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재 칼럼]100년 세월의 무게

지역내일 2009-12-31
100년 세월의 무게
문창재 (본지 논설고문)

또 한 해가 저물었다. 삼백예순다섯 날이 지나면 해가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자연의 순리다. 인간이 정한 세월 셈법이기도 하다. 그러니 하루 사이에 해가 바뀌어 새로운 해가 되어도 우리 생활에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그저 무심한 시간의 연속일 뿐이다.
그러나 2010년은 한국이라는 나라에 심상치만은 않은 의미를 가진 해다.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겼던 해로부터 100년이 되는 때인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늑약 체결로 나라를 잃은 치욕의 날로부터 100년째를 맞았으니, 지나간 100년 세월을 되돌아보는 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니리라.
100년이란 세월의 무게는 얼마나 되는 것이며, 그 길이는 어느 정도인가. 동네 도서관 서가에서 그런 읽을거리를 찾다가 첫 눈에 띈 것이 ‘1900년, 조선에 살다’란 책이다. 제이콥 로버트 무스라는 미국인 선교사가 1909년 미국에서 펴낸 이 책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역자(문무홍·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에게 발굴되어 2008년 한국에서 햇빛을 보게 되었으니, 100년 만에 되살아난 책이다.
‘은둔의 나라’ 조선에 관한 간략한 역사와 지리·물산 소개에 이어, 20여 항목의 주제를 다룬 이 책은 100년 전 여성인권과 문명의 어둠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가정이란 말이 없었던 시대
특히 가족에게서까지 부정되고 압제되었던 여성인권은 100년 세월의 무게를 실감케 해주었다.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들이 그런 세상을 살았다는 것은 노장년층의 상식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저 전래의 습속으로 여겨져 온 ‘문화’였다. 그런데 그것이 이미 100년 전 한 이방인을 놀라게 한 사실에 인식이 미치면, 옛일이 너무 부끄럽고 참담해진다. 아! 그랬으니 남의 나라에 국권을 빼앗긴 것이구나 싶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조선 말기에 선교사로 온 그는 십 수년 동안 조선사회 깊숙이 몸담고 살면서 관찰한 바를 1909년 8월 책으로 썼다. 찬송가를 번역하던 선교사가 ‘home sweet home’이라는 가사를 우리말로 번역하기에 고심하였다는 일화를 필두로, 당시의 여성인권 현실에 많은 페이지가 할애되었다. ‘집’이라는 말뿐, 아직 이 땅에 ‘가정’이라는 말이 없었던 시대였다.
그를 처음 놀라게 한 것은 노비제도였다. 소나 돼지처럼 사고 팔리고, 주인의 재산으로 여겨졌던 여자 노비들은 어떤 인습의 속박도 받지 않는 가장 자유로운 존재라고 그는 비아냥거렸다. 여염집 처자들이 낮에 얼굴을 내놓고 거리에 나가지 못 한 현실을 사례로 들어, 여인들에게 강요된 인습의 굴레와 금기의 속박을 나열하면서 “여자노비들은 그렇지 않았다” 하니, 누가 반론을 제기할 것인가. 1894년 갑오경장 때 노비제도가 공식적으로 혁파되었으나, 그 때까지 제도가 엄존했던 사실을 말해준다.
태어날 때부터 원하지 않는 생명으로 치부되었던 이 땅의 모든 여아들이 어려서 남의 집 민며느리로 들어가 ‘시어머니의 종’이 되는 조혼습속을 들어, 그는 “서민의 딸들은 모두 노예나 다름 없었다”고 고발하였다.
그 민며느리들이 대개는 돈에 팔려가는 실정이었으니, 지금 와서 부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 시절 여자들은 평생을 이름 없이 ‘누구 어머니’, 혹은 ‘어디 댁’으로 불리었다.
전국 각 지방을 돌며 선교활동을 했던 그를 가장 불편하게 했던 것은 낙후된 숙박시설이었다. 밥값 외에 숙박비를 따로 받지 않아, 비좁고 불결한 주막 말고는 따로 숙박시설이 없었던 것을 그는 너무 의아하게 여겼다. 절반 이상의 어린이가 성년이 되기 전에 죽었던 미개한 의료 현실과 미신도 그를 놀라게 하였다.
그렇게 하여 나라를 빼앗겼던 조선은 100년이 지난 지금 선진국 문턱에 와 있다. 자동차 ·조선 같은 중공업을 필두로, 정보통신과 가전공업 등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일제의 폭정과 광복, 동족상잔의 전쟁과 기아의 시대, 독재정권과 민중의 오랜 갈등의 세월 등, 100년 세월의 궤적을 돌아보면 까마득히 멀게 보인다. 그러나 장수하는 사람이 살아온 한 세월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리 오랜 세월이 아니다.

후대에 끼칠 영향 생각해야
이제부터 살아갈 100년, 또 그 뒤의 100년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소속단체의 사소한 당리에 집착할 일이 아니라는 깨달음에 닿게 된다. 100년 전 이 땅의 위정자들에게는 공인의식이 없었다. 오직 나 자신의 영달과 내 가족의 복리만이 그들의 관심사였다.
앞으로 100년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물음에, 100년 전 한 이방인의 식견이 딱 떨어지는 해답을 말해 준다. 영원히 값있는 일은 나 한 사람의 영달이 아니라, 후대에 끼칠 영향이라는 게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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