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은 아련한 동경이다. 낭만과 신화가 가득 쟁여져 있는 곳이다. 섬마을 선생님은 왠지 달콤한 로맨스와 깊은 사연을 지닌 주인공 일 것만 같다. 그래서 섬마을 유람에 나섰다. 섬마을 선생님들의 훈훈한 휴먼스토리와 낙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지면에 담아낼 작정이다. 서해의 백령·연평군도에서 남해 한려수도를 돌아 동해의 울릉도까지….
옷깃을 파고드는 바닷바람이 여간 칼칼한 게 아니다. 밉살스런 꽃샘추위는 남도의 섬까지 앙칼진 손을 뻗친다. 유난스러웠던 겨울추위에 이어 꽃샘추위마저 지독스럽게 매섭다. 지금이 3월 중순 맞아? 문자 그대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산모퉁이를 돌다가 그만 아! 하고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우중충한 겨울옷을 벗지 못한 산비탈 구석에서 한 아름 화사한 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분홍 옷으로 곱게 치장한 진달래들의 화사한 봄나들이다. 이 지독한 꽃샘추위 속에 야들야들 속이 훤히 비치는 분홍 블라우스 하나만 달랑 걸친 채 외출을 나선 것이다. 어떤 가지는 만개한 꽃송이들을 이고 있고, 또 어떤 가지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진분홍 꽃망울들을 쳐들고 있다. 바람이라도 훅 강하게 불면 툭하고 찢어질 것만 같다. 저 연약한 꽃잎들이 어쩌면 저리도 당당하게 무시무시한 동장군의 위세에 맞설 수 있을까. 하긴 두터운 동토의 땅을 뚫고 새로운 계절을 여는 것도 여리디 여린 새순들이다. 전남 통영군 사량도 옥녀봉 자락엔 봄의 화신이 와락 달려오고 있었다.
우뚝한 옥녀봉 자락에 섬마을 치고는 제법 규모 있는 학교 하나가 들어서 있다. 2층짜리 교사 현관 입구엔 ‘학생이 행복한 학교’라는 입간판이 걸려 있다. 교정엔 ‘성실, 협동, 창조’란 돌비석이 들어서 있다. 전교생이 28명뿐인 사량중학교다.
금잔디가 곱게 깔려 있는 운동장에서 여섯 명의 학생들이 축구 연습을 하고 있다. 학생들은 모두 빨강과 검정색이 섞인 천 바탕에 어깨 위로 흰 줄이 그어진 유니폼을 입고 있다. 남학생이 네 명, 여학생은 두 명이다. 남학생 한 명이 문지기를 하고, 나머지 다섯 명은 키킹 연습을 한다. 흰색 트레이닝 복 차림의 선생님이 볼을 배급하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이 한 명씩 달려 나와 골문을 향해 볼을 찬다. 사량중학교 덕성부장(생활부장)을 맡고 있는 체육담당 임재욱(44) 선생님이 3학년 체육수업을 하고 있다. 흔히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표현은 아마도 저 선생님처럼 순박하고 착해 보이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수업 분위기가 참 편안하다. 아이들과 뚝 떨어져 홀로 서 있는 어려운 선생님이 아니다. 학생들과 친구처럼 함께 뛰고, 스스럼없이 말을 주고받고, 서로 장난까지 친다.
선생님은 사량도 출신이다. 중학시절 자신이 뛰놀던 교정에서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학생들은 선생님의 고향 후배이자 모교 후배들이다.
사량도는 상도와 하도,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생님은 하도의 읍덕초등학교와 상도의 사량중학교를 졸업했다. 뭍으로 나가 삼천포고등학교와 경남대학을 졸업한 뒤 교편을 잡았다. 주로 거제시 인근의 학교를 돌며 근무를 하다가 2008년 봄 모교인 사량중학으로 발령을 받았다.
