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자원이 세계명품이다 ⑦울주 옹기
스승과 제자, 대를 이어 전통에 현대를 입히다
장인·흙·전통가마가 빚어내는 ‘숨쉬는 그릇’
‘참살이·친환경’ 바람타고 제2의 도약 꿈꿔
“불량품이 많이 나왔어요. 사람을 사서 (가마에) 불을 땠는데 조절이 잘 안됐어요. 불이 너무 세서 줄였더니 어떤 건 또 안 익었고….”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면 외고산옹기마을. 입 부분이 주저앉거나 옆구리가 움푹 팬 옹기들이 영화요업 옆마당에 가득하다. 흙빛 검은빛 윤기가 흐르는 옹기는 그 자체가 예술작품같은데 장인은 단호하다. 배영화(69·울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장인은 “옹기엑스포기간에 너무 들떠있었다”며 스스로를 탓했다. 옹기세계에 입문한지 50년 된 장인에게도 실수가 있나보다.
◆열여덟에 견습공으로 입문 =
“전에는 서울 근교에도 옹기를 만드는 마을이 많았어요. 개발바람에 덕에 다 팔아치운 거지.
40여년간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보존 된 거예요.
외고산옹기마을은 국내 옹기 생산량 절반을 차지하는 전국 최대 옹기집산지다.
“경북 영덕이 고향인데 선생님 따라서 내려왔어요.”
배영화씨
1957년 경북 영덕에서 옹기점을 하던 허덕만씨
속 모르는 사람들은 공기 좋은 데서 옹기 만들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시냐고 하지
20㎏들이 쌀단지를 만드는 중. 하루 많아야 15개 정도. 6만~7만원 정도
1959년 옹기 견습공으로 입문
1969년 결혼한지 1년만에 스승의 권유에 따라 공방을 내고 별도 제작
1978년 일본 수출
1998년 일본 시가라게도예연수원 강사로 초빙
2000년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고대 이스라엘 토기와 현대 토기 문화교류전
경북 영덕이 고향이다. 스승을 따라 내려 와
18살부터 숙식하며
야산에서 나무를 베어다 공장을 지었다
2년간 부산에 내려가 판매. 도움이 많이 됐다. 큰 상인을 상대하는 것과 소비자를 상대하는 건 차이가 있다.
1년 품팔이하며 품삯으로 옹기를 받아 부산에서 부인이 판매하는 형태로 돈을 모았다. 1971년 다시 공장을 인수.
다시 돌아온지 9개월만에 스승이 돌아가셨다. 1972년 7월
1960년대 하루 인건비가 100원. 도공 월급은 면서기 3배였다. 우리 또래 옹기장이들 대부분은 시골에서 형제 많은 집에서 태어나 입을 덜기 위해
교회에 못나가게 해서 쫓겨나다시피 집을 나왔다. 중학교 2학년. 더 이상 학교를 가지 못하고. 처음에는 뒷일(잡일)을 했다. 부지런하기만 하면 남 속이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일이라고
돼지고기 훈제할 용기 등 주문제작
쌀단지는 배가 불뚝한 옛날식 독이 아니다. 좁은 아파트 공간을 염두에 두고 날씬한 모양으로 바꿔. 매실을 발효시키는데 많이 사용한다.
똥장군. 인테리어용이다. 복을 가져온다 해서 만들고 있는 것
유약을 바르기까지 3일, 다시 15~20일을 말려 가마에 넣고 굽는다.
소품은 20일, 나머지는 한달 걸린다고 보면 돼.
1990년대까지 종업원 10명을 데리고 옹기를 대량생산했다. 빚보증을 잘못 서 가산을 탕진한 뒤 오히려 전통옹기 제작법을 지키게 돼. 가마에 넣을 때 옹기 은퇴자들을 일용직으로 고용할 뿐 혼자서 작업한다. 대량생산은 수작업이 어렵다. 전통옹기를 보존하면서 내 이름으로 파는 것에 재미
과학적으로 인정받았다. 정부도 전통음식문화 키우기. 선호도가 높아졌다. 내외만 먹고 살면 되니
천연유악을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중간상인에는 못 준다. 대량 생산제품보다 1.5배 가량 비싸
경주에서 부산까지 지역 가운데 가장 따뜻한 곳. 온양면이다. 가장 추운 겨울에도 영하 5℃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
남창지역 흙이 가진 장점. 대부분 4~5년 사용하면 가마가 녹는데 흙이 내화도가 높아 20~30년째 사용 중이다. 굴방 황토로는 가장 좋다.
3년간 일당도 없다. 전문 도공이 자기 이름으로 판매. 막걸리 사러 다니고
이 양반이 성질이 유별나. 겨우 옹기를 빚나 했더니 이런 걸 왜 만드느냐며 발로 걷어 차. 부족하다는 거지. 결심을 하게 됐지
지금은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적어도 10년은 배워야 옹기를 만들 수 있어서
50~60년대 대장들 품팔이. 연봉 2500 될까 말까. 나이들수록 기술이 좋아도 인건비는 줄어든다. 힘이 없어서 많이 만들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10년 전에는 옹기 생각도 안했다. 2000년부터 공장 정리하고 혼자 만들고 있다. 옹기마을회관에서 어린이 도예체험교실을 하며 4년간. 중간중간 수작업으로 작품을 만들었다가 판매를 했는데 재미가 있더라. 사람들이 기다렸다가도 수작업 제품을 사간다. 누군가 전통방식을 지켜야 마을에도 도움이 된다.
