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형 어선들이 어깨를 맞댄 채 빽빽하게 정박해 있다. 풍랑주의보가 내릴 거라는 예보 때문에 일찌감치 포구로 돌아온 배들이다. 다른 작은 섬의 포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한산한 풍경이다.
방파제 바깥쪽으로 해군 경비정들이 여러 대 정박해 있다. 그러고 보니 바로 지척이 북한 땅이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대청도 선진포의 모습이다. 인천에서 뱃길로 211km나 떨어진 먼 곳이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쾌속선으로 4시간 이상 걸린다. 오늘은 날씨가 흐려 북한 땅은 보이지 않는다.
금요일 오후, 아이들이 떠난 교정은 자못 허전하다. 참새 같은 재잘거림과 한 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부산함 때문에 그 빈자리가 더욱 커 보이는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한 줄기 바이올린 가락이 흘러나온다. 인천시 옹진군 대청초등학교 교사 왼편 끝 1학년 교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다. “옛날에 즐거이 지내던 일 나 언제나 그리워라. 동산에 올라가 함께 놀던 그 옛날의 친구들….”
초등학교 시절 배웠던 영국민요 ‘그 옛날에(Long Long Ago)’ 곡조가 되풀이 연주되고 있다. 교실을 들여다보니 선생님 한 분이 어린이 세 명의 바이올린 연주를 지도하고 있다.
“거기 선 그렇게 빨리 끊지 말고 좀더 길게 당겨야지. 자, 다시 한번 해보자.”
동그란 얼굴에 소탈한 인상을 한 이 분은 바로 대청도에 음악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1학년 담임 이기창(40) 선생님이다. 경인교대(90학번)와 대학원에서 음악교육을 전공했다. 2009년 3월 대청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은 이후 초등학생들은 물론 중학생과 고등학생, 그리고 학부모들에게까지 각종 악기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가르치고 있는 악기 종류만 해도 바이올린과 기타, 우클렐레, 오카리나, 틴 휘슬, 리코더 등 여섯 종류나 된다.
지도하는 그룹별로 구분하자면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현악부(8명), 대청음악 사랑반(20명), 바이올린 교실(10명), 대청중겙自?특기적성 과정인 현악부(6명),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기타 동호회(11명) 등 다섯 팀이나 된다.
“마흔 일곱 명 전교생이 한 가지 악기는 다룰 수 있게 지도하고 있습니다. 전교생이 참여하는 연주단도 구성했습니다. 벌써 지난해 7월과 12월 두 차례나 연주회도 열었고요.”
문화의 황무지라고 할 수 있는 섬 마을에 갑자기 음악 붐이 일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 우클렐레니 틴 휘슬이니 하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악기들은 또 어디서 난 걸까?
“지난 해 3월 처음 이곳으로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어요. 쉬는 시간에 혼자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더라고요. 순식간에 전교생이 저희 교실로 몰려와서는 신기한 듯 구경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이올린 소리를 처음 접해본 거지요.”
선생님은 방과 후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바이올린 10대, 우클렐레 10대, 오카리나 5대, 틴 휘슬 5대 등 악기를 구입했다.
“방과 후 활동으로 우선 우클렐레부를 만들었어요. 우클렐레는 하와이 사람들이 많이 연주하는 악기입니다. 기타보다 작고, 줄도 네 줄 밖에 안돼 체구가 작은 초등학생들이 접근하기 쉬울 거라는 생각을 한 거지요.”
기름진 토양에 씨를 뿌리면 그 결실이 풍성한 법이다. 선생님은 발령 받은 지 넉 달 만인 지난해 7월 학생들과 함께 첫 번째 ‘바다와 함께 하는 우리들의 축제’를 개최한 데 이어 그해 12월 두 번 째 축제를 열었다.
“여름방학 직전 선진포구 방파제에서 음악발표회와 미술작품전시회를 겸한 축제를 열었습니다. 섬 아이들이 전에는 구경도 못 해본 악기들을 들고 여름해변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학부모들이 눈물을 글썽거리시더라고요. 정말 뭉클한 장면이었습니다.”
나무 복도는 참 느낌이 좋다. 차가운 콘크리트 복도에 비해 따뜻하기도 하거니와 어린 시절 초등학교의 추억을 상기시켜주기도 한다. 밟으면 살짝 쿠션이 느껴지고, 가끔 삐걱거리는 소리도 정겹기 그지없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복도에 초를 바른 뒤 마른 걸레로 거울처럼 반들반들 광을 내고는 했었다. 자칫하면 꽈당 넘어질 정도로 복도는 미끄럽기도 했었다.