“저는 읍덕초교를 79년에, 사량중학를 82년에 졸업했습니다. 당시 읍덕초교는 200여명의 학생들이 다니던 곳이었어요. 지금은 학생이 단 두 명으로 줄면서 사량초교 읍덕분교로 격하됐지요. 사량중학은 540여명이 다니던 큰 학교였는데 지금은 서른 명도 안 되는 작은 학교로 줄어들었고요.”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님의 감회는 남다르다. 학생들 중에는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란 죽마고우의 아들도 있고, 함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닌 동창생의 딸도 있다. 모두가 자신의 아들 딸 같기만 하다.
“벌써 교직생활 17년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초임 시절의 열정도 많이 식고, 타성에 젖어들 무렵 모교 발령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초심이 되살아나더라고요. 고향의 후배이자, 모교 후배인 제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어야겠다는 사명감 같은 걸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신바람이 나서 아이들에게 뭐든 해주고 싶었던 겁니다.”
인간의 신바람은 큰일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다. 선생님은 부임 첫해 통영시 초겵峠剋?체육대회의 중등부 여자축구대회에 출전하기로 결심한다. 해당 대회에서 우승한 전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당시 사량중학교 전교생은 34명이었고, 그 중 여학생은 13명뿐이었다. 그들 13명으로 축구부를 꾸렸다. 400~500명의 학생들 중 소질 있는 선수를 고르고, 후보 선수들까지 여유 있게 둘 수 있는 다른 학교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여건이었다.
“아이들에게 자신감과 강한 의지를 심어주기 위해 시작한 일입니다. 우선 체력을 향상시키고 팀 전술을 숙지시키기 시작했어요. 아이들은 그 고된 훈련을 너무나도 착실하게 따라주었습니다. 가슴이 뭉클할 정도였어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이야기는 비단 성경 속에만 나오는 게 아니다. 섬마을 아이들은 첫 게임에서 뭍에 있는 큰 학교를 상대로 6대0이란 대승을 거두면서 파란을 일으켰다. 결승에서는 사량중학보다 30배 정도나 규모가 큰 모 여중을 2대0으로 누르면서 우승컵을 손에 쥐었다. 이밖에도 아이들은 그해 통영시 초·중학생 줄넘기 대회 겸 통영교육청 대표선발전에 큰 학교를 모두 물리치고 당당히 1위 자리를 차지했다. 경남도 대회에서는 통영 대표로 출전해 전체 2위를 차지하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사량중학 여자 축구부는 이듬해 해체되고 만다. 팀을 꾸리지도 못할 정도로 학생들 숫자가 줄어든 탓이다.
사라진 건 축구부 뿐만이 아니다. 사량중학은 1~2년 전까지만 해도 요트, 스킨스쿠버, 수상 스키 등 섬마을 학교의 특성을 살린 프로그램을 비롯해 테니스, 골프, 댄스 스포츠, 사물놀이 등 다양한 방과 후 특별활동을 운영했다. 그러나 학생수가 30명 아래로 줄어들면서 이런 프로그램들은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다양했던 방과 후 학습은 이제 오후 5시 30분~9시 30 사이 운영하는 야간교실로 바뀌었다. 도시 학생들처럼 사교육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섬 아이들을 위해 선생님들이 늦게까지 남아 봉사를 하신다. 세상에 이렇게 전국방방곡곡에서 밤늦게까지 공부에 매달리는 나라는 대한민국 말고는 없을 것이다.
지난 세월은 대개 아련한 노스탤지어의 항아리 속에 잠겨있다. 어떤 인생의 굴곡이라도 노스탤지어의 항아리 속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애틋함과 그리움의 향취를 입는다. 선생님이 어릴 적 힘들었던 시절을 회고한다. 나그네도 덩달아 세월 여행을 떠난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우리가 자랄 때는 전기불이 없었어요. 밤에는 석유 등잔으로 어둠을 밝혔답니다. 초등학교 때 우리 옆집 아이는 등잔불을 켠 채 자다가 불을 내서 3도 화상을 입기도 했어요. 50~60년대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량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80년의 일이었어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다닐 때였습니다. 낮에는 논일 밭일을 도와야 했고, 소죽 끓이는 일을 거들어야 했어요. 그때까지 우리들은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답니다.”
