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날에 옛 날에 아주 먼~옛 날에… ”용인 수지도서관에는 매주 화요일마다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는 할머니가 있다.
오전 10시, 조금은 이르다 싶은 이 시간에도 엄마손 잡고 도서관 나들이 나온 고사리 손의 아이들. 모두 이금옥(68ㆍ상현동)씨의 사랑스런 고객들이다.
다소 왜소한 몸집에도 아이들에게 읽어 줄 책을 손수 골라 한보따리 씩 짊어지고 다니는 책 할머니. 올해로 6년차 한주도 거르지 않고 낭랑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그이의 책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아이들과 그림책을 연결해 주는 할머니
오후 한낮의 햇살이 기분 좋게 내리쬐는 10월 중순. 커다란 가방에 운동화를 신은 이금옥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인사를 나누는 그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다. 역시나 맑은 톤의 낭랑한 음성. 아이들에게 어필되기 좋은 할머니(?) 답지 않은 미성이었다.
수지도서관이 생기고 얼마 후부터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지만 누가 시켜서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며 운을 떼는 이금옥씨.
“교직 생활 은퇴하고 용인으로 내려와 지내면서 무료하게 보내긴 싫더라고요. 수지도서관에 무작정 전화해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겠노라 했죠. 담당자가 흔쾌히 받아 들여 그때부터 시작하게 됐답니다.”
교직에 있을 때부터 상담심리와 인성공부를 해왔던 이 씨는 현재 ‘동화사랑’ 시니어아카데미회장과 숙명여대 평생교육원 ‘동화구연’ 심사위원을 맡고 있을 만큼 은퇴 이후에도 공부를 멈추지 않고 있다.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책이라고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하면 안되죠. 오히려 아이들의 특성을 이해하고 눈높이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계속적인 공부가 필요해요. 저도 아이들과 만나면서 공부가 즐겁고, 또 공부한 내용을 아이들에게 풀어놓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좋은 그림책 선별해 직접 들고 다녀
아이들과 만나기 위해 집에서 매일 책 꾸러미를 들고 나온다는 이금옥씨. 도서관 책을 이용하지 않는 게 다소 의아했다.
“아이들 정서에 맞는 좋은 책을 읽어주고 싶어 해마다 코엑스 도서 전시전이 열리면 책을 구입해왔어요. 전집으로 낱권으로도 구입한 책이 400여권 됩니다.”
이 씨는 아이들 그림 책도 엄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백설공주, 신데렐라 등 공주와 왕자이야기, 늑대의 배를 가르는 이야기책 등은 절대 읽어주지 않는단다. 아이들 정서에 좋지 않기 때문.
“조금 큰 아이들이라면 스스로 소화가 가능할 테죠. 하지만 아직 정서적으로 가장 여리고 순수한 4~5살 아이들이 처음 만나는 그림 책은 꿈과 희망을 따뜻하게 담을 수 있어야 합니다.”
도서관의 책은 여러 사람을 거친 책이라 여리저기 때가 묻거나 파손되고, 혹 필요한 책들은 대출 중이기 일쑤. 이 씨가 그림책을 사고, 또 아이들과 만날 때마다 한보따리씩 가지고 나오는 이유다.
“할머니, 오늘은 책 얼마나 가져왔어요? 다음엔 이~만큼 가져오세요” 열 손가락 벌려서 주문하는 아이들에게 “할머니 그렇게 많이 가져오면 다리에 쥐가 날 것 같아”하며 부러 애기하면 “할머니 그럼 고양이 데려올게”하고 대답해 주는 아이들. 무거운 책을 들고 나오는 수고가 하나도 힘들지 않을 만큼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이다.책 할머니 기다리는 아이와 엄마 펜이
그이의 보람
이 씨는 특히 전래 동화를 읽어 줄 때면 유난히 쏙쏙 받아들여 반응하는 아이들을 보며 ‘역시 한국인의 DNA구나’를 자주 느낀다고.
‘흉내쟁이, 오줌쟁이, 오줌통에 빠진다~’
“우리말이 주는 정겨운 어감을 잘 살려낸 의태어, 형용사, 부사 등이 많은 책들이 좋아요. 그런 책들은 몇 번 읽어주기도 전에 어느새 외워서 따라하는 아이들을 보면 아이의 심장 박동을 저도 닮아 가는 것 같아요.”
그런 이유 때문일까, 수지도서관에는 아이들뿐 아니라 그를 기다리는 엄마 펜 그룹이 있다.
“둘째 낳았어요.” “이사했어요.” “애기가 아팠어요.”… 매번 만날 때마나 친정 엄마에게 얘기 하듯 수다를 펼쳐놓는 엄마 펜 그룹들이 그이가 펼친 지난 6년간의 보람이자 열매다.
그렇게 수지도서관에서 시작한 ‘책 읽어주는 할머니’ 역할은 인근 유치원과 어린이집, 보바스기념병원의 어르신들과 다문화가정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수지도서관에서도 다문화 가정의 엄마들에게도 동화 구연을 배우라고 미션을 주고 와요. 뭔가 도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살아가는데 에너지를 주는 일이죠. 그림책을 읽고 우리 것을 알아가고 그래서 아이들을 잘 키우며 나를 성장시킬 수 있는 일, 정말 좋은 일이잖아요. 하하하”
책 꾸러미를 메고 이곳저곳에 상상과 꿈이 담긴 이야기를 전해주는 책 할머니 이금옥씨.
인터뷰를 마칠 무렵엔 이야기 선물을 전해주는 그이가 산타를 꼭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미영 리포터 myk31@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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