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IMF사태 직후인 12월 2일 정부는 경영정상화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9개 종합금융사에 대해 퇴출 명령을 내렸다. 금융기관이 문을 닫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시장의 충격도 컸다.
당시 주무부서였던 재정경제원으로서도 종금사 퇴출을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 어려운 결정과정에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고민했던 한국은행 직원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은 많지 않다.
김원태 현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이 그 중 한 사람이다. 97년 당시 자금부 담당이사역을 맡고 있던 김 위원은 IMF사태가 터지자 아예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갖다 놓았다. 급박하게 변하는 외환보유상태와 환율, 금리상황을 수시로 점검해야 했기 때문이다.
박 철 당시 자금부장(현 한국은행 부총재)과 함께 전화기 서너대를 붙잡고 아침부터 새벽까지 변동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면 보고를 기다리던 총재가 직접 내려와 ‘어떻게 됐느냐’고 물을 정도로 다급한 상황이었다.
‘확실한 사람’ ‘까탈스런 상사’
특히 부실종금사 퇴출 문제를 결정해야할 때가 가장 어려웠다.
“부실한 종금사를 퇴출시켜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지만, 막상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내심 조마조마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미 어음결제능력을 상실한 종금사를 그대로 두었다간 금융기관의 연쇄부도가 불보듯 뻔했습니다.”
힘든 결정이었지만 입장은 분명했다.
물론 최종 결정은 재경원의 몫이었지만 청와대 회의에서 부실종금사 퇴출을 강하게 주장한 한국은행의 의견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성실파’‘원칙주의자’‘추진력 강한 실무형’…. 김원태 금통위원을 쫓아 다니는 수식어들이다.
조직내에서 보면 “윗사람에게는 ‘확실한 사람’으로, 아랫사람에게는 ‘괴롭히는 상사’로 통한다”는 것이 한국은행 직원들의 평이다.
김 위원은 작은 것도 직접 챙겨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다. 하다못해 결재를 받으러 갈 때에도 절대로 부하직원에게 결재서류를 들게 하는 법이 없다. 또 한번 마음먹은 일, 해야 하는 일이면 반드시 추진해야하는 성격이다.
98년 한국은행을 떠나 금융연수원장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의 일이다. 김 위원은 부임하자마자 전직원에게 이메일을 사용하도록 했다. 당시만 해도 이메일사용이 보편화되지 않았다. 당연히 직원들의 불만이 대단했다. 특히 나이가 지긋한 간부급 직원들은 직접 연수원장을 찾아 항의할 정도였다.
김 위원은 반대하는 직원들에게 일부러 이메일을 통해 일일이 업무를 지시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 부하에게는 불호령을 내렸다.
연수원장이 개별적으로 메일을 보내며 다그치는 데야 직원들도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불과 2년여 동안 책임자로 있으면서 금융연수원의 역할을 변화시킨 것을 보면 그의 실무추진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우선 98년 4월 부임하면서 금융기관 퇴직직원을 대상으로 한 재취업과정을 만들었다. 노동부와 협의해 신용분석사, 정보검색사, 부동산시장분석사 과정 등을 만들어 재취업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맞춤연수’도 김 위원의 작품. 각 개별은행의 필요에 따라 연수내용을 달리해 불필요한 중복교육을 피하고 교육대상에게 꼭 필요한 내용만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밖에도 인터넷을 통한 통신연수를 강화하고, 금융기관의 입사시험을 대행하는 등 수동적인 연수원을 능동적이고 필요한 기관으로 탈바꿈시켰다.
김 위원은 금융연수원장을 맡았던 몇년을 제외하고 66년 입행이후 현재 금통위원까지 30년이 넘게 한국은행과 함께 했다.
특히 최초로 공개시장조작을 탄생시킨 실무 책임자였다는 사실, 초대 홍보부장을 맡아 술도 못하면서 기자들을 상대했던 일은 한은 직원들도 잘 모른다.
금융재정과장, 자금부장, 비서실장, 홍보실장, 자금담당이사 등 그동안 그가 맡은 한국은행 내 역할은 요직 중의 핵심요직이다. 한국은행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셈이다.