대청초등학교 나무 복도 한 가운데 골동품 같은 물건들이 잔뜩 놓여져 있다. 세월의 흔적을 켜켜이 안고 있는 목판활자와 모서리가 닳아빠진 고서, 이상한 문양을 새긴 목판 등이 작은 나무 테이블에 가지런히 정돈돼 있었다. 전통 한지와 먹물, 솔 등 서예와 탁본 도구들도 눈에 뛴다. 누가, 무엇에 쓰는 물건들일꼬?
“목판을 이용해 옛날 책 만들기를 하는 도구들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책을 만드는 방법을 그대로 따라 해보는 거지요. 한국과 중국, 일본 등지의 민속화 탁본을 떠 보기도 합니다.”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시는 분은 대청초겵?고등학교 교감인 권혁송(57) 선생님이다.
초중고 통합학교로 운영되는 곳이라서 교감이지만 다른 초등학교의 교장 선생님 역할을 하는 분이다. 춘천교대 미술교육과에서 조소를 공부했고, 인천교대와 한국교원대 대학원에서는 한국화를 전공했다.
이기창 선생님과 함께 한 해 동안 두 차례나 ‘바다와 함께 하는 우리들의 축제’를 연 분이 바로 이분이었구나. 외딴 섬 마을 아이들에게 색깔의 아름다움과 붓의 마술을 가르쳐 주신 분이다. 선생님이 보여줄 것이 있으니 따라오라며 앞장을 서신다. 선생님이 안내한 곳은 신축 교사 1층이었다.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 옆에 꽤 넓은 공간이 있었고, 그곳엔 가로2.5m~세로1.3m 크기의 합판들이 수십 장 쌓여 있었다.“지난 해 축제 때 출품됐던 작품들입니다. 유치원과 초중고 학생들은 물론 교사, 학부모 등의 작품 350여점을 방파제 벽에 전시했는데 정말 장관이었어요. 파도와 바람이 할퀴고 지나가는 황량한 섬에 예술의 꽃이 활짝 피었던 겁니다. 20여 일 동안 수채화와 민화, 판화, 천 염색, 도자기, 석고부조, 모노타이프 등 다양한 작품들이 울긋불긋 방파제를 꾸몄답니다.”
출품작들의 장르가 유난히 다양한 것은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그만큼 다양한 미술지도를 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교감의 직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직접 아이들 미술수업에 들어간다. 방과 후엔 중고생들을 대상으로 한 전통미술부, 학부형들을 위한 천연염색·민화 교실을 지도한다.
“양파 껍질과 자색고구마, 치자, 황토 등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들로 천을 물들여 보기도 하고, 민속화 탁본을 떠 보기도 하지요.”
시간의 때가 묻은 물건들은 이상한 동경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선생님은 벌써 13년 째 고문서와 그림, 골동품 등을 수집을 하고 있다.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 10여명과 함께 ‘땟물’이라는 동호회 활동도 하고 있다.
“서울 황학동이나 장안평, 동묘, 시골마을 등 옛 물건들을 구할 수 있는 골목들을 많이 쏘다녔어요. 그동안 모은 병풍만 100여 틀이나 됩니다. 추상과 구상을 넘나들었던 조각가 권진규 선생님의 미발표 테라코타 작품도 한 점 소장하고 있어요. 인천에 있는 집에 쌓아둘 공간이 모자라 아예 김포 대명리에 있는 창고 하나를 임대해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귀하게 여기는 옛것 중엔 제자들 그림도 포함된다. 창고 속엔 그동안 가르쳤던 제자들의 작품 1000여 점이 소중하게 보관돼 있다.
“한번은 제가 근무하던 학교에 신참 여교사 한 분이 새로 오셨더라고요. 따져봤더니 그 선생님의 오빠가 옛날 내가 가르쳤던 제자더라고요. 그날 저녁 창고를 뒤져 옛 제자의 그림을 찾아냈습니다. 다음 날 여 선생님에게 그림을 건네주며 ‘오빠 6학년 때 작품이니 갖다 줘라’고 했더니 까무러치게 놀라더군요.”