선생님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통학선을 이용했다. 선생님의 집이 있는 하도 읍포에서 사량중학이 있는 상도까지 물길을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나무로 만든 작은 통통배는 50여명의 아이들을 꽉꽉 태우고 다녔다.
“통통배가 1시간 반 동안 하도의 포구들을 한 바퀴 빙 돌며 학생들을 태웠습니다. 그러다보니 맨 처음 배를 대는 마을에 사는 아이들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해야 했어요. 3년 내내 새벽 4시에 일어나 산을 넘어 포구까지 걸어와 배를 타야 하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요즘이야 차를 타고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도로가 뚫렸고, 마을버스도 다니니까 참 편해졌지요. 그런대도 사람들이 떠나고 있느니 참 안타깝습니다.”
선생님이 자꾸 시계를 들여다본다. 아, 배 시간이 다 됐구나. 선생님은 주말이면 아내와 두 딸이 기다리고 있는 거제시의 집으로 간다. 서둘러 인터뷰를 접는다. 선생님이 뛰듯이 교정을 빠져 나간다. 텅 빈 교정을 홀로 걷는다. 10년 후 쯤 이 학교엔 학생들이 몇이나 남아 있을까?
박상주 오지여행가
100대 명산 ‘옥녀봉’에서 보는 남해바다
‘막걸리 팝니다.’
허름한 돌담 집 앞에 널빤지로 만든 엉성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사량도 옥녀봉 등산 기점 중 하나인 돈지마을 입구다. 작은 돌담 안으로 들어서니 대문도 없이 곧바로 안마당으로 연결된다. 기침을 하면서 인기척을 냈더니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창호지 여닫이문을 열고 내다보신다.
“막걸리 좀 사러 왔습니다.”
할머니가 쪽마루를 딛고는 토방으로 내려선다. 쪽마루 벽에는 유리액자와 괘종시계, 빗자루, 거울 등이 걸려 있다. 유리액자엔 빛바랜 흑백 가족사진들이 빽빽하게 끼워져 있다. 요즘도 저런 액자를 걸어놓은 집이 있구나! 사모관대 차림의 신랑과 족두리에 연지곤지 화장을 한 신부는 필경 이집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결혼사진이다. 두 분 결혼사진을 중심으로 아들과 며느리, 손자, 손녀들의 사진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다.
사량도에서는 할머니들이 손수 막걸리를 담는다. 시금털털하고, 부드럽고, 달착지근한 옛날 농주 맛을 그대로 이어가는 분들이다. 1.5리터들이 한 병을 샀다. 할머니가 묶은 김치를 비닐봉투에 담아 건네주신다.
“막걸리 안주로는 그만이야.”
배낭을 들춰 메고 길을 나선다. 한국의 100대 명산 중 하나로 선정된 옥녀봉 등산코스를 타려는 것이다. 8㎞거리에 4시간 정도 소요되는 코스다. 옥녀봉 코스를 구성하는 지리산, 월암봉, 가마봉, 옥녀봉 등은 하나같이 거대한 분재처럼 기기묘묘한 형상을 하고 있다. 능선을 걸으면서 좌우 발아래 펼쳐지는 남도바다의 탁 트인 풍광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하얀 꼬리를 길게 늘어트린 채 포구를 드나드는 여객선과 어선의 모습이 장난감처럼 작고 예쁘게 보인다.
398m 지리산에 올라 배낭을 잠시 풀어 놓고는 막걸리로 목을 축인다. 벌컥벌컥 한잔 들이켜고는 할머니가 싸주신 묶은지 한 조각을 우적우적 씹는다. 진저리쳐질 정도로 시어빠진 김치인데 왜 이리도 혀에 쪽쪽 감기는지!
