 생활이 리듬을 잃었다. 각박해졌다. 정치권은 경제 고통에 시달리는 국민에게 자기네의 다툼거리를 떠넘겼다. 그리고 무조건 어느 한 편에 서도록 강요했다. 그런 편 가르기 탓에 사람들은 사나워졌다. 제 주장만 목청껏 내세울 뿐 반대의견을 들어주는 여유가 사라졌다. 양보와 타협은 장롱 속으로 들어갔다. 이것 아니면 저것 하나를 선택토록 하는 강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정(情)도 잃었다. 통신수단의 진화는 만남을 단절시켰다. 마음을 담은 편지나 속내를 실은 목소리 대신에 짧은 문자를 ‘날려’ 모든 걸 해결했다. 1년에 한번 보내는 연하장에도 감사의 글과 이름, 서명을 직접 쓰는 대신 컴퓨터로 ‘찍어’ 돌렸다. 얼굴을 마주하며 힘들게 살아가는 얘기를 듣는 게 두려웠다. 사람냄새가 밴 정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웃을 잃었다. 사랑을 잃었다. 사람들은 이제 조금이라도 이익이 없으면 남을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 이유 없이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은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 됐다. 달팽이처럼 움츠리며 힘이 미치는 작은 공간과 영역에서만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안심한다. 가족과 소수의 동창이나 고향 친구를 빼면 먹고 자고 쉬는 공간의 바로 옆에도 이웃은 없다. 성냥갑 같은 아파트에 성냥개비처럼 누워 지낼 뿐이다.
공동사회에 대한 믿음도 잃었다. 나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안정된 체제는 언제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이 감기를 앓자 세계가 급성폐렴에 걸리는 지구촌 경제 시스템은 또 언제 어떻게 돌변해 우리 삶을 바꿀지 안심할 수 없었다. 한 개가 쓰러지면 차례로 무너지는 도미노의 불안이었다. 그뿐인가. 종횡으로 얽힌 고속사회는 누구보다 앞서 뛰고 재빨리 판단하며 남이 볼세라 먼저 낚아채야만 살 수 있는 정글과 같았다.
이런 판국에 이른 나이에 일자리에서 쫓겨난 퇴직자들은 분노할 힘조차 잃었다. 아예 일자리란 걸 가져보지도 못한 청년백수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하릴없이 지나가는 세월을 한탄하며 친구를 잃고, 자신감을 잃었으며 사회에 대한 믿음도 잃었다. 그들에게 이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고 무섭다. 봄은 또 찾아오겠지만 그것이 분명 나에게도 올 것인지 확신이 없다.
21세기의 첫 10년을 우리는 희망으로 맞이했었다. 그러나 분초를 다투며 뛰는 세월에 주머니 속 동전이 쏟아지듯 인정과 웃음과 여유를 잃어갔다. 문제는 지금까지 잃어버린 것뿐 아니라 앞으로 또 얼마나 더 잃게 될지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는데 있다. 등 떠밀리다시피 속도전에 내몰려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리는 신세가 된 탓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는 해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과 실망으로만 보낼 수는 없다. 잃어버린 것이 있으면 분명 얻은 게 있기 마련이다. 최소한 잃어버린 것들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도 한 얻음일 수 있다. 베스트셀러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모리 교수가 한 말은 잃어버린 것을 새삼 생각하는 연말연시에 다시 되뇜직한 명구다. 루게릭병에 걸려 팔 다리부터 시작해 신체의 기능을 조금씩 잃어가는 고통을 그는 오히려 행복이라고 얘기했다.
“매일 눈을 뜨면 몸 전체를 느낌으로 점검해본다네. 발가락부터 무릎을 거쳐 가슴으로 올라와 팔을 움직여보고 목소리도 내보지. 아직도 나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신체 부분들에게는 깊은 고마움을 표시하고 밤새 잃어버린 신체의 부분들에겐 슬픔을 표시한다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보낸 좋은 시절을 회상하지. 살며 함께 지낸 신체 부분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보내는 것도 드물게 행복한 일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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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해가 간다. 12월 달력도 이미 절반 넘게 지워졌다. 남은 날이라야 이제 2주가 채 안 된다. 공연히 마음이 바빠진다.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이 큰 탓이다.
연초의 소망을 되돌아본다. ‘천천히 걸으며 생각하고 얻어내는 삶’을 바랐다. 감사하며 마음의 여유를 갖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람은 그저 바람일 뿐이었다. 삶은 오히려 ‘쏜살같이 내달리고 재빨리 계산하며 낚아채는 생활’로 다가왔다.