무슨 큰 싸움이라도 난 걸까? 한 교실에서 ‘악, 악’ 거리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온다. 우당탕탕 구르는 소리에 헐떡이는 숨소리도 이어진다. 살짝 들여다봤더니 달랑 팬티 하나를 걸친 맨 몸 차림의 학생들이 샅바를 맨 채 씨름판을 벌이고 있다. 교실 바닥에는 두터운 매트가 깔려 있었다. 매서운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도 아이들 이마엔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혀 있다. 우람한 체구의 선생님이 아이들 사이를 오가며 자세를 잡아주고 있다. 6학년 담임인 신용식(34) 선생님이 씨름부 지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한창 들배지기를 연습하고 있었다.
“왼다리를 먼저 내밀면서 상대편 오른 다리를 바싹 들어 올리라고 했지. 상대방 오른 다리를 배로 튕기면서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자연히 넘어가게 돼 있어. 자, 다시 한번 해보자.”
선생님은 씨름선수 출신 초등학교 정교사다. 타고난 덩치와 소질이 일찍 눈에 띄어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찌감치 모래판에 입문했다. 경기도 이천의 장원초등학교, 부평중, 인항고 등 씨름명문들을 거쳐 인하대학 체육교육학과와 동 대학의 교육대학원 생활체육을 전공했다. 무늬만 씨름선수를 한 게 아니다. 1996년 제26회 회장기 전국장사씨름대회 대학부 청장급과 1997년 제51회 전국장사씨름선수권대회 대학부 용장급, 1998년 제17회 서울시장기 전국장사씨름대회 대학부 용장급 등 큰 씨름판의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이제 남은 것은 프로 모래판에서 자신을 시험해보는 일이었다. 그런데 인생의 길은 인간이 정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대학을 졸업할 당시는 한창 외환위기로 기업들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재정난을 이기지 못한 프로 씨름단들이 줄줄이 해체되기 시작했어요. 아쉬웠지만 씨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선생님은 공부를 하면서 운동을 해온 학생이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전교 1~2등을 다투던 실력이었다. 샅바를 벗어던지고 연필을 다시 들었다. 그 어렵다는 교원임용고시에 매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씨름판에서 맛 본 성취감의 도움이 컸습니다. 씨름이든 공부든 나는 뭐를 하더라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거지요.”
졸업하던 해인 1999년 9월 체육교과 전담으로 임용고사에 합격해 기간제 교사 자격을 얻었다. 이어 2000년 8월에는 다시 초등임용고사에 도전해 2급 정교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모래판에서 모여 준 끈기와 집념이 공부 판에서도 통했던 것이다. 선생님은 교단에 서면서 다시 모래판에 발을 들여놓았다. 학생들 지도를 위해 다시 샅바를 맨 것이다.
“2006년 인천 용일초등학교에서 처음 씨름부 지도를 맡았습니다. 거기서 일을 냈지요. 전국소년체전과 회장기 장사씨름, 교육감기 씨름, 전국시도대항 장사씨름 등 각종 대회에서 줄줄이 트로피를 안았습니다. 대한씨름협회에서 선정하는 전국최우수학교로 선정된 것을 비롯해 전국최우수선수상, 우수지도자상 등도 휩쓸었어요.”
대청도엔 널린 게 모래판이다. 학교 인근에만 해도 고운 모래가 깔린 농여해번과 모래사막이 있어 언제라도 씨름판을 벌일 수 있다. 그러나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씨름을 가르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이런 외적인 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기 와서 보니까 아이들이 우물 안 개구리 같더라고요. 아이들은 정말 티 없이 착한데 경쟁의식이나 도전의식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운동을 하게 되면 자신감과 목표의식을 갖게 되거든요. 섬 친구들끼리의 경쟁에서 이기고, 인천으로 나가 좀 더 큰 무대의 친구들과 겨뤄보고, 나중엔 전국무대까지 오르는 과정에서 보고 배우는 게 많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짜릿한 승리의 맛을 보여주고 싶어요.”
선생님과 아이들의 올해 목표는 전국소년체전에서 인천대표로 전국무대에 서는 것이다. 선수를 확보할 수 있는 학생층도 넓고, 좋은 시설, 좋은 영양, 좋은 코치를 갖춘 도시아이들과의 경쟁이 그리 호락호락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동안 씨름을 하면서 배운 게 뭔지 아세요. 운동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하면 그만큼 결실이 나더라고요.”
교실에 떠나 운동장을 걷는다. 아, 그러고 보니 이 학교에서는 음겧?체 교육이 참 귀한 대접을 받는구나. 다른 학교에서는 서슬퍼런 국겳탛수 교육에 밀려 기를 펴지 못하는 데…. 귓전으로 아이들의 함성이 메아리친다. 으랏찻차!