혼자 쪽쪽 들이켜는 막걸리가 너무 맛있어 보였나보다. 한 중년남자가 사과 한 쪽을 들고 다가오더니 물물교환을 하자고 한다. 무슨 음식이던 함께 나눌 때 더욱 각별한 맛을 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안다. 사과 한쪽이 참으로 달디 달다.
옥녀봉 등산의 진미는 유격코스처럼 아슬아슬하고 다채로운 코스들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400m 높이의 월암봉에 오르려면 좁고 아찔한 칼바위 능선을 통과해야 한다. 가마봉 발치에는 큰 절벽이 버티고 서 있다. 그 절벽 위로 20m 정도 길이의 밧줄 두 가닥이 걸려 있다.
가마봉에 올라 잠시 사량도 등산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옥녀봉을 감상한다. 옥녀봉 방향으로 가마봉을 하산하기 위해서는 아찔할 정도로 가파른 철 계단을 타고 내려가야 한다.
옥녀봉을 오르는 일도 쉽지 않다. 가마봉을 오를 때의 절벽보다 다소 짧지만 경사는 훨씬 가파르다. 봉우리의 형상이 봉곳한 여인의 가슴을 닮았다고 해서 옥녀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옥녀봉에 오르니 지리산과 월암봉, 가마봉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풍광이 발아래 펼쳐진다. 상도와 하도 사이의 좁은 해협을 가르는 물길이 구불구불 가늘고 긴 뱀의 형상을 닮았다. 아, 그래서 사량도의 이름에 긴 뱀을 뜻하는 ‘사(蛇)’자가 붙었다고 했지.
면사무소가 있는 진촌마을 쪽으로 하산을 하려는 데 등산객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연유를 알아보니 하산길이 녹록치 않다. 깎아지른 90도 직벽 위에 줄사다리가 하나 달랑 걸려 있다. 사람들이 벌벌 떨면서 조심조심 내려가는 데다 진촌마을 쪽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에게 줄사다리를 양보하다보니 지체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차례가 되어 줄사다리 앞에 섰다. 내려다보니 아찔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까마득하다. 저걸 어떻게 내려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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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깃을 파고드는 바닷바람이 여간 칼칼한 게 아니다. 밉살스런 꽃샘추위는 남도의 섬까지 앙칼진 손을 뻗친다. 유난스러웠던 겨울추위에 이어 꽃샘추위마저 지독스럽게 매섭다. 지금이 3월 중순 맞아? 문자 그대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산모퉁이를 돌다가 그만 아! 하고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우중충한 겨울옷을 벗지 못한 산비탈 구석에서 한 아름 화사한 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분홍 옷으로 곱게 치장한 진달래들의 화사한 봄나들이다. 이 지독한 꽃샘추위 속에 야들야들 속이 훤히 비치는 분홍 블라우스 하나만 달랑 걸친 채 외출을 나선 것이다. 어떤 가지는 만개한 꽃송이들을 이고 있고, 또 어떤 가지는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진분홍 꽃망울들을 쳐들고 있다. 바람이라도 훅 강하게 불면 툭하고 찢어질 것만 같다. 저 연약한 꽃잎들이 어쩌면 저리도 당당하게 무시무시한 동장군의 위세에 맞설 수 있을까. 하긴 두터운 동토의 땅을 뚫고 새로운 계절을 여는 것도 여리디 여린 새순들이다. 전남 통영군 사량도 옥녀봉 자락엔 봄의 화신이 와락 달려오고 있었다.
우뚝한 옥녀봉 자락에 섬마을 치고는 제법 규모 있는 학교 하나가 들어서 있다. 2층짜리 교사 현관 입구엔 ‘학생이 행복한 학교’라는 입간판이 걸려 있다. 교정엔 ‘성실, 협동, 창조’란 돌비석이 들어서 있다. 전교생이 28명뿐인 사량중학교다.
