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칼럼>베를린장벽 40주년과 햇볕정책(박성조 2001.08.30)

<신문로 칼럼>

지역내일 2001-10-05
<신문로 칼럼="">베를린장벽 40주년과 햇볕정책(박성조 2001.08.30)
박성조 / 베를린자유대 교수 경제학


8월 13일, 지금부터 40년 전(1961) 베를린 장벽이 생긴 날이다. 필자는 그 당시 베를린자유대학생이었으며 아침 일찍 쉽게 갈 수 있는 곳 브란덴부르크 문(門)으로 달려가 봤다. 많은 세월이 흘러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필자는 베를린자유대 교수로써 다시금 베를린 장벽과 인연을 갖게 됐다. 40년전 베를린장벽은 독일의 분단을 영구화하는 시도를, 1989년에는 분단의 무용화를 체험하게 됐다. 장벽은 단지 상징으로 분단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고 며칠 전에는 장벽 40주년 기념행사를 체험했다. 사실인즉 ‘기념행사’라고 하기보다 장벽이 생김으로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장벽을 넘어오다가 사망했는가를 추모하는 행사였다. 베르나우어 가(街)에 정치인들은 사망인에게 화환을 봉정했다.
독일대통령 ‘라우’는 ‘인권’과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는 독재자의 권력유지와 그것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자기민족을 배반하는 범죄를 베를린의 장벽은 상징한다고 강조했다.
베를린 장벽은 공산주의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즉 유럽대륙에서의 냉전을 시스템화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도 브란트의 동방정책에 의하여 이뤄진 것이 아니고 사회주의체제의 구조적 모순에서 오는 자체붕괴과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바꿔 말한다면 공산주의체제가 스스로 정치적, 경제사회적 개혁을 하지 않으면 자멸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벽’을 판단하는 시각을 독일통일과 결부하여 생각하면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왜? 한반도에는 아직도 ‘베를린 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유럽국가들, 특히 독일에서 공산체제에 대응하는 전략은 한 때 미국에서 성행했던 과격한 보수주의가 아니었다. 유럽에는 많은 중립국이 있었고, 브란트의 동방정책, 나아가서 특히 OSCE(유럽안보협력기구) 노선은 적대관계에서 ‘안전’과 ‘평화’를 찾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대화’와 ‘타협’을 통하여 상반되는 양체제의 공존이었다. 따라서 미국, 한 때 한국에서 유행했던 ‘자본주의체제 우위론’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동방정책, 통일 표출했다면 통독은 불가능
만약 화해 공존철학에 의하지 않고 자본주의 ‘우위론’에 입각한 적대정책을 구사했다면 베를린 장벽은 아직도 존재하고 있을지 모른다.
둘째, 특히 독일에서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동서독이 통일하겠다는 의지를 밑에 깔지 않았다. ‘협조’와 ‘타협’을 통한 인간과 인간간의 점진적 접근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따라서 브란트 정책의 대상은 동방정부가 아니고 ‘동독인’ 즉 개개인이었다.
그럼에도 미국은 동방정책에 적극적이 아니었다. 더욱이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이 통일하여 유럽 심장부에서 크게되는 것에 찬성할 이유가 없었다. 미국은 서독이 ‘통일하겠다’는 의지를 파악할 수 없었다. 서독은 ‘국토통일원’과 같은 표현을 쓰지 않았다. 많은 전문가들은 만약 서독이 처음부터 ‘동방정책’을 ‘통일정책’으로 표출시켰다면 독일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본다.
셋째, ‘인간’과 ‘인간’간의 신뢰관계를 이룩하는 데는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단순히 ‘게르만 민족’은 ‘같은 피’를 갖고 있다고 하는 막연한 문화주의개념을 쓰지 않았다. 이러한 노력은 끊임없는, 진실하지만 실패를 거듭할 수 있음을 전제하는 오랜 세월의 의지가 필요하다. 시간에 쫓기면서 ‘빨리빨리 하자’고 하면 상대방은 싫어한다. 더구나 공산주의자들은 ‘협상의 모사’들인데,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다반사였을 것이다.
넷째, 베를린 장벽에 의한 분단의 서러움을 없애는데 무엇보다도 서독의 일방적인 경제적 원조였다. 동방정책의 반대자들은 초기 동서독간 상호주의를 준수해야 한다, ‘주는 것’과 ‘받는 것’간에 균형이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대차대조표식 사고방식을 가진 동방정책의 반대자들은 얼마 안 가서 장벽을 위주한 ‘긴장완화’가 ‘반대급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독으로 갈 수 있었고, 친척을 만날 수 있었고, 여러 가지의 협력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독이 서독에게 줄 수 있었던 반대급부는 이것뿐이었다.
전 서독정부의 동베를린 대표부 대사 ‘브로잇트감’ 박사는 ‘독일의 통일과정에서 물질적인 반대급부를 요구하는 것은 서독인이 동독인과 만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반대급부 없는 지원, 동독 서독에 예속시켜
다섯째, 바로 ‘반대급부’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독 경제는 어느날 서독경제에 괄목할 정도로 예속되고 말았다. 즉 서독경제에 동독경제는 아무런 중요성을 갖지 않았으나 동독경제, 나아가서 동독정치체제가 유지해 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서독 경제였다. 그러나 서독은 ‘경제협력’을 갖고 조금도 ‘장난’을 하지 않았다. 바꿔 말하자면 통일정책에 시장원칙을 적용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주식자본주의 원칙이 범람하는 미국식 세계화가 어느 곳, 어느 시점에도 만능이라는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동독은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갖고 있지 않았던가?
사실상 베를린 장벽이 40년이란 세월에 걸쳐 표면적으로 존재했으나 최소한도 1970년 초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부터 많은 구멍이 생겼고 동독인 개개인의 의식 속에 ‘새로운 인간’이란 싹이 트게 되었다.
‘베를린 장벽 40년’을 돌이켜보면 우리가 내세우는 ‘통일정책’으로써 ‘햇볕정책’의 한계점을 통감하게 된다. 햇볕정책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순수성, 결단성, 부단성을 재활(再活)시켜야 할 것이다.
박성조 / 베를린자유대 교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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