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0주년, 어제와 오늘
문창재 (본지 논설고문)
1950년 6월 25일 오전 10시 30분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전쟁이 터진 지 6시간 만에 긴급보고를 받고 경무대(청와대의 옛 이름)로 돌아갔다. 일요일인 이 날 대통령은 평소 습관대로 창덕궁 후원 연못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헐레벌떡 달려온 김장흥 경무대경찰서장이 대통령에게 인민군 남침 사실을 처음 보고한 시간은 오전 10시쯤이었다.
긴급 국무회의가 소집된 시간은 오전 11시. 이 시간에 인민군은 38선을 돌파해 개성·의정부·춘천·강릉 등을 위협했고, 서울에 날아온 야크기가 중앙청을 공격했다. 회의에서는 야간 등화관제를 철저히 하자는 것 말고는 별다른 논의가 없었다.
군 수뇌부라고 더 민활했던 것도 아니다. 전날 밤 파티 술이 덜 깬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허둥지둥하기만 할 뿐, 별다른 대응책을 세우지 못했다.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일요일의 휴식을 방해받을 수 없다고 전화기를 내려놓아 연락두절, 국방부 작전국장은 이사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주소도 전화번호도 몰랐다.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미국 출장 중이었다.
참모총장은 만취, 장관은 불통
육군본부 상황실에는 옹진 주둔 17연대, 의정부 3사단, 춘천 6사단 등 전방부대로부터 “(포탄이)막 떨어집니다” “탱크들이 밀고 내려옵니다” 긴급보고가 빗발쳤다. 육군참모총장 고문관으로서 총장실에서 채 총장과 같이 근무했던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의 회고록에 따르면, 참모회의에서는 적의 주 공격로를 길게 늘어뜨려 중간을 끊자느니, 빨리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여 차후를 대비하자느니 하는 제안이 나왔다. 그러나 총장은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못 하고, 그저 “적을 용감히 무찌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다음날 국회에 불려간 채 총장은 “국군이 해주를 점령했으며, 사흘 안에 평양을 점령하겠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는 즉시 국내외 신문과 방송에 대대적으로 취급되어, 뒷날 북한에 의해 북침의 근거로 악용되었다. 채 총장은 사석에서는 국회의원들에게 “빨리 피란을 가라”고 권유했다.
함락되기도 전에 서울을 떠난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에 앉아서 “정부는 서울을 사수할 것이니 국민은 동요하지 말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방송을 내보냈다. 그 말을 믿고 피란길에서 돌아섰던 많은 시민이 낭패를 당했다.
정부와 군 수뇌부가 이렇게 헤매는 동안, 일선에서는 현장 지휘관들이 기민하게 대응하여 간발의 위기는 그럭저럭 극복되었다. 춘천 함락을 지연시킨 6사단의 용전이 그랬고, 특공대원 600명을 태운 인민군 무장선을 격침한 대한해협 해전이 그랬다. 특히 대한해협 해전은 부산을 지킨 개전 첫날의 대첩이었다.
동해안에 상륙하고 있는 적 특공대를 섬멸하라는 작전명령을 받고 진해를 떠난 군함은 유일한 전투함 백두산함이었다. 수상한 배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백두산 함장 최용남 중령은 괴선박이 부산에 상륙하려는 인민군 특공부대 수송선으로 직감하고, 해군본부에 격침명령을 내려달라고 졸라 목적을 달성했다.
그 때 동해상에 우리 해군 경비정은 없었다. 그 날 새벽 3시부터 수천명의 인민군 특공부대가 강원도 동해안 여러 곳에 상륙했지만,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 그 많은 해안초소 근무자들은 다 무얼 했는지, “수상한 군인들이 배를 타고 들어왔다”고 경찰지서에 신고한 사람은 민간인이었다.
2010년 6월 25일 그런 사태가 다시 발생한다는 가정 아래, 가상상황을 유추해 본다. 초등학생들까지 핸드폰을 가진 IT천국에서 어떻게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전쟁발발 소식을 6시간이나 모르고 있겠나 싶다.
군비나 무기 체계에서 월등히 우세한데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할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천안함 사태를 보면 군비가 아무리 우세해도 책임 있는 사람들이 정직하지 못하면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게 되었다.
사태 발생시간을 두 차례에 걸쳐 고치고, 공격물체가 잠수정 같다는 현장의 보고를 중간 지휘관이 새떼로 고쳐 보고했다는 감사원 감사결과는 온 국민을 놀라게 했다.
‘잠수정’을 새떼로 고쳐 보고
출장에서 열차편으로 상경하여 근무위치에 돌아간 합참의 최고 작전책임자가 몇 시간씩 자리를 비웠다는 대목에서는, 60년 전 작전회의 중 전선시찰을 이유로 일선에 달려간 채병덕 참모총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한 몸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거짓말과 안이한 상황인식이 대통령과 국민의 판단을 흐리게 하여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변할 수 있다는 진리를, 60년 세월을 격한 6월의 어제와 오늘이 실증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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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재 (본지 논설고문)
1950년 6월 25일 오전 10시 30분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전쟁이 터진 지 6시간 만에 긴급보고를 받고 경무대(청와대의 옛 이름)로 돌아갔다. 일요일인 이 날 대통령은 평소 습관대로 창덕궁 후원 연못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헐레벌떡 달려온 김장흥 경무대경찰서장이 대통령에게 인민군 남침 사실을 처음 보고한 시간은 오전 10시쯤이었다.
