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속 삶’ 생생히 그려낸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육성
테렌스 데 프레 지음. 차미례 옮김
서해문집. 1만3900원
책을 읽고 나면 그 모든 내용이 하나의 이미지, 하나의 낱말로 수렴되어 가는 걸 느낄 때가 있다. 이 책의 경우 그것이 하나의 장면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바로 이 장면이다.
“미칠 것 같은 고통과 공포감이 우리를 깨어있게 했다. 반짝이는 별들로 온통 뒤덮인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이, 슬픔 가득한 우리들의 감방을 굽어보고 있었다. 달빛이 창살 틈으로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나치가 지배하던 유럽의 어느 집단 강제수용소에서였다.
갑자기 무거운 침묵이 깨졌다. 어느 노인이 고대 히브리의 기도음악인 ‘콜 니드라이’를 고요히 노래하고 있었다. 무아지경에서 부르는 그의 노래는 “시체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생기가 돌게 했고 한 사람씩 서서히 몸을 일으켜 달빛에 젖은 노인의 얼굴을 정신없이 바라보게 만들었다.
“마침내 그가 노래를 그쳤을 때 우리들은 환희에 넘쳐 있었다. 우리들만큼 한없이 밑바닥 인생으로 떨어진 사람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환희, 죽음을 모르는 신비로운 기도의 힘을 통해 다시 한 번 생기에 넘치는 세계로 깨어난 환희에… ….”
그동안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수많은 책, 수많은 영상물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한 마디로 죽음에 관한 기록이었다. 하지만 이 책 ‘생존자’는 중요한 점에서 다르다. 죽음이 아닌 ‘죽음 속의 삶’에 관한, 죽음으로부터의 재생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수용소에 도착한 유태인들을 맞이했던 악몽 같은 장면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매질과 무차별 사격, 뿔뿔이 끌려가 헤어지는 가족들, 즉결처형감으로 ‘선택’되지 않은 사람들이 끌려가서 모든 것-소지품, 옷, 머리털, 이름까지-을 박탈당하는 초만원의 건물들… ….”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착한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그러나 극소수지만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생존자들, 그들은 죽음의 힘이 압도적으로 작용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무슨 힘을 빌려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인가? 지은이 테렌스 데 프레는 생존자들과의 오랜 면담, 그리고 방대한 자료와 문헌에 입각해 이 의문에 도전한다.
이 책의 제사(題詞) 가운데 하나는 러시아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의 ‘레퀴엠’을 인용해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을 글로 쓸 수가 있나요?” 스탈린의 숙청이 러시아를 공포 속에 몰아넣었을 때 고통으로 인간의 얼굴마저 상실한 듯싶은 어느 여인이 시인에게 던졌던 질문이다. 결국 데 프레에게도 옮아간 질문이다.
물론 누구보다도 증인들이 중요하다. 이기적 행동만이 생존을 보장할 것 같은 상황에서 ‘이 모든 것’에 대해 증언해야 한다는, 도덕적 사명감으로 온갖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찾았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의 생존은 어떤 진실을 전달하는가?
나는 이 책을 꿰뚫는 진실, 그 열쇳말을 ‘조직한다’라는 수용소의 은어에서 본다. 그것은 훔치고 암거래하고 매수하는 것을 포함해 모든 형태의 불법적인 생존 활동을 포괄하는 말이었다. 거기에는 악마적인 체제에 대한 집단적인 저항, 인간 사회다운 연대의식이 깃들어 있었다.
어느 생존자의 말. “나는 곧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므로 두 세 명의 조그만 가족 형태를 조직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서로 보살피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새로운 가족, 새로운 사회의 탄생이었다.
나치는 재소자를 짐승으로 떨어뜨리면 ‘관리’하기가 편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태인들이 자신들의 배설물과 악취 속에 절어들수록 SS 대원들은 짐승처럼 보이는 인간을 향해 총을 쏘고 몽둥이를 휘두르기가 쉬워졌다. 하지만 나치가 모르는 게 있었다. 수용자를 짐승으로 만들면 만들수록 내면 깊숙이에서 참인간이 살아났던 것이다. 그것은 조직하는 인간, 저항하는 인간, 연대하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 정수인 살려는 의지는 어디에 연유하는가? 지은이는 수백만 년의 진화과정을 통해 인간의 몸속에 체화된 생명력에 주목한다. “생존자의 정신은 육체 ‘속에’ 살아 있다. 이처럼 정신력까지도 보존해 주는 육체가 웅변으로 말하는 교훈은, 인간의 정신이 밑바닥까지 떨어지고도 그 모든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 온갖 오물의 불결함과 공포,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시련을 이겨 내고 아직도 건재하다는 사실이다.”
지난 50년 동안 세계 도처에서 무려 1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사람의 손에 죽어 갔다. 이런 인간 위기의 시대에 사지에서 돌아온 생존자의 존재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들의 이야기는 어느덧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옮겨오고 이 책은 ‘생존의 서(書)’에서 ‘용기와 위안의 책’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 결론은 한 마디로 삶의 긍정이다. 우리는 ‘죽음의 골짜기’를 거쳐 인간으로서의 완성에 이르는 고통스러운 생명의 지혜를 본다. 그 지혜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위로의 말을 던진다.
“행복하여라. 훌륭한 아파트나 누추한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여! 행복하여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진 채, 홀로 앉아 꿈꾸고 울 수 있는 사람들이여! 행복하여라. 타인의 돌봄을 받는 환자들이여!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자들이여! 행복하여라. 병원의 침대나 저택에서 정상적인 생을 누린 끝에, 정상적인 죽음을 맞는 사람들이여!”