금잔디가 곱게 깔려 있는 운동장에서 여섯 명의 학생들이 축구 연습을 하고 있다. 학생들은 모두 빨강과 검정색이 섞인 천 바탕에 어깨 위로 흰 줄이 그어진 유니폼을 입고 있다. 남학생이 네 명, 여학생은 두 명이다. 남학생 한 명이 문지기를 하고, 나머지 다섯 명은 키킹 연습을 한다. 흰색 트레이닝 복 차림의 선생님이 볼을 배급하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이 한 명씩 달려 나와 골문을 향해 볼을 찬다. 사량중학교 덕성부장(생활부장)을 맡고 있는 체육담당 임재욱(44) 선생님이 3학년 체육수업을 하고 있다. 흔히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표현은 아마도 저 선생님처럼 순박하고 착해 보이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수업 분위기가 참 편안하다. 아이들과 뚝 떨어져 홀로 서 있는 어려운 선생님이 아니다. 학생들과 친구처럼 함께 뛰고, 스스럼없이 말을 주고받고, 서로 장난까지 친다.
선생님은 사량도 출신이다. 중학시절 자신이 뛰놀던 교정에서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학생들은 선생님의 고향 후배이자 모교 후배들이다.
사량도는 상도와 하도,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생님은 하도의 읍덕초등학교와 상도의 사량중학교를 졸업했다. 뭍으로 나가 삼천포고등학교와 경남대학을 졸업한 뒤 교편을 잡았다. 주로 거제시 인근의 학교를 돌며 근무를 하다가 2008년 봄 모교인 사량중학으로 발령을 받았다.
“저는 읍덕초교를 79년에, 사량중학를 82년에 졸업했습니다. 당시 읍덕초교는 200여명의 학생들이 다니던 곳이었어요. 지금은 학생이 단 두 명으로 줄면서 사량초교 읍덕분교로 격하됐지요. 사량중학은 540여명이 다니던 큰 학교였는데 지금은 서른 명도 안 되는 작은 학교로 줄어들었고요.”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님의 감회는 남다르다. 학생들 중에는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란 죽마고우의 아들도 있고, 함께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닌 동창생의 딸도 있다. 모두가 자신의 아들 딸 같기만 하다.
“벌써 교직생활 17년째 접어들고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초임 시절의 열정도 많이 식고, 타성에 젖어들 무렵 모교 발령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초심이 되살아나더라고요. 고향의 후배이자, 모교 후배인 제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어야겠다는 사명감 같은 걸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신바람이 나서 아이들에게 뭐든 해주고 싶었던 겁니다.”
인간의 신바람은 큰일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다. 선생님은 부임 첫해 통영시 초겵峠剋?체육대회의 중등부 여자축구대회에 출전하기로 결심한다. 해당 대회에서 우승한 전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당시 사량중학교 전교생은 34명이었고, 그 중 여학생은 13명뿐이었다. 그들 13명으로 축구부를 꾸렸다. 400~500명의 학생들 중 소질 있는 선수를 고르고, 후보 선수들까지 여유 있게 둘 수 있는 다른 학교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여건이었다.
“아이들에게 자신감과 강한 의지를 심어주기 위해 시작한 일입니다. 우선 체력을 향상시키고 팀 전술을 숙지시키기 시작했어요. 아이들은 그 고된 훈련을 너무나도 착실하게 따라주었습니다. 가슴이 뭉클할 정도였어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이야기는 비단 성경 속에만 나오는 게 아니다. 섬마을 아이들은 첫 게임에서 뭍에 있는 큰 학교를 상대로 6대0이란 대승을 거두면서 파란을 일으켰다. 결승에서는 사량중학보다 30배 정도나 규모가 큰 모 여중을 2대0으로 누르면서 우승컵을 손에 쥐었다. 이밖에도 아이들은 그해 통영시 초·중학생 줄넘기 대회 겸 통영교육청 대표선발전에 큰 학교를 모두 물리치고 당당히 1위 자리를 차지했다. 경남도 대회에서는 통영 대표로 출전해 전체 2위를 차지하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사량중학 여자 축구부는 이듬해 해체되고 만다. 팀을 꾸리지도 못할 정도로 학생들 숫자가 줄어든 탓이다.
