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았던 주민마저 떠나는 연평도]
마을 곳곳엔 포격 당시 참혹함 그대로
25일 오후 돌아왔던 주민도 짐만 챙겨 인천으로
연평도 고향을 떠나는 주민들의 모습은 황망함 그 자체였다. 여객터미널로 향하는 주민들의 얼굴에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 드러났다.
남아있던 200여 주민마저 떠나는 25일 오후 연평도. 전쟁터 피란민이 따로 없었다.
연평도 서부리 마을로 들어선 오후 3시. 마을을 지키던 주민들이 하나둘 짐을 싸 여객터미널로 이동하고 있었다. 주민들에게선 "마지막 여객선이 온다고 해서 지금 가고 있다"는 말만 되돌아왔다.
오후 3시30분 뭍으로 나갔던 200여명의 주민들이 연평도로 돌아왔지만 대부분 이들도 곧 여객선으로 다시 떠나야 했다.
홀로 여객선을 타기 위해 터미널로 나가던 김태헌(50) 연평도성당 신부. 김 신부는 올 1월 부임했다. 23일 포격 이후 홀로 성당과 대피소를 오가던 김 신부도 결국 주민들의 결정에 따라 짐을 쌌다.
"포격 당시 성당 경내에만 폭탄 2발이 떨어졌다. 이런 일은 상상도 못했다." 김 신부는 구호품과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지만 자신의 고생보다도 어이없는 현실에 더욱 가슴 아파했다.
포격 3일째. 주민들이 떠난 연평도 서부리 마을에는 깨진 유리 파편이 여전히 길에 가득했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포격으로 곳곳에서 파괴된 주택들이 눈에 띄였다.
통신시설 복구에 나선 KT 직원들만이 바삐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KT 한 직원은 "전기는 가동됐지만 통신은 여전히 힘든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주인 잃은 수퍼에는 깨진 유리창 너머로 상품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떠날 당시의 다급한 상황이 남아있었다.
주인 잃은 수퍼에 나타난 안동출(41)씨는 기자에게 "담배 있느냐"는 말부터 건넸다. 담배 파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안씨는 인천에 사는 누나 집에 머물다 이날 잠시 집안을 정리하러 들어왔다.
이날 연평도에 들어온 주민들은 이들에게 보장된 2시간 동안 만약의사태에 대비해 전기시설 등을 점검하고 허겁지겁 짐을 싸야했다.
김응섭(34)씨는 "합선 등을 우려해 전기스위치를 내리고 옷가지를 싸러 들어왔다"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23일 이후 섬을 지키던 주민들도 이번엔 대부분 섬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홀로 집을 지키고 있던 이형수(56)씨도 결국 섬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씨는 23일 당시 포격이 처음 시작된 7중대 앞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이씨는 "처음엔 단순한 오발사고인줄 알았다"며 "우리 쪽이 훈련하면서 몇 발 쏘니까 곧바로 포탄이 날아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당시 포격은 동물도 피해가지 않았다. 마을 곳곳에는 홀로 남은 개들이 떼지어 뛰어 다니고 있었다. 연평 초중고 앞에서 만난 하얀 개는 머리와 엉덩이에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옆의 개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사고 당시 포탄을 맞고 저렇게 됐다"는 주민의 설명이 뒤따랐다.
주민이 떠난 연평도엔 면사무소 공무원과 경찰, 복구반 등이 남는다.
최성일 연평도주민대책위원장은 "28일 한미군사합동훈련을 한다는데 누가 섬에 남아있겠느냐"면서 "200여명 주민 가운데 나이 드신 어르신 3명만 남기고 모두 떠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날 오후 들어온 일부 주민은 "이번엔 섬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해 25일 이후에도 일부 주민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커보였다.
오후 5시 연평도 여객터미널은 마지막 여객선을 타기 위한 주민들로 가득했다. 작은 일에도 일부 주민들 사이에 고성이 오갈 정도로 신경은 곤두선 상태였다.
파도는 3m 가까이 될 정도로 높았다. "평소 같으면 도저히 배가 운행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주민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날 오전 해경 312함을 타고 들어온 언론사 기자들도 높은 파도로 심한 배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잠시 들어왔다가 다시 뭍으로 나가는 이정연(18)양은 "현재 가족들과 여관에 있다"면서 "그날 이후 학교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양은 23일 포격 당시 모의고사를 보고 있었다. 이양은 연평초중고 바로 앞 마을에 포탄이 떨어졌던 모습을 설명하면서 "눈앞에 벌어지는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며 몸서리쳤다.
