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4월 개정 중앙은행법이 발효되면서 한국은행 총재와 6명의 금융통화위원이 새로 선정됐다.
당시 새 중앙은행법은 한국은행의 독립성 강화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특히 금융통화위원회가 ‘금융통과위원회’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비상근이었던 금통위원의 지위도 상근직으로 격상됐다. 그만큼 금통위원 인사에 대한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았다.
그러나 막상 새로 선임된 금통위원들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재경원과 한국은행의 나눠먹기식 인사였다”느니, “정작 금융통화위원 내부에 금융통은 없다”느니 하는 비판의 말들도 많았다.
장승우 금통위원도 비판의 대상 중 한 명이었다. 금융전문가라기보다 재경원 ‘대표’에 불과하다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3년여 세월이 흐른 지금 장 위원에 대한 평가는 당시와 크게 달라져 있다.
재경원 출신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한국은행 직원들조차 장 위원을 “한국은행에 가장 먼저 뿌리내린 금통위원”으로 꼽고 있다.
가장 먼저 뿌리내린 금통위원
장 위원이 이같은 평가를 받는 것은 비록 재경원 출신이지만 경제기획원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경제기획원은 구 재무부와 달리 한국은행과 성격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장 위원은 한국은행과 인연이 깊은 편이다. 그가 첫 공직생활을 시작한 곳은 경제기획원 물가국이었다. 물가지수를 관리하는 일이 그가 맡은 첫 업무였다. 물가관리에서 더 비중이 있는 도매 물가를 점검하기 위해 장 위원은 거의 매일 한국은행에 출입해야 했다.
72년 유신정부가 8·3조치를 통해 사채를 동결하고 물가상승률을 3%대로 설정하면서부터 그는 매일 도매물가 20∼30개 품목의 동향을 체크하고, 청와대에서 열리는 차관회의에 제출할 자료를 만드느라 한국은행 조사부에서 살다시피 했다.
금통위 부임 이후 장 위원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팀장, 과장급 실무진들과 점심을 함께 하는 것이었다. 직원들과 일일이 대화를 하며 서로의 고충과 애로사항을 나누다보니 쉽게 동화될 수 있었다. 요즘은 ‘재경부 출신’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그를 대하는 직원은 없다.
또 “경제정책 전문가일지는 몰라도 금융은 모른다”던 평가도 점차 실물경제와 통화정책을 연결하는 균형감각을 갖고 있다는 평가로 바뀌었다. “금융통화위원회 내부의 합리적인 조정자”라는 것이 요즘 그에 대한 안팎의 평가다.
장 위원은 개각이 있을 때마다 경제수석 물망에 오르는 금통위원으로도 유명하다. 얼마 전 개각 때에도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개각 때만 되면 청와대 비서실에서부터 경제수석 후보라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이처럼 장 위원을 두고 하마평이 무성한 것은 강봉균 전 경제수석, 이기호 현 경제수석과 동일한 코스를 밟아왔기 때문이다. 장 위원 역시 경제기획원 정책조정국장과 경제기획국장 등 핵심 요직만을 맡아왔다. 특히 공교롭게도(?) 5공화국 이후 세번이나 정권교체기에 경제정책 입안에 참여하게 됐다.
