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실체를 만난 여행 (칼럼)
^내 마음 속에 발해(渤海)란 나라는 신기루, 또는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실체가 없었다. 광활한 영토를 가진 우리 역사의 한 가지 자랑, 고구려가 패망한 뒤 그 씩씩한 기상을 계승하기 위하여 그 땅에서 일어난 나라, 이 정도의 상식이 고작이었다.
^한 가수가 ‘발해를 꿈꾸며’를 불렀을 때도, 호기심 많은 젊은이들이 뗏목을 만들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 가는 뱃길을 탐사하다가 불행을 당했을 때도, 대조영(大祚榮)을 영웅화한 TV 연속극을 보고 난 뒤에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나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몇 차례 만주 땅을 여행하면서도 그랬다. 조선족 자치주 연변이 발해의 중심 무대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여행의 목적인 백두산이나 고구려 유적지에만 관심이 쏠려, 발해는 귓가를 스쳐가 버렸다. 경유지에서 멀지 않다는 유적을 찾아가 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블라디보스토크 등산여행 일정이 잡혀 갑자기 발해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였다. 목적지인 팔라자산과 그 주변에 발해성터 같은 유적들이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된 것이 계기였다. 이제 비로소 발해의 실체를 만나게 되는구나 싶어서 도서관을 드나들었다.
^손에 잡힌 발해역사서 몇 권을 통하여 개략적인 지식을 얻은 뒤로, 너무도 무심했던 지난날이 갑자기 부끄러웠다. 부끄럽기는 역사학자들도 마찬가지라 했다. 역사 연구를 전업으로 삼는 사람들도 그랬다니 문외한은 좀 낫구나 하고 위안을 삼았다.
^지난날 우리가 그 역사의 무대를 가볼 수 없는 세월이 너무 길었기 때문일 것이다. 발해사를 전공하는 사람이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고, 역사의 기록이 멸실되어 당서(唐書) 같은 중국이나 일본 쪽 기록에 나오는 편린으로 밖에는 그 면모를 알 수가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싶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신라의 것을 발해 것으로 잘못 안 일본 논문을 사실로 알고, 입시 문제로까지 출제했다는 과오는 너무 했다.
^블라디보스토크 등산여행 일정은 무리였다. 동해에서 배를 타고 20시간을 달려가 한 나절 산을 오르고, 한 나절 시내관광 후 다시 배를 타고 돌아오는 3박4일 일정으로는 발해유적을 제대로 만날 수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40km 떨어진 팔라자산 등산과 그 산 정상에서 비라본 비단산 전망이 모두였다. 국내 등산객들을 위한 코스개발 답사일정이어서 내 관심사를 고집할 수도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내 마음 속에 지펴진 발해 사랑의 불씨는 너무 뜨겁다. 팔라자산은 아직 눈이 깊어 성터의 흔적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양쪽 가이드 아무도 그것에 대한 정보도 관심도 없어 오리무중처럼 혼자 헤맸다.
^그러나 정상에서 바라본 비단산 모습은 내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밭을 두 시간 넘게 허위허위 올라 당도한 산꼭대기에서 현지인 가이드는 “저것이 비단산”이라고 자랑스레 손가락 총을 쏘았다.
^그녀의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보아 너무도 유명한 산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내 가슴을 뛰게 한 것은 해발 1276m 팔라자산보다 더 높다는 그 산의 위용이 아니다. ‘비단산’이라는 그 이름이다. 현지인들이 ‘피단’산이라 부르는 이름의 어원은 우리말 ‘비단’이라는 게 관련 여행사의 설명이었다. 발해시대부터 비단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산이라는 뜻으로 불리어 왔다는 것이다.
^그 산은 또한 ‘발해봉’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발해의 성터와 절터 같은 유적이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고, 꼭대기에는 피라미드 모양의 천제단이 있어 그렇게도 부른다는 것이다. 옛날부터 현지인들이 신성한 산으로 숭배하고 있다는 설명에서 태백산과 마니산 이미지가 떠올랐다. 눈 앞에 그 산을 보고도 오르지 못 한 아쉬움이 컸다.
^연해주 지역에서는 지금 발해유적 발굴사업이 한창이다. 러시아가 자기네 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로 시작한 사업에 우리가 끼어든 공동사업이다. 지난해에는 연해주 중부 내륙지방에서 고구려 식 온돌 유구가 분명한 평지성이 발굴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440km 거리인 우수리강 상류지역에서도 발해성터가 발견되었다.
^발해는 한반도 면적의 6배에 달하는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강역으로 가졌던 나라다. 그러나 지금 그 땅을 지배하는 나라들에 의하여 육신이 찢어지는 비운의 나라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은 <발해고>라는 저서를 통해 고려가 발해사를 쓰지 않아서 약한 나라가 되었다고 한탄했다. 그래서 역사의 미아가 되었다는 성찰이다.
^이제라도 발해를 되찾지 않으면 우리는 후손들에게 들 낯이 없게 되고 말겠다는 자각을 한 것만으로도 짧은 등산여정은 헛되지 않았다.