윤여운 기자 yuyoo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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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평도 후폭풍 보수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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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평도 주민 생업현장 나가 화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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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곳곳엔 포격 당시 참혹함 그대로
25일 오후 돌아왔던 주민도 짐만 챙겨 인천으로
연평도 고향을 떠나는 주민들의 모습은 황망함 그 자체였다. 여객터미널로 향하는 주민들의 얼굴에는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이 드러났다.
남아있던 200여 주민마저 떠나는 25일 오후 연평도. 전쟁터 피란민이 따로 없었다.
연평도 서부리 마을로 들어선 오후 3시. 마을을 지키던 주민들이 하나둘 짐을 싸 여객터미널로 이동하고 있었다. 주민들에게선 "마지막 여객선이 온다고 해서 지금 가고 있다"는 말만 되돌아왔다.
오후 3시30분 뭍으로 나갔던 200여명의 주민들이 연평도로 돌아왔지만 대부분 이들도 곧 여객선으로 다시 떠나야 했다.
홀로 여객선을 타기 위해 터미널로 나가던 김태헌(50) 연평도성당 신부. 김 신부는 올 1월 부임했다. 23일 포격 이후 홀로 성당과 대피소를 오가던 김 신부도 결국 주민들의 결정에 따라 짐을 쌌다.
"포격 당시 성당 경내에만 폭탄 2발이 떨어졌다. 이런 일은 상상도 못했다." 김 신부는 구호품과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지만 자신의 고생보다도 어이없는 현실에 더욱 가슴 아파했다.
포격 3일째. 주민들이 떠난 연평도 서부리 마을에는 깨진 유리 파편이 여전히 길에 가득했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포격으로 곳곳에서 파괴된 주택들이 눈에 띄였다.
통신시설 복구에 나선 KT 직원들만이 바삐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KT 한 직원은 "전기는 가동됐지만 통신은 여전히 힘든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주인 잃은 수퍼에는 깨진 유리창 너머로 상품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떠날 당시의 다급한 상황이 남아있었다.
주인 잃은 수퍼에 나타난 안동출(41)씨는 기자에게 "담배 있느냐"는 말부터 건넸다. 담배 파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안씨는 인천에 사는 누나 집에 머물다 이날 잠시 집안을 정리하러 들어왔다.
이날 연평도에 들어온 주민들은 이들에게 보장된 2시간 동안 만약의사태에 대비해 전기시설 등을 점검하고 허겁지겁 짐을 싸야했다.
김응섭(34)씨는 "합선 등을 우려해 전기스위치를 내리고 옷가지를 싸러 들어왔다"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23일 이후 섬을 지키던 주민들도 이번엔 대부분 섬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홀로 집을 지키고 있던 이형수(56)씨도 결국 섬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씨는 23일 당시 포격이 처음 시작된 7중대 앞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이씨는 "처음엔 단순한 오발사고인줄 알았다"며 "우리 쪽이 훈련하면서 몇 발 쏘니까 곧바로 포탄이 날아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당시 포격은 동물도 피해가지 않았다. 마을 곳곳에는 홀로 남은 개들이 떼지어 뛰어 다니고 있었다. 연평 초중고 앞에서 만난 하얀 개는 머리와 엉덩이에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옆의 개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사고 당시 포탄을 맞고 저렇게 됐다"는 주민의 설명이 뒤따랐다.
주민이 떠난 연평도엔 면사무소 공무원과 경찰, 복구반 등이 남는다.
최성일 연평도주민대책위원장은 "28일 한미군사합동훈련을 한다는데 누가 섬에 남아있겠느냐"면서 "200여명 주민 가운데 나이 드신 어르신 3명만 남기고 모두 떠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날 오후 들어온 일부 주민은 "이번엔 섬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해 25일 이후에도 일부 주민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커보였다.
오후 5시 연평도 여객터미널은 마지막 여객선을 타기 위한 주민들로 가득했다. 작은 일에도 일부 주민들 사이에 고성이 오갈 정도로 신경은 곤두선 상태였다.
파도는 3m 가까이 될 정도로 높았다. "평소 같으면 도저히 배가 운행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주민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날 오전 해경 312함을 타고 들어온 언론사 기자들도 높은 파도로 심한 배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잠시 들어왔다가 다시 뭍으로 나가는 이정연(18)양은 "현재 가족들과 여관에 있다"면서 "그날 이후 학교에 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양은 23일 포격 당시 모의고사를 보고 있었다. 이양은 연평초중고 바로 앞 마을에 포탄이 떨어졌던 모습을 설명하면서 "눈앞에 벌어지는 모습이 믿기지 않았다"며 몸서리쳤다.
윤여운 기자 yuyoo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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