몸도 마음도 급했다. 일이 있건 없건 항상 쫓겨 다녔다. 주변을 살필 겨를도 없었다. 연말, 구세군의 자선냄비 종소리를 듣고서야 돈 만원의 무게에 눌려 지낸 한해가 야속해진다. 거기다 이 한해 잃어버린 것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무엇보다 웃음과 흥을 잃었다. 즐겁게 한바탕 폭소를 터뜨린 기억은 그저 가물가물하기만 하다. 한해 내내 짓누른 경제위기에 서민의 어깨는 힘없이 내려앉았다. 하루하루의 삶은 고달프고 마냥 팍팍하기만 했다. 희망 또한 쉽게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의 농담에 실없이 웃음을 짓다가도 이내 씁쓸히 거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여유가 없으니 생활이 리듬을 잃었다. 각박해졌다. 정치권은 경제 고통에 시달리는 국민에게 자기네의 다툼거리를 떠넘겼다. 그리고 무조건 어느 한 편에 서도록 강요했다. 그런 편 가르기 탓에 사람들은 사나워졌다. 제 주장만 목청껏 내세울 뿐 반대의견을 들어주는 여유가 사라졌다. 양보와 타협은 장롱 속으로 들어갔다. 이것 아니면 저것 하나를 선택토록 하는 강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정(情)도 잃었다. 통신수단의 진화는 만남을 단절시켰다. 마음을 담은 편지나 속내를 실은 목소리 대신에 짧은 문자를 ‘날려’ 모든 걸 해결했다. 1년에 한번 보내는 연하장에도 감사의 글과 이름, 서명을 직접 쓰는 대신 컴퓨터로 ‘찍어’ 돌렸다. 얼굴을 마주하며 힘들게 살아가는 얘기를 듣는 게 두려웠다. 사람냄새가 밴 정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웃을 잃었다. 사랑을 잃었다. 사람들은 이제 조금이라도 이익이 없으면 남을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 이유 없이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은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 됐다. 달팽이처럼 움츠리며 힘이 미치는 작은 공간과 영역에서만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안심한다. 가족과 소수의 동창이나 고향 친구를 빼면 먹고 자고 쉬는 공간의 바로 옆에도 이웃은 없다. 성냥갑 같은 아파트에 성냥개비처럼 누워 지낼 뿐이다.
공동사회에 대한 믿음도 잃었다. 나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안정된 체제는 언제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미국이 감기를 앓자 세계가 급성폐렴에 걸리는 지구촌 경제 시스템은 또 언제 어떻게 돌변해 우리 삶을 바꿀지 안심할 수 없었다. 한 개가 쓰러지면 차례로 무너지는 도미노의 불안이었다. 그뿐인가. 종횡으로 얽힌 고속사회는 누구보다 앞서 뛰고 재빨리 판단하며 남이 볼세라 먼저 낚아채야만 살 수 있는 정글과 같았다.
이런 판국에 이른 나이에 일자리에서 쫓겨난 퇴직자들은 분노할 힘조차 잃었다. 아예 일자리란 걸 가져보지도 못한 청년백수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하릴없이 지나가는 세월을 한탄하며 친구를 잃고, 자신감을 잃었으며 사회에 대한 믿음도 잃었다. 그들에게 이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고 무섭다. 봄은 또 찾아오겠지만 그것이 분명 나에게도 올 것인지 확신이 없다.
21세기의 첫 10년을 우리는 희망으로 맞이했었다. 그러나 분초를 다투며 뛰는 세월에 주머니 속 동전이 쏟아지듯 인정과 웃음과 여유를 잃어갔다. 문제는 지금까지 잃어버린 것뿐 아니라 앞으로 또 얼마나 더 잃게 될지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는데 있다. 등 떠밀리다시피 속도전에 내몰려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리는 신세가 된 탓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는 해를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과 실망으로만 보낼 수는 없다. 잃어버린 것이 있으면 분명 얻은 게 있기 마련이다. 최소한 잃어버린 것들의 소중함을 깨달은 것도 한 얻음일 수 있다. 베스트셀러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모리 교수가 한 말은 잃어버린 것을 새삼 생각하는 연말연시에 다시 되뇜직한 명구다. 루게릭병에 걸려 팔 다리부터 시작해 신체의 기능을 조금씩 잃어가는 고통을 그는 오히려 행복이라고 얘기했다.
“매일 눈을 뜨면 몸 전체를 느낌으로 점검해본다네. 발가락부터 무릎을 거쳐 가슴으로 올라와 팔을 움직여보고 목소리도 내보지. 아직도 나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신체 부분들에게는 깊은 고마움을 표시하고 밤새 잃어버린 신체의 부분들에겐 슬픔을 표시한다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보낸 좋은 시절을 회상하지. 살며 함께 지낸 신체 부분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보내는 것도 드물게 행복한 일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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