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만에 교육계를 떠나는 풍생중·고의 거목이자 산 증인인 홍사흥 풍생고교장 선생님을 퇴임식 전날 마지막으로 짐을 챙기고 있던 교장실에서 인터뷰를 가졌다.
선생님의 눈과 표정에서 풍생고와 함께 한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 <편집자 주="">
“교육에는 왕도가 없으나, 교육계가 올바로 서기 위해선 선생님들이 선비정신을 가지고 청렴해야 하며 술수를 부리지 않고 정도(正道)를 걸어야 한다”
40년을 한눈 팔지 않고 교육계에 몸 담아온 풍생고등학교 홍사흥 교장 선생님(65)은 교단을 떠나면서 얼핏 보기에 평범하지만 진정한 사도의 길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지난 25일 홍 교장 선생님이 정년퇴임을 하던 풍생고등학교의 교정은 아쉬움과 존경의 장이었다. 홍 선생님은 “눈앞의 작은 이익에 집착하고 세속적인 욕망에 지나치게 민감한 사람들은 당장은 일신의 작은 영달을 얻을 지 모르지만 결국은 부끄러운 이름만 후세에 남길 뿐”이라며 정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60년 한양공고에서 역사 선생님으로 첫 교편을 잡은 홍 선생님은 중앙여고를 거쳐 71년 성남풍생중학교(66년 개교) 교감으로 부임했다. 당시 성남은 판잣집으로 대표되는 빈민촌이었으며 교육의 불모지였다. 홍 선생님은 풍생을 사학의 명문으로 발전시킨 것뿐만 아니라 성남의 교육계 발전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
학생과 교사에게 공부하고 교육할 조건 마련
풍생이 성남지역 사학의 명문으로 자리매김 하기까지는 홍 선생님의 눈물과 땀방울의 역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9년 풍생고등학교(74년 개교)와 풍생중학교가 분리되자 홍 선생님은 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우선 아이들에게 공부할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당시 개인 공부방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으며, 아이들은 길거리를 배회하고 방황하면서 크고 작은 사고를 일으키고 다녔다. 이에 홍 선생님은 교육부의 지침과는 반하지만 아이들 선도차원에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밤 10시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하도록 자율학습을 시켜 학생들과 학부모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그리고 선생님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공개채용을 원칙으로 하고, 한번도 강사를 채용해 본적이 없다. 심지어 조카마저도 임용에서 탈락시켰으며, 자신의 모교 대학출신은 채용에서 제외시켜 왔다.
지금까지 공정하고 객관적 평가기준에 의해 정당하게 평가받은 선생님들은 스스로 자신의 직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선생님들의 자질은 높아지고 학생들은 학원을 모른 채 학교수업에 대부분을 의지하고 있다. 그 결과 경기도 교육청으로부터 11년 연속 진학지도 우수고교로 선발되기도 했다.
태권도부와 축구부 사학 풍생 드높여
홍 선생님은 풍생을 빛내고 대표하는 태권도부와 축구부의 성장과 함께 했다.
태권도부는 74년 창단 이후 수많은 국가대표를 배출하고 유럽 미국 일본 동남아 등에 태권도 시범단을 보내 국위선양을 하고 있다.
79년 평준화를 맞이하면서 ‘풍생을 이류로 만들지 않겠다’는 홍 선생님의 의지에 따라 80년 축구부를 창단했으며, 5년만에 전국을 재패하고 지금까지 우승과 준우승을 각각 8회 차지하는 등 풍생의 자랑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74년 결성한 밴드부도 전국관악대회에서 여러번 우승을 차지했다.
수시로 변하는 교육제도가 가장 힘들어
교직 생활을 되돌아볼 때, 홍 선생님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교육정책이었다고 한다.
40년 동안 수시로 변하는 교육제도는 안정적으로 교육할 조건을 빼앗아 갔다며, 입시에 따라 제도가 너무 많이 바뀌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선생님은 퇴임 후 어떻게 지낼 계획이냐는 질문에 “구들장 지고 집에 있는 것 보다 연고가 생겨 활동할 조건이 된다면 지역과 교육계의 발전을 위해 기꺼이 나가 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에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교육열을 느낄 수 있었다.