( 문 창 재 논설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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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고>
^내 마음 속에 발해(渤海)란 나라는 신기루, 또는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실체가 없었다. 광활한 영토를 가진 우리 역사의 한 가지 자랑, 고구려가 패망한 뒤 그 씩씩한 기상을 계승하기 위하여 그 땅에서 일어난 나라, 이 정도의 상식이 고작이었다.
^한 가수가 ‘발해를 꿈꾸며’를 불렀을 때도, 호기심 많은 젊은이들이 뗏목을 만들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 가는 뱃길을 탐사하다가 불행을 당했을 때도, 대조영(大祚榮)을 영웅화한 TV 연속극을 보고 난 뒤에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나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몇 차례 만주 땅을 여행하면서도 그랬다. 조선족 자치주 연변이 발해의 중심 무대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여행의 목적인 백두산이나 고구려 유적지에만 관심이 쏠려, 발해는 귓가를 스쳐가 버렸다. 경유지에서 멀지 않다는 유적을 찾아가 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블라디보스토크 등산여행 일정이 잡혀 갑자기 발해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였다. 목적지인 팔라자산과 그 주변에 발해성터 같은 유적들이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된 것이 계기였다. 이제 비로소 발해의 실체를 만나게 되는구나 싶어서 도서관을 드나들었다.
^손에 잡힌 발해역사서 몇 권을 통하여 개략적인 지식을 얻은 뒤로, 너무도 무심했던 지난날이 갑자기 부끄러웠다. 부끄럽기는 역사학자들도 마찬가지라 했다. 역사 연구를 전업으로 삼는 사람들도 그랬다니 문외한은 좀 낫구나 하고 위안을 삼았다.
^지난날 우리가 그 역사의 무대를 가볼 수 없는 세월이 너무 길었기 때문일 것이다. 발해사를 전공하는 사람이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고, 역사의 기록이 멸실되어 당서(唐書) 같은 중국이나 일본 쪽 기록에 나오는 편린으로 밖에는 그 면모를 알 수가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싶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신라의 것을 발해 것으로 잘못 안 일본 논문을 사실로 알고, 입시 문제로까지 출제했다는 과오는 너무 했다.
^블라디보스토크 등산여행 일정은 무리였다. 동해에서 배를 타고 20시간을 달려가 한 나절 산을 오르고, 한 나절 시내관광 후 다시 배를 타고 돌아오는 3박4일 일정으로는 발해유적을 제대로 만날 수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40km 떨어진 팔라자산 등산과 그 산 정상에서 비라본 비단산 전망이 모두였다. 국내 등산객들을 위한 코스개발 답사일정이어서 내 관심사를 고집할 수도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내 마음 속에 지펴진 발해 사랑의 불씨는 너무 뜨겁다. 팔라자산은 아직 눈이 깊어 성터의 흔적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양쪽 가이드 아무도 그것에 대한 정보도 관심도 없어 오리무중처럼 혼자 헤맸다.
^그러나 정상에서 바라본 비단산 모습은 내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밭을 두 시간 넘게 허위허위 올라 당도한 산꼭대기에서 현지인 가이드는 “저것이 비단산”이라고 자랑스레 손가락 총을 쏘았다.
^그녀의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보아 너무도 유명한 산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내 가슴을 뛰게 한 것은 해발 1276m 팔라자산보다 더 높다는 그 산의 위용이 아니다. ‘비단산’이라는 그 이름이다. 현지인들이 ‘피단’산이라 부르는 이름의 어원은 우리말 ‘비단’이라는 게 관련 여행사의 설명이었다. 발해시대부터 비단처럼 아름답고 고귀한 산이라는 뜻으로 불리어 왔다는 것이다.
^그 산은 또한 ‘발해봉’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발해의 성터와 절터 같은 유적이 비교적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고, 꼭대기에는 피라미드 모양의 천제단이 있어 그렇게도 부른다는 것이다. 옛날부터 현지인들이 신성한 산으로 숭배하고 있다는 설명에서 태백산과 마니산 이미지가 떠올랐다. 눈 앞에 그 산을 보고도 오르지 못 한 아쉬움이 컸다.
^연해주 지역에서는 지금 발해유적 발굴사업이 한창이다. 러시아가 자기네 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로 시작한 사업에 우리가 끼어든 공동사업이다. 지난해에는 연해주 중부 내륙지방에서 고구려 식 온돌 유구가 분명한 평지성이 발굴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440km 거리인 우수리강 상류지역에서도 발해성터가 발견되었다.
^발해는 한반도 면적의 6배에 달하는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강역으로 가졌던 나라다. 그러나 지금 그 땅을 지배하는 나라들에 의하여 육신이 찢어지는 비운의 나라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은 <발해고>라는 저서를 통해 고려가 발해사를 쓰지 않아서 약한 나라가 되었다고 한탄했다. 그래서 역사의 미아가 되었다는 성찰이다.
^이제라도 발해를 되찾지 않으면 우리는 후손들에게 들 낯이 없게 되고 말겠다는 자각을 한 것만으로도 짧은 등산여정은 헛되지 않았다.
( 문 창 재 논설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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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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