정권 경제계획 입안에 세차례나 참여
청와대 경제비서실 일선 직원으로 “바깥의 살벌한 분위기도 모른채 일만했다”는 80년을 제외하고 6공화국과 문민정부의 경제정책의 공과가 그에게 있다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6공화국 경제정책은 여전히 양적 팽창에 중점을 두었던 반면 문민정부 시절에는 개혁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정책 입안과정에 직접 참여했던 당사자로서 장 위원은 6공화국과 문민정부를 이렇게 비교했다. 그러나 경제개혁의 기본틀인 토지공개념과 실명제 등은 6공화국 때부터 출발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특히 장 위원이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문민정부의 경제개혁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당시 신경제 5개년 계획만큼은 손색없는 것이었다는 게 장 위원의 평가다. 다만 추진과정에서 경제주체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지 못했고, 점차 시간이 지나며 정치적 요구가 앞서게 됐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직전 재경원 차관보시절도 장 위원에게는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당시 경상수지 적자 폭은 늘고 있는 데 기업들의 설비투자가 40%이상 급증하고 있었습니다. 외환위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상징후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정부에서는 ‘고비용 저효율 구조 해소’와 ‘경쟁력 10% 높이기’를 추진했지만 경제주체들의 협조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장 위원은 여전히 경제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현재의 경제위기도 소비진작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구조조정과 수출경쟁력 향상, 그리고 무엇보다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장 위원이 정책조정능력과 균형감각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경제기획원 대외협력관, 남북회담 경제실무 담당 등을 역임하며 다양한 협상을 이끌었던 경험이 바탕이 됐다.
정책 조정능력 인정받아
90∼91년 대외협력관으로 있을 때에는 우루과이라운드로 미국의 통상압력이 거셌다. 당시 미국 뿐 아니라 경제 각 부처의 이해관계가 달라 이중으로 싸워야 했다. 또 90년대 초반 남북회담이 진행될 때에는 남측 경제실무담당으로 두 번이나 평양에 다녀왔다. 당시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는 장 위원의 공직생활 보람 중 하나다.
조정자 역할을 맡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는 부드러운 성격에다 아랫사람도 잘 챙기는 스타일이다. 반면 그만큼 저돌적인 면이 약하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장 위원과 가까운 사람들은 ‘챙길 거 다 챙기는 사람’으로 평가했다. 보좌역의 업무량도 엄청나게 많다고….
그는 경기고, 서울대로 이어지는 소위 ‘KS’중에서도 10위 안에드는 수재로 꼽힌다. 경기고등학교를 수석졸업하고 대학졸업과 함께 행정고시를 패스했을 정도. 이기호 경제수석이 행시 동기(7회)다.
당시 새 중앙은행법은 한국은행의 독립성 강화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특히 금융통화위원회가 ‘금융통과위원회’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비상근이었던 금통위원의 지위도 상근직으로 격상됐다. 그만큼 금통위원 인사에 대한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았다.
그러나 막상 새로 선임된 금통위원들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재경원과 한국은행의 나눠먹기식 인사였다”느니, “정작 금융통화위원 내부에 금융통은 없다”느니 하는 비판의 말들도 많았다.
장승우 금통위원도 비판의 대상 중 한 명이었다. 금융전문가라기보다 재경원 ‘대표’에 불과하다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3년여 세월이 흐른 지금 장 위원에 대한 평가는 당시와 크게 달라져 있다.
재경원 출신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한국은행 직원들조차 장 위원을 “한국은행에 가장 먼저 뿌리내린 금통위원”으로 꼽고 있다.
가장 먼저 뿌리내린 금통위원
장 위원이 이같은 평가를 받는 것은 비록 재경원 출신이지만 경제기획원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경제기획원은 구 재무부와 달리 한국은행과 성격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장 위원은 한국은행과 인연이 깊은 편이다. 그가 첫 공직생활을 시작한 곳은 경제기획원 물가국이었다. 물가지수를 관리하는 일이 그가 맡은 첫 업무였다. 물가관리에서 더 비중이 있는 도매 물가를 점검하기 위해 장 위원은 거의 매일 한국은행에 출입해야 했다.
72년 유신정부가 8·3조치를 통해 사채를 동결하고 물가상승률을 3%대로 설정하면서부터 그는 매일 도매물가 20∼30개 품목의 동향을 체크하고, 청와대에서 열리는 차관회의에 제출할 자료를 만드느라 한국은행 조사부에서 살다시피 했다.