사라진 건 축구부 뿐만이 아니다. 사량중학은 1~2년 전까지만 해도 요트, 스킨스쿠버, 수상 스키 등 섬마을 학교의 특성을 살린 프로그램을 비롯해 테니스, 골프, 댄스 스포츠, 사물놀이 등 다양한 방과 후 특별활동을 운영했다. 그러나 학생수가 30명 아래로 줄어들면서 이런 프로그램들은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다양했던 방과 후 학습은 이제 오후 5시 30분~9시 30 사이 운영하는 야간교실로 바뀌었다. 도시 학생들처럼 사교육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섬 아이들을 위해 선생님들이 늦게까지 남아 봉사를 하신다. 세상에 이렇게 전국방방곡곡에서 밤늦게까지 공부에 매달리는 나라는 대한민국 말고는 없을 것이다.
지난 세월은 대개 아련한 노스탤지어의 항아리 속에 잠겨있다. 어떤 인생의 굴곡이라도 노스탤지어의 항아리 속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애틋함과 그리움의 향취를 입는다. 선생님이 어릴 적 힘들었던 시절을 회고한다. 나그네도 덩달아 세월 여행을 떠난다.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우리가 자랄 때는 전기불이 없었어요. 밤에는 석유 등잔으로 어둠을 밝혔답니다. 초등학교 때 우리 옆집 아이는 등잔불을 켠 채 자다가 불을 내서 3도 화상을 입기도 했어요. 50~60년대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량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80년의 일이었어요. 제가 중학교 2학년 다닐 때였습니다. 낮에는 논일 밭일을 도와야 했고, 소죽 끓이는 일을 거들어야 했어요. 그때까지 우리들은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답니다.”
선생님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통학선을 이용했다. 선생님의 집이 있는 하도 읍포에서 사량중학이 있는 상도까지 물길을 건너야 했기 때문이다. 나무로 만든 작은 통통배는 50여명의 아이들을 꽉꽉 태우고 다녔다.
“통통배가 1시간 반 동안 하도의 포구들을 한 바퀴 빙 돌며 학생들을 태웠습니다. 그러다보니 맨 처음 배를 대는 마을에 사는 아이들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해야 했어요. 3년 내내 새벽 4시에 일어나 산을 넘어 포구까지 걸어와 배를 타야 하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요즘이야 차를 타고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도로가 뚫렸고, 마을버스도 다니니까 참 편해졌지요. 그런대도 사람들이 떠나고 있느니 참 안타깝습니다.”
선생님이 자꾸 시계를 들여다본다. 아, 배 시간이 다 됐구나. 선생님은 주말이면 아내와 두 딸이 기다리고 있는 거제시의 집으로 간다. 서둘러 인터뷰를 접는다. 선생님이 뛰듯이 교정을 빠져 나간다. 텅 빈 교정을 홀로 걷는다. 10년 후 쯤 이 학교엔 학생들이 몇이나 남아 있을까?
박상주 오지여행가
100대 명산 ‘옥녀봉’에서 보는 남해바다
‘막걸리 팝니다.’
허름한 돌담 집 앞에 널빤지로 만든 엉성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사량도 옥녀봉 등산 기점 중 하나인 돈지마을 입구다. 작은 돌담 안으로 들어서니 대문도 없이 곧바로 안마당으로 연결된다. 기침을 하면서 인기척을 냈더니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창호지 여닫이문을 열고 내다보신다.
“막걸리 좀 사러 왔습니다.”