특히 경기고-서울법대로 이어지는 이른바 한국사회의 엘리트 출신이지만 ‘라인보다는 스텝으로 성장한 인물’이라는 게 한은 내부의 평이다. 인맥, 학맥이 아닌 성실함과 노력으로 승진해 온 것을 직원들도 인정한다는 얘기다.
법대 출신의 한계를 넘기 위해 승진도 마다하고 경제학을 공부하러 미국까지 건너갔던 그였다. 당시 금융재정과장이던 김 위원은 ‘몇달만 있으면 승진할 것’이라는 상사의 만류도 뿌리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경제학 석사를 따냈다.
또한 출퇴근 지하철에서까지 자료를 검토하며 일일이 체크하는 성실함은 직원들에게 정평이 나 있다.
오히려 입행 이후 한동안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는 게 김 위원의 농담섞인 얘기다. 입행 후 군대를 갔다오니 승진시험제도가 도입됐던 것. 입사 동기들은 모두 대리가 돼 있는데 자기만 승진시험을 준비하느라 억울했었다고.
요직만 거친 한국은행 ‘엘리트’
당시 입행 동기가 현 김경림 외환은행장, 김상훈 국민은행장 등이다. 10여명의 동기 중 승진은 가장 늦었지만 권위있는 금통위원에 오른 것은 김 위원뿐이다.
“죽은 숫자를 산 숫자로 읽어내는 작업입니다.”
김 위원은 금통위원의 역할을 이렇게 표현했다. 통계에 나와 있는 수치의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려면 끊임없이 연구를 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정기보고를 받고, 목요일은 격주로 정례회의와 간담회를 통해 위원들간 경제전반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통화정책의 방향을 잡는 것이 금통위원의 역할이다.
“밖에서는 금통위가 하는 일이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중요한 결정을 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김 위원은 현재 금통위원 중 유일하게 한국은행 출신이지만 한국은행의 목소리를 제대로 못내는 게 아니냐는 직원들의 불만도 있다.
당시 주무부서였던 재정경제원으로서도 종금사 퇴출을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 어려운 결정과정에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고민했던 한국은행 직원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은 많지 않다.
김원태 현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이 그 중 한 사람이다. 97년 당시 자금부 담당이사역을 맡고 있던 김 위원은 IMF사태가 터지자 아예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갖다 놓았다. 급박하게 변하는 외환보유상태와 환율, 금리상황을 수시로 점검해야 했기 때문이다.
박 철 당시 자금부장(현 한국은행 부총재)과 함께 전화기 서너대를 붙잡고 아침부터 새벽까지 변동상황을 파악하고 있으면 보고를 기다리던 총재가 직접 내려와 ‘어떻게 됐느냐’고 물을 정도로 다급한 상황이었다.
‘확실한 사람’ ‘까탈스런 상사’
특히 부실종금사 퇴출 문제를 결정해야할 때가 가장 어려웠다.
“부실한 종금사를 퇴출시켜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지만, 막상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내심 조마조마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미 어음결제능력을 상실한 종금사를 그대로 두었다간 금융기관의 연쇄부도가 불보듯 뻔했습니다.”
힘든 결정이었지만 입장은 분명했다.
물론 최종 결정은 재경원의 몫이었지만 청와대 회의에서 부실종금사 퇴출을 강하게 주장한 한국은행의 의견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성실파’‘원칙주의자’‘추진력 강한 실무형’…. 김원태 금통위원을 쫓아 다니는 수식어들이다.
조직내에서 보면 “윗사람에게는 ‘확실한 사람’으로, 아랫사람에게는 ‘괴롭히는 상사’로 통한다”는 것이 한국은행 직원들의 평이다.
김 위원은 작은 것도 직접 챙겨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다. 하다못해 결재를 받으러 갈 때에도 절대로 부하직원에게 결재서류를 들게 하는 법이 없다. 또 한번 마음먹은 일, 해야 하는 일이면 반드시 추진해야하는 성격이다.