긴급 국무회의가 소집된 시간은 오전 11시. 이 시간에 인민군은 38선을 돌파해 개성·의정부·춘천·강릉 등을 위협했고, 서울에 날아온 야크기가 중앙청을 공격했다. 회의에서는 야간 등화관제를 철저히 하자는 것 말고는 별다른 논의가 없었다.
군 수뇌부라고 더 민활했던 것도 아니다. 전날 밤 파티 술이 덜 깬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허둥지둥하기만 할 뿐, 별다른 대응책을 세우지 못했다.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일요일의 휴식을 방해받을 수 없다고 전화기를 내려놓아 연락두절, 국방부 작전국장은 이사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주소도 전화번호도 몰랐다.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미국 출장 중이었다.
참모총장은 만취, 장관은 불통
육군본부 상황실에는 옹진 주둔 17연대, 의정부 3사단, 춘천 6사단 등 전방부대로부터 “(포탄이)막 떨어집니다” “탱크들이 밀고 내려옵니다” 긴급보고가 빗발쳤다. 육군참모총장 고문관으로서 총장실에서 채 총장과 같이 근무했던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의 회고록에 따르면, 참모회의에서는 적의 주 공격로를 길게 늘어뜨려 중간을 끊자느니, 빨리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여 차후를 대비하자느니 하는 제안이 나왔다. 그러나 총장은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못 하고, 그저 “적을 용감히 무찌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다음날 국회에 불려간 채 총장은 “국군이 해주를 점령했으며, 사흘 안에 평양을 점령하겠다”고 보고했다. 이 보고는 즉시 국내외 신문과 방송에 대대적으로 취급되어, 뒷날 북한에 의해 북침의 근거로 악용되었다. 채 총장은 사석에서는 국회의원들에게 “빨리 피란을 가라”고 권유했다.
함락되기도 전에 서울을 떠난 이승만 대통령은 대전에 앉아서 “정부는 서울을 사수할 것이니 국민은 동요하지 말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방송을 내보냈다. 그 말을 믿고 피란길에서 돌아섰던 많은 시민이 낭패를 당했다.
정부와 군 수뇌부가 이렇게 헤매는 동안, 일선에서는 현장 지휘관들이 기민하게 대응하여 간발의 위기는 그럭저럭 극복되었다. 춘천 함락을 지연시킨 6사단의 용전이 그랬고, 특공대원 600명을 태운 인민군 무장선을 격침한 대한해협 해전이 그랬다. 특히 대한해협 해전은 부산을 지킨 개전 첫날의 대첩이었다.
동해안에 상륙하고 있는 적 특공대를 섬멸하라는 작전명령을 받고 진해를 떠난 군함은 유일한 전투함 백두산함이었다. 수상한 배를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백두산 함장 최용남 중령은 괴선박이 부산에 상륙하려는 인민군 특공부대 수송선으로 직감하고, 해군본부에 격침명령을 내려달라고 졸라 목적을 달성했다.
그 때 동해상에 우리 해군 경비정은 없었다. 그 날 새벽 3시부터 수천명의 인민군 특공부대가 강원도 동해안 여러 곳에 상륙했지만,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 그 많은 해안초소 근무자들은 다 무얼 했는지, “수상한 군인들이 배를 타고 들어왔다”고 경찰지서에 신고한 사람은 민간인이었다.
2010년 6월 25일 그런 사태가 다시 발생한다는 가정 아래, 가상상황을 유추해 본다. 초등학생들까지 핸드폰을 가진 IT천국에서 어떻게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전쟁발발 소식을 6시간이나 모르고 있겠나 싶다.
군비나 무기 체계에서 월등히 우세한데 그렇게 일방적으로 당할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천안함 사태를 보면 군비가 아무리 우세해도 책임 있는 사람들이 정직하지 못하면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게 되었다.
사태 발생시간을 두 차례에 걸쳐 고치고, 공격물체가 잠수정 같다는 현장의 보고를 중간 지휘관이 새떼로 고쳐 보고했다는 감사원 감사결과는 온 국민을 놀라게 했다.
‘잠수정’을 새떼로 고쳐 보고
출장에서 열차편으로 상경하여 근무위치에 돌아간 합참의 최고 작전책임자가 몇 시간씩 자리를 비웠다는 대목에서는, 60년 전 작전회의 중 전선시찰을 이유로 일선에 달려간 채병덕 참모총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 한 몸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거짓말과 안이한 상황인식이 대통령과 국민의 판단을 흐리게 하여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변할 수 있다는 진리를, 60년 세월을 격한 6월의 어제와 오늘이 실증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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