할머니가 쪽마루를 딛고는 토방으로 내려선다. 쪽마루 벽에는 유리액자와 괘종시계, 빗자루, 거울 등이 걸려 있다. 유리액자엔 빛바랜 흑백 가족사진들이 빽빽하게 끼워져 있다. 요즘도 저런 액자를 걸어놓은 집이 있구나! 사모관대 차림의 신랑과 족두리에 연지곤지 화장을 한 신부는 필경 이집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결혼사진이다. 두 분 결혼사진을 중심으로 아들과 며느리, 손자, 손녀들의 사진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다.
사량도에서는 할머니들이 손수 막걸리를 담는다. 시금털털하고, 부드럽고, 달착지근한 옛날 농주 맛을 그대로 이어가는 분들이다. 1.5리터들이 한 병을 샀다. 할머니가 묶은 김치를 비닐봉투에 담아 건네주신다.
“막걸리 안주로는 그만이야.”
배낭을 들춰 메고 길을 나선다. 한국의 100대 명산 중 하나로 선정된 옥녀봉 등산코스를 타려는 것이다. 8㎞거리에 4시간 정도 소요되는 코스다. 옥녀봉 코스를 구성하는 지리산, 월암봉, 가마봉, 옥녀봉 등은 하나같이 거대한 분재처럼 기기묘묘한 형상을 하고 있다. 능선을 걸으면서 좌우 발아래 펼쳐지는 남도바다의 탁 트인 풍광도 가슴을 설레게 한다. 하얀 꼬리를 길게 늘어트린 채 포구를 드나드는 여객선과 어선의 모습이 장난감처럼 작고 예쁘게 보인다.
398m 지리산에 올라 배낭을 잠시 풀어 놓고는 막걸리로 목을 축인다. 벌컥벌컥 한잔 들이켜고는 할머니가 싸주신 묶은지 한 조각을 우적우적 씹는다. 진저리쳐질 정도로 시어빠진 김치인데 왜 이리도 혀에 쪽쪽 감기는지!
혼자 쪽쪽 들이켜는 막걸리가 너무 맛있어 보였나보다. 한 중년남자가 사과 한 쪽을 들고 다가오더니 물물교환을 하자고 한다. 무슨 음식이던 함께 나눌 때 더욱 각별한 맛을 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안다. 사과 한쪽이 참으로 달디 달다.
옥녀봉 등산의 진미는 유격코스처럼 아슬아슬하고 다채로운 코스들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다. 400m 높이의 월암봉에 오르려면 좁고 아찔한 칼바위 능선을 통과해야 한다. 가마봉 발치에는 큰 절벽이 버티고 서 있다. 그 절벽 위로 20m 정도 길이의 밧줄 두 가닥이 걸려 있다.
가마봉에 올라 잠시 사량도 등산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옥녀봉을 감상한다. 옥녀봉 방향으로 가마봉을 하산하기 위해서는 아찔할 정도로 가파른 철 계단을 타고 내려가야 한다.
옥녀봉을 오르는 일도 쉽지 않다. 가마봉을 오를 때의 절벽보다 다소 짧지만 경사는 훨씬 가파르다. 봉우리의 형상이 봉곳한 여인의 가슴을 닮았다고 해서 옥녀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옥녀봉에 오르니 지리산과 월암봉, 가마봉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풍광이 발아래 펼쳐진다. 상도와 하도 사이의 좁은 해협을 가르는 물길이 구불구불 가늘고 긴 뱀의 형상을 닮았다. 아, 그래서 사량도의 이름에 긴 뱀을 뜻하는 ‘사(蛇)’자가 붙었다고 했지.
면사무소가 있는 진촌마을 쪽으로 하산을 하려는 데 등산객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연유를 알아보니 하산길이 녹록치 않다. 깎아지른 90도 직벽 위에 줄사다리가 하나 달랑 걸려 있다. 사람들이 벌벌 떨면서 조심조심 내려가는 데다 진촌마을 쪽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에게 줄사다리를 양보하다보니 지체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차례가 되어 줄사다리 앞에 섰다. 내려다보니 아찔 현기증이 날 정도로 까마득하다. 저걸 어떻게 내려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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