박상주 오지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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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파제 바깥쪽으로 해군 경비정들이 여러 대 정박해 있다. 그러고 보니 바로 지척이 북한 땅이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대청도 선진포의 모습이다. 인천에서 뱃길로 211km나 떨어진 먼 곳이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쾌속선으로 4시간 이상 걸린다. 오늘은 날씨가 흐려 북한 땅은 보이지 않는다.
금요일 오후, 아이들이 떠난 교정은 자못 허전하다. 참새 같은 재잘거림과 한 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부산함 때문에 그 빈자리가 더욱 커 보이는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한 줄기 바이올린 가락이 흘러나온다. 인천시 옹진군 대청초등학교 교사 왼편 끝 1학년 교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다. “옛날에 즐거이 지내던 일 나 언제나 그리워라. 동산에 올라가 함께 놀던 그 옛날의 친구들….”
초등학교 시절 배웠던 영국민요 ‘그 옛날에(Long Long Ago)’ 곡조가 되풀이 연주되고 있다. 교실을 들여다보니 선생님 한 분이 어린이 세 명의 바이올린 연주를 지도하고 있다.
“거기 선 그렇게 빨리 끊지 말고 좀더 길게 당겨야지. 자, 다시 한번 해보자.”
동그란 얼굴에 소탈한 인상을 한 이 분은 바로 대청도에 음악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1학년 담임 이기창(40) 선생님이다. 경인교대(90학번)와 대학원에서 음악교육을 전공했다. 2009년 3월 대청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은 이후 초등학생들은 물론 중학생과 고등학생, 그리고 학부모들에게까지 각종 악기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가르치고 있는 악기 종류만 해도 바이올린과 기타, 우클렐레, 오카리나, 틴 휘슬, 리코더 등 여섯 종류나 된다.
지도하는 그룹별로 구분하자면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현악부(8명), 대청음악 사랑반(20명), 바이올린 교실(10명), 대청중겙自?특기적성 과정인 현악부(6명),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기타 동호회(11명) 등 다섯 팀이나 된다.
“마흔 일곱 명 전교생이 한 가지 악기는 다룰 수 있게 지도하고 있습니다. 전교생이 참여하는 연주단도 구성했습니다. 벌써 지난해 7월과 12월 두 차례나 연주회도 열었고요.”
문화의 황무지라고 할 수 있는 섬 마을에 갑자기 음악 붐이 일게 된 사연은 무엇일까? 우클렐레니 틴 휘슬이니 하는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악기들은 또 어디서 난 걸까?
“지난 해 3월 처음 이곳으로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어요. 쉬는 시간에 혼자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더라고요. 순식간에 전교생이 저희 교실로 몰려와서는 신기한 듯 구경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이올린 소리를 처음 접해본 거지요.”
선생님은 방과 후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교육청의 지원을 받아 바이올린 10대, 우클렐레 10대, 오카리나 5대, 틴 휘슬 5대 등 악기를 구입했다.
“방과 후 활동으로 우선 우클렐레부를 만들었어요. 우클렐레는 하와이 사람들이 많이 연주하는 악기입니다. 기타보다 작고, 줄도 네 줄 밖에 안돼 체구가 작은 초등학생들이 접근하기 쉬울 거라는 생각을 한 거지요.”
기름진 토양에 씨를 뿌리면 그 결실이 풍성한 법이다. 선생님은 발령 받은 지 넉 달 만인 지난해 7월 학생들과 함께 첫 번째 ‘바다와 함께 하는 우리들의 축제’를 개최한 데 이어 그해 12월 두 번 째 축제를 열었다.
“여름방학 직전 선진포구 방파제에서 음악발표회와 미술작품전시회를 겸한 축제를 열었습니다. 섬 아이들이 전에는 구경도 못 해본 악기들을 들고 여름해변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학부모들이 눈물을 글썽거리시더라고요. 정말 뭉클한 장면이었습니다.”
나무 복도는 참 느낌이 좋다. 차가운 콘크리트 복도에 비해 따뜻하기도 하거니와 어린 시절 초등학교의 추억을 상기시켜주기도 한다. 밟으면 살짝 쿠션이 느껴지고, 가끔 삐걱거리는 소리도 정겹기 그지없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복도에 초를 바른 뒤 마른 걸레로 거울처럼 반들반들 광을 내고는 했었다. 자칫하면 꽈당 넘어질 정도로 복도는 미끄럽기도 했었다.