/백왕순 기자 wspaik@naeil.com
편집자>
선생님의 눈과 표정에서 풍생고와 함께 한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 <편집자 주="">
“교육에는 왕도가 없으나, 교육계가 올바로 서기 위해선 선생님들이 선비정신을 가지고 청렴해야 하며 술수를 부리지 않고 정도(正道)를 걸어야 한다”
40년을 한눈 팔지 않고 교육계에 몸 담아온 풍생고등학교 홍사흥 교장 선생님(65)은 교단을 떠나면서 얼핏 보기에 평범하지만 진정한 사도의 길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지난 25일 홍 교장 선생님이 정년퇴임을 하던 풍생고등학교의 교정은 아쉬움과 존경의 장이었다. 홍 선생님은 “눈앞의 작은 이익에 집착하고 세속적인 욕망에 지나치게 민감한 사람들은 당장은 일신의 작은 영달을 얻을 지 모르지만 결국은 부끄러운 이름만 후세에 남길 뿐”이라며 정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60년 한양공고에서 역사 선생님으로 첫 교편을 잡은 홍 선생님은 중앙여고를 거쳐 71년 성남풍생중학교(66년 개교) 교감으로 부임했다. 당시 성남은 판잣집으로 대표되는 빈민촌이었으며 교육의 불모지였다. 홍 선생님은 풍생을 사학의 명문으로 발전시킨 것뿐만 아니라 성남의 교육계 발전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
학생과 교사에게 공부하고 교육할 조건 마련
풍생이 성남지역 사학의 명문으로 자리매김 하기까지는 홍 선생님의 눈물과 땀방울의 역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9년 풍생고등학교(74년 개교)와 풍생중학교가 분리되자 홍 선생님은 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우선 아이들에게 공부할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당시 개인 공부방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으며, 아이들은 길거리를 배회하고 방황하면서 크고 작은 사고를 일으키고 다녔다. 이에 홍 선생님은 교육부의 지침과는 반하지만 아이들 선도차원에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밤 10시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하도록 자율학습을 시켜 학생들과 학부모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그리고 선생님들이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공개채용을 원칙으로 하고, 한번도 강사를 채용해 본적이 없다. 심지어 조카마저도 임용에서 탈락시켰으며, 자신의 모교 대학출신은 채용에서 제외시켜 왔다.
지금까지 공정하고 객관적 평가기준에 의해 정당하게 평가받은 선생님들은 스스로 자신의 직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선생님들의 자질은 높아지고 학생들은 학원을 모른 채 학교수업에 대부분을 의지하고 있다. 그 결과 경기도 교육청으로부터 11년 연속 진학지도 우수고교로 선발되기도 했다.
태권도부와 축구부 사학 풍생 드높여
홍 선생님은 풍생을 빛내고 대표하는 태권도부와 축구부의 성장과 함께 했다.
태권도부는 74년 창단 이후 수많은 국가대표를 배출하고 유럽 미국 일본 동남아 등에 태권도 시범단을 보내 국위선양을 하고 있다.
79년 평준화를 맞이하면서 ‘풍생을 이류로 만들지 않겠다’는 홍 선생님의 의지에 따라 80년 축구부를 창단했으며, 5년만에 전국을 재패하고 지금까지 우승과 준우승을 각각 8회 차지하는 등 풍생의 자랑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74년 결성한 밴드부도 전국관악대회에서 여러번 우승을 차지했다.
수시로 변하는 교육제도가 가장 힘들어
교직 생활을 되돌아볼 때, 홍 선생님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교육정책이었다고 한다.
40년 동안 수시로 변하는 교육제도는 안정적으로 교육할 조건을 빼앗아 갔다며, 입시에 따라 제도가 너무 많이 바뀌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선생님은 퇴임 후 어떻게 지낼 계획이냐는 질문에 “구들장 지고 집에 있는 것 보다 연고가 생겨 활동할 조건이 된다면 지역과 교육계의 발전을 위해 기꺼이 나가 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에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교육열을 느낄 수 있었다.
/백왕순 기자 wspai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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