금통위 부임 이후 장 위원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팀장, 과장급 실무진들과 점심을 함께 하는 것이었다. 직원들과 일일이 대화를 하며 서로의 고충과 애로사항을 나누다보니 쉽게 동화될 수 있었다. 요즘은 ‘재경부 출신’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그를 대하는 직원은 없다.
또 “경제정책 전문가일지는 몰라도 금융은 모른다”던 평가도 점차 실물경제와 통화정책을 연결하는 균형감각을 갖고 있다는 평가로 바뀌었다. “금융통화위원회 내부의 합리적인 조정자”라는 것이 요즘 그에 대한 안팎의 평가다.
장 위원은 개각이 있을 때마다 경제수석 물망에 오르는 금통위원으로도 유명하다. 얼마 전 개각 때에도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개각 때만 되면 청와대 비서실에서부터 경제수석 후보라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이처럼 장 위원을 두고 하마평이 무성한 것은 강봉균 전 경제수석, 이기호 현 경제수석과 동일한 코스를 밟아왔기 때문이다. 장 위원 역시 경제기획원 정책조정국장과 경제기획국장 등 핵심 요직만을 맡아왔다. 특히 공교롭게도(?) 5공화국 이후 세번이나 정권교체기에 경제정책 입안에 참여하게 됐다.
정권 경제계획 입안에 세차례나 참여
청와대 경제비서실 일선 직원으로 “바깥의 살벌한 분위기도 모른채 일만했다”는 80년을 제외하고 6공화국과 문민정부의 경제정책의 공과가 그에게 있다고 해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6공화국 경제정책은 여전히 양적 팽창에 중점을 두었던 반면 문민정부 시절에는 개혁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정책 입안과정에 직접 참여했던 당사자로서 장 위원은 6공화국과 문민정부를 이렇게 비교했다. 그러나 경제개혁의 기본틀인 토지공개념과 실명제 등은 6공화국 때부터 출발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특히 장 위원이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문민정부의 경제개혁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당시 신경제 5개년 계획만큼은 손색없는 것이었다는 게 장 위원의 평가다. 다만 추진과정에서 경제주체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지 못했고, 점차 시간이 지나며 정치적 요구가 앞서게 됐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직전 재경원 차관보시절도 장 위원에게는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당시 경상수지 적자 폭은 늘고 있는 데 기업들의 설비투자가 40%이상 급증하고 있었습니다. 외환위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상징후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정부에서는 ‘고비용 저효율 구조 해소’와 ‘경쟁력 10% 높이기’를 추진했지만 경제주체들의 협조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장 위원은 여전히 경제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현재의 경제위기도 소비진작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구조조정과 수출경쟁력 향상, 그리고 무엇보다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장 위원이 정책조정능력과 균형감각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은 경제기획원 대외협력관, 남북회담 경제실무 담당 등을 역임하며 다양한 협상을 이끌었던 경험이 바탕이 됐다.
정책 조정능력 인정받아
90∼91년 대외협력관으로 있을 때에는 우루과이라운드로 미국의 통상압력이 거셌다. 당시 미국 뿐 아니라 경제 각 부처의 이해관계가 달라 이중으로 싸워야 했다. 또 90년대 초반 남북회담이 진행될 때에는 남측 경제실무담당으로 두 번이나 평양에 다녀왔다. 당시 체결된 남북기본합의서는 장 위원의 공직생활 보람 중 하나다.
조정자 역할을 맡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그는 부드러운 성격에다 아랫사람도 잘 챙기는 스타일이다. 반면 그만큼 저돌적인 면이 약하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장 위원과 가까운 사람들은 ‘챙길 거 다 챙기는 사람’으로 평가했다. 보좌역의 업무량도 엄청나게 많다고….
그는 경기고, 서울대로 이어지는 소위 ‘KS’중에서도 10위 안에드는 수재로 꼽힌다. 경기고등학교를 수석졸업하고 대학졸업과 함께 행정고시를 패스했을 정도. 이기호 경제수석이 행시 동기(7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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