대청초등학교 나무 복도 한 가운데 골동품 같은 물건들이 잔뜩 놓여져 있다. 세월의 흔적을 켜켜이 안고 있는 목판활자와 모서리가 닳아빠진 고서, 이상한 문양을 새긴 목판 등이 작은 나무 테이블에 가지런히 정돈돼 있었다. 전통 한지와 먹물, 솔 등 서예와 탁본 도구들도 눈에 뛴다. 누가, 무엇에 쓰는 물건들일꼬?
“목판을 이용해 옛날 책 만들기를 하는 도구들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책을 만드는 방법을 그대로 따라 해보는 거지요. 한국과 중국, 일본 등지의 민속화 탁본을 떠 보기도 합니다.”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시는 분은 대청초겵?고등학교 교감인 권혁송(57) 선생님이다.
초중고 통합학교로 운영되는 곳이라서 교감이지만 다른 초등학교의 교장 선생님 역할을 하는 분이다. 춘천교대 미술교육과에서 조소를 공부했고, 인천교대와 한국교원대 대학원에서는 한국화를 전공했다.
이기창 선생님과 함께 한 해 동안 두 차례나 ‘바다와 함께 하는 우리들의 축제’를 연 분이 바로 이분이었구나. 외딴 섬 마을 아이들에게 색깔의 아름다움과 붓의 마술을 가르쳐 주신 분이다. 선생님이 보여줄 것이 있으니 따라오라며 앞장을 서신다. 선생님이 안내한 곳은 신축 교사 1층이었다.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 옆에 꽤 넓은 공간이 있었고, 그곳엔 가로2.5m~세로1.3m 크기의 합판들이 수십 장 쌓여 있었다.“지난 해 축제 때 출품됐던 작품들입니다. 유치원과 초중고 학생들은 물론 교사, 학부모 등의 작품 350여점을 방파제 벽에 전시했는데 정말 장관이었어요. 파도와 바람이 할퀴고 지나가는 황량한 섬에 예술의 꽃이 활짝 피었던 겁니다. 20여 일 동안 수채화와 민화, 판화, 천 염색, 도자기, 석고부조, 모노타이프 등 다양한 작품들이 울긋불긋 방파제를 꾸몄답니다.”
출품작들의 장르가 유난히 다양한 것은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그만큼 다양한 미술지도를 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교감의 직위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직접 아이들 미술수업에 들어간다. 방과 후엔 중고생들을 대상으로 한 전통미술부, 학부형들을 위한 천연염색·민화 교실을 지도한다.
“양파 껍질과 자색고구마, 치자, 황토 등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들로 천을 물들여 보기도 하고, 민속화 탁본을 떠 보기도 하지요.”
시간의 때가 묻은 물건들은 이상한 동경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선생님은 벌써 13년 째 고문서와 그림, 골동품 등을 수집을 하고 있다.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 10여명과 함께 ‘땟물’이라는 동호회 활동도 하고 있다.
“서울 황학동이나 장안평, 동묘, 시골마을 등 옛 물건들을 구할 수 있는 골목들을 많이 쏘다녔어요. 그동안 모은 병풍만 100여 틀이나 됩니다. 추상과 구상을 넘나들었던 조각가 권진규 선생님의 미발표 테라코타 작품도 한 점 소장하고 있어요. 인천에 있는 집에 쌓아둘 공간이 모자라 아예 김포 대명리에 있는 창고 하나를 임대해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귀하게 여기는 옛것 중엔 제자들 그림도 포함된다. 창고 속엔 그동안 가르쳤던 제자들의 작품 1000여 점이 소중하게 보관돼 있다.
“한번은 제가 근무하던 학교에 신참 여교사 한 분이 새로 오셨더라고요. 따져봤더니 그 선생님의 오빠가 옛날 내가 가르쳤던 제자더라고요. 그날 저녁 창고를 뒤져 옛 제자의 그림을 찾아냈습니다. 다음 날 여 선생님에게 그림을 건네주며 ‘오빠 6학년 때 작품이니 갖다 줘라’고 했더니 까무러치게 놀라더군요.”
무슨 큰 싸움이라도 난 걸까? 한 교실에서 ‘악, 악’ 거리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온다. 우당탕탕 구르는 소리에 헐떡이는 숨소리도 이어진다. 살짝 들여다봤더니 달랑 팬티 하나를 걸친 맨 몸 차림의 학생들이 샅바를 맨 채 씨름판을 벌이고 있다. 교실 바닥에는 두터운 매트가 깔려 있었다. 매서운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도 아이들 이마엔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혀 있다. 우람한 체구의 선생님이 아이들 사이를 오가며 자세를 잡아주고 있다. 6학년 담임인 신용식(34) 선생님이 씨름부 지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한창 들배지기를 연습하고 있었다.