박순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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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스 데 프레 지음. 차미례 옮김
서해문집. 1만3900원
책을 읽고 나면 그 모든 내용이 하나의 이미지, 하나의 낱말로 수렴되어 가는 걸 느낄 때가 있다. 이 책의 경우 그것이 하나의 장면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바로 이 장면이다.
“미칠 것 같은 고통과 공포감이 우리를 깨어있게 했다. 반짝이는 별들로 온통 뒤덮인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이, 슬픔 가득한 우리들의 감방을 굽어보고 있었다. 달빛이 창살 틈으로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나치가 지배하던 유럽의 어느 집단 강제수용소에서였다.
갑자기 무거운 침묵이 깨졌다. 어느 노인이 고대 히브리의 기도음악인 ‘콜 니드라이’를 고요히 노래하고 있었다. 무아지경에서 부르는 그의 노래는 “시체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생기가 돌게 했고 한 사람씩 서서히 몸을 일으켜 달빛에 젖은 노인의 얼굴을 정신없이 바라보게 만들었다.
“마침내 그가 노래를 그쳤을 때 우리들은 환희에 넘쳐 있었다. 우리들만큼 한없이 밑바닥 인생으로 떨어진 사람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환희, 죽음을 모르는 신비로운 기도의 힘을 통해 다시 한 번 생기에 넘치는 세계로 깨어난 환희에… ….”
그동안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대해서는 수많은 책, 수많은 영상물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한 마디로 죽음에 관한 기록이었다. 하지만 이 책 ‘생존자’는 중요한 점에서 다르다. 죽음이 아닌 ‘죽음 속의 삶’에 관한, 죽음으로부터의 재생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수용소에 도착한 유태인들을 맞이했던 악몽 같은 장면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매질과 무차별 사격, 뿔뿔이 끌려가 헤어지는 가족들, 즉결처형감으로 ‘선택’되지 않은 사람들이 끌려가서 모든 것-소지품, 옷, 머리털, 이름까지-을 박탈당하는 초만원의 건물들… ….”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착한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그러나 극소수지만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생존자들, 그들은 죽음의 힘이 압도적으로 작용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무슨 힘을 빌려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인가? 지은이 테렌스 데 프레는 생존자들과의 오랜 면담, 그리고 방대한 자료와 문헌에 입각해 이 의문에 도전한다.
이 책의 제사(題詞) 가운데 하나는 러시아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의 ‘레퀴엠’을 인용해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을 글로 쓸 수가 있나요?” 스탈린의 숙청이 러시아를 공포 속에 몰아넣었을 때 고통으로 인간의 얼굴마저 상실한 듯싶은 어느 여인이 시인에게 던졌던 질문이다. 결국 데 프레에게도 옮아간 질문이다.
물론 누구보다도 증인들이 중요하다. 이기적 행동만이 생존을 보장할 것 같은 상황에서 ‘이 모든 것’에 대해 증언해야 한다는, 도덕적 사명감으로 온갖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찾았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의 생존은 어떤 진실을 전달하는가?
나는 이 책을 꿰뚫는 진실, 그 열쇳말을 ‘조직한다’라는 수용소의 은어에서 본다. 그것은 훔치고 암거래하고 매수하는 것을 포함해 모든 형태의 불법적인 생존 활동을 포괄하는 말이었다. 거기에는 악마적인 체제에 대한 집단적인 저항, 인간 사회다운 연대의식이 깃들어 있었다.
어느 생존자의 말. “나는 곧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므로 두 세 명의 조그만 가족 형태를 조직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서로 보살피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새로운 가족, 새로운 사회의 탄생이었다.
나치는 재소자를 짐승으로 떨어뜨리면 ‘관리’하기가 편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유태인들이 자신들의 배설물과 악취 속에 절어들수록 SS 대원들은 짐승처럼 보이는 인간을 향해 총을 쏘고 몽둥이를 휘두르기가 쉬워졌다. 하지만 나치가 모르는 게 있었다. 수용자를 짐승으로 만들면 만들수록 내면 깊숙이에서 참인간이 살아났던 것이다. 그것은 조직하는 인간, 저항하는 인간, 연대하는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 정수인 살려는 의지는 어디에 연유하는가? 지은이는 수백만 년의 진화과정을 통해 인간의 몸속에 체화된 생명력에 주목한다. “생존자의 정신은 육체 ‘속에’ 살아 있다. 이처럼 정신력까지도 보존해 주는 육체가 웅변으로 말하는 교훈은, 인간의 정신이 밑바닥까지 떨어지고도 그 모든 고통을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 온갖 오물의 불결함과 공포,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시련을 이겨 내고 아직도 건재하다는 사실이다.”
지난 50년 동안 세계 도처에서 무려 1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사람의 손에 죽어 갔다. 이런 인간 위기의 시대에 사지에서 돌아온 생존자의 존재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들의 이야기는 어느덧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옮겨오고 이 책은 ‘생존의 서(書)’에서 ‘용기와 위안의 책’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 결론은 한 마디로 삶의 긍정이다. 우리는 ‘죽음의 골짜기’를 거쳐 인간으로서의 완성에 이르는 고통스러운 생명의 지혜를 본다. 그 지혜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위로의 말을 던진다.
“행복하여라. 훌륭한 아파트나 누추한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여! 행복하여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가진 채, 홀로 앉아 꿈꾸고 울 수 있는 사람들이여! 행복하여라. 타인의 돌봄을 받는 환자들이여! 그리고 그들을 돌보는 자들이여! 행복하여라. 병원의 침대나 저택에서 정상적인 생을 누린 끝에, 정상적인 죽음을 맞는 사람들이여!”
박순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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