98년 한국은행을 떠나 금융연수원장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의 일이다. 김 위원은 부임하자마자 전직원에게 이메일을 사용하도록 했다. 당시만 해도 이메일사용이 보편화되지 않았다. 당연히 직원들의 불만이 대단했다. 특히 나이가 지긋한 간부급 직원들은 직접 연수원장을 찾아 항의할 정도였다.
김 위원은 반대하는 직원들에게 일부러 이메일을 통해 일일이 업무를 지시하고 이를 지키지 않는 부하에게는 불호령을 내렸다.
연수원장이 개별적으로 메일을 보내며 다그치는 데야 직원들도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불과 2년여 동안 책임자로 있으면서 금융연수원의 역할을 변화시킨 것을 보면 그의 실무추진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우선 98년 4월 부임하면서 금융기관 퇴직직원을 대상으로 한 재취업과정을 만들었다. 노동부와 협의해 신용분석사, 정보검색사, 부동산시장분석사 과정 등을 만들어 재취업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맞춤연수’도 김 위원의 작품. 각 개별은행의 필요에 따라 연수내용을 달리해 불필요한 중복교육을 피하고 교육대상에게 꼭 필요한 내용만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밖에도 인터넷을 통한 통신연수를 강화하고, 금융기관의 입사시험을 대행하는 등 수동적인 연수원을 능동적이고 필요한 기관으로 탈바꿈시켰다.
김 위원은 금융연수원장을 맡았던 몇년을 제외하고 66년 입행이후 현재 금통위원까지 30년이 넘게 한국은행과 함께 했다.
특히 최초로 공개시장조작을 탄생시킨 실무 책임자였다는 사실, 초대 홍보부장을 맡아 술도 못하면서 기자들을 상대했던 일은 한은 직원들도 잘 모른다.
금융재정과장, 자금부장, 비서실장, 홍보실장, 자금담당이사 등 그동안 그가 맡은 한국은행 내 역할은 요직 중의 핵심요직이다. 한국은행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셈이다.
특히 경기고-서울법대로 이어지는 이른바 한국사회의 엘리트 출신이지만 ‘라인보다는 스텝으로 성장한 인물’이라는 게 한은 내부의 평이다. 인맥, 학맥이 아닌 성실함과 노력으로 승진해 온 것을 직원들도 인정한다는 얘기다.
법대 출신의 한계를 넘기 위해 승진도 마다하고 경제학을 공부하러 미국까지 건너갔던 그였다. 당시 금융재정과장이던 김 위원은 ‘몇달만 있으면 승진할 것’이라는 상사의 만류도 뿌리치고 미국으로 건너가 경제학 석사를 따냈다.
또한 출퇴근 지하철에서까지 자료를 검토하며 일일이 체크하는 성실함은 직원들에게 정평이 나 있다.
오히려 입행 이후 한동안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는 게 김 위원의 농담섞인 얘기다. 입행 후 군대를 갔다오니 승진시험제도가 도입됐던 것. 입사 동기들은 모두 대리가 돼 있는데 자기만 승진시험을 준비하느라 억울했었다고.
요직만 거친 한국은행 ‘엘리트’
당시 입행 동기가 현 김경림 외환은행장, 김상훈 국민은행장 등이다. 10여명의 동기 중 승진은 가장 늦었지만 권위있는 금통위원에 오른 것은 김 위원뿐이다.
“죽은 숫자를 산 숫자로 읽어내는 작업입니다.”
김 위원은 금통위원의 역할을 이렇게 표현했다. 통계에 나와 있는 수치의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려면 끊임없이 연구를 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정기보고를 받고, 목요일은 격주로 정례회의와 간담회를 통해 위원들간 경제전반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통화정책의 방향을 잡는 것이 금통위원의 역할이다.
“밖에서는 금통위가 하는 일이 별로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중요한 결정을 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김 위원은 현재 금통위원 중 유일하게 한국은행 출신이지만 한국은행의 목소리를 제대로 못내는 게 아니냐는 직원들의 불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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