“왼다리를 먼저 내밀면서 상대편 오른 다리를 바싹 들어 올리라고 했지. 상대방 오른 다리를 배로 튕기면서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자연히 넘어가게 돼 있어. 자, 다시 한번 해보자.”
선생님은 씨름선수 출신 초등학교 정교사다. 타고난 덩치와 소질이 일찍 눈에 띄어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찌감치 모래판에 입문했다. 경기도 이천의 장원초등학교, 부평중, 인항고 등 씨름명문들을 거쳐 인하대학 체육교육학과와 동 대학의 교육대학원 생활체육을 전공했다. 무늬만 씨름선수를 한 게 아니다. 1996년 제26회 회장기 전국장사씨름대회 대학부 청장급과 1997년 제51회 전국장사씨름선수권대회 대학부 용장급, 1998년 제17회 서울시장기 전국장사씨름대회 대학부 용장급 등 큰 씨름판의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이제 남은 것은 프로 모래판에서 자신을 시험해보는 일이었다. 그런데 인생의 길은 인간이 정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대학을 졸업할 당시는 한창 외환위기로 기업들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재정난을 이기지 못한 프로 씨름단들이 줄줄이 해체되기 시작했어요. 아쉬웠지만 씨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선생님은 공부를 하면서 운동을 해온 학생이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전교 1~2등을 다투던 실력이었다. 샅바를 벗어던지고 연필을 다시 들었다. 그 어렵다는 교원임용고시에 매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씨름판에서 맛 본 성취감의 도움이 컸습니다. 씨름이든 공부든 나는 뭐를 하더라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거지요.”
졸업하던 해인 1999년 9월 체육교과 전담으로 임용고사에 합격해 기간제 교사 자격을 얻었다. 이어 2000년 8월에는 다시 초등임용고사에 도전해 2급 정교사 자격증을 획득했다. 모래판에서 모여 준 끈기와 집념이 공부 판에서도 통했던 것이다. 선생님은 교단에 서면서 다시 모래판에 발을 들여놓았다. 학생들 지도를 위해 다시 샅바를 맨 것이다.
“2006년 인천 용일초등학교에서 처음 씨름부 지도를 맡았습니다. 거기서 일을 냈지요. 전국소년체전과 회장기 장사씨름, 교육감기 씨름, 전국시도대항 장사씨름 등 각종 대회에서 줄줄이 트로피를 안았습니다. 대한씨름협회에서 선정하는 전국최우수학교로 선정된 것을 비롯해 전국최우수선수상, 우수지도자상 등도 휩쓸었어요.”
대청도엔 널린 게 모래판이다. 학교 인근에만 해도 고운 모래가 깔린 농여해번과 모래사막이 있어 언제라도 씨름판을 벌일 수 있다. 그러나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씨름을 가르치기로 마음을 먹은 것은 이런 외적인 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기 와서 보니까 아이들이 우물 안 개구리 같더라고요. 아이들은 정말 티 없이 착한데 경쟁의식이나 도전의식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운동을 하게 되면 자신감과 목표의식을 갖게 되거든요. 섬 친구들끼리의 경쟁에서 이기고, 인천으로 나가 좀 더 큰 무대의 친구들과 겨뤄보고, 나중엔 전국무대까지 오르는 과정에서 보고 배우는 게 많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짜릿한 승리의 맛을 보여주고 싶어요.”
선생님과 아이들의 올해 목표는 전국소년체전에서 인천대표로 전국무대에 서는 것이다. 선수를 확보할 수 있는 학생층도 넓고, 좋은 시설, 좋은 영양, 좋은 코치를 갖춘 도시아이들과의 경쟁이 그리 호락호락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동안 씨름을 하면서 배운 게 뭔지 아세요. 운동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하면 그만큼 결실이 나더라고요.”
교실에 떠나 운동장을 걷는다. 아, 그러고 보니 이 학교에서는 음겧?체 교육이 참 귀한 대접을 받는구나. 다른 학교에서는 서슬퍼런 국겳탛수 교육에 밀려 기를 펴지 못하는 데…. 귓전으로 아이들의 함성이 메아리친다. 으랏찻차!
박상주 오지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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