일본에서 정원을 만들때 컨테이너로 실어보냈다. 장사꾼들이 휴대용 김치단지를 가져가기도. 현장을 보고 자기네들이 알아서 포장해간다. 60~65년에 미국 수출도 그렇게
당시 하와이와 로스엔젤리스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주문했는데 독에 들어갈 뻔했다. 지금도 미국에서 온다. 얼마 전에는 한인이 된장 공장을 만든다며 4만개를 요구했는데 물량을 대지 못할 것 같아 거절. 부산의 미군부대나 고리원전에 근무하던 미국인 캐나다인 등이 귀국때 기념품으로 챙겨간다
택배회사에서 받아주질 않는다. 그래서 인터넷 판매도 안돼. 나무상자를 짜야 하는데 그 돈이 옹기값만큼 나갈 것. 대부분 와서 직접 가져간다. 대량구입하면 차량으로 배달
2009년 4월 울산 무형문화재로 지정. 전에는 여름에 구워놓으면 김장철 전에 청소하듯이 쓸어갔는데 요즘은 김장독 사는 사람 거의 없다. 된장 간장이나 매실주 담그는 봄이 가장 많이 팔려
이 동네 옹기장이도 김치냉장고를 쓴다. 겨울에 안쓰는 가마에 김치 보관.
소비가 줄어든 게 가장 큰 문제
만드는 날은 100만원어치는 만들어야 건조하고 유약작업하는 기간 등 빼고 현상유지가 가능
예전에는 종업원을 두고 분업을 했는데 요즘은 도공이 없어 틀로 찍는다. 하루 50개까지 가능
허진규(44)씨
중학교 진학하지 않고 옹기를 만들겠다고. 32년간 만들었어요.
10살부터 아버지를 졸랐다. 지금 고교생, 아들은 대학생인데
아버지가 양산에서 닫으며 옮겨와
대 센 도공들을 보며 옹기를 구우리라 다짐. 아버지 공방을 그대로 재현
디자인 100개 이상
비싸도 사간다. 일손이 달려 주문에 맞추지 못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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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과 제자, 대를 이어 전통에 현대를 입히다
장인·흙·전통가마가 빚어내는 ‘숨쉬는 그릇’
‘참살이·친환경’ 바람타고 제2의 도약 꿈꿔
“불량품이 많이 나왔어요. 사람을 사서 (가마에) 불을 땠는데 조절이 잘 안됐어요. 불이 너무 세서 줄였더니 어떤 건 또 안 익었고….”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면 외고산옹기마을. 입 부분이 주저앉거나 옆구리가 움푹 팬 옹기들이 영화요업 옆마당에 가득하다. 흙빛 검은빛 윤기가 흐르는 옹기는 그 자체가 예술작품같은데 장인은 단호하다. 배영화(69·울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장인은 “옹기엑스포기간에 너무 들떠있었다”며 스스로를 탓했다. 옹기세계에 입문한지 50년 된 장인에게도 실수가 있나보다.
◆열여덟에 견습공으로 입문 =
“전에는 서울 근교에도 옹기를 만드는 마을이 많았어요. 개발바람에 덕에 다 팔아치운 거지.
40여년간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보존 된 거예요.
외고산옹기마을은 국내 옹기 생산량 절반을 차지하는 전국 최대 옹기집산지다.
“경북 영덕이 고향인데 선생님 따라서 내려왔어요.”
배영화씨
1957년 경북 영덕에서 옹기점을 하던 허덕만씨
속 모르는 사람들은 공기 좋은 데서 옹기 만들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시냐고 하지
20㎏들이 쌀단지를 만드는 중. 하루 많아야 15개 정도. 6만~7만원 정도
1959년 옹기 견습공으로 입문
1969년 결혼한지 1년만에 스승의 권유에 따라 공방을 내고 별도 제작
1978년 일본 수출
1998년 일본 시가라게도예연수원 강사로 초빙
2000년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고대 이스라엘 토기와 현대 토기 문화교류전
경북 영덕이 고향이다. 스승을 따라 내려 와
18살부터 숙식하며
야산에서 나무를 베어다 공장을 지었다
2년간 부산에 내려가 판매. 도움이 많이 됐다. 큰 상인을 상대하는 것과 소비자를 상대하는 건 차이가 있다.
1년 품팔이하며 품삯으로 옹기를 받아 부산에서 부인이 판매하는 형태로 돈을 모았다. 1971년 다시 공장을 인수.
다시 돌아온지 9개월만에 스승이 돌아가셨다. 1972년 7월
1960년대 하루 인건비가 100원. 도공 월급은 면서기 3배였다. 우리 또래 옹기장이들 대부분은 시골에서 형제 많은 집에서 태어나 입을 덜기 위해
교회에 못나가게 해서 쫓겨나다시피 집을 나왔다. 중학교 2학년. 더 이상 학교를 가지 못하고. 처음에는 뒷일(잡일)을 했다. 부지런하기만 하면 남 속이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일이라고
돼지고기 훈제할 용기 등 주문제작
쌀단지는 배가 불뚝한 옛날식 독이 아니다. 좁은 아파트 공간을 염두에 두고 날씬한 모양으로 바꿔. 매실을 발효시키는데 많이 사용한다.
똥장군. 인테리어용이다. 복을 가져온다 해서 만들고 있는 것
유약을 바르기까지 3일, 다시 15~20일을 말려 가마에 넣고 굽는다.
소품은 20일, 나머지는 한달 걸린다고 보면 돼.
1990년대까지 종업원 10명을 데리고 옹기를 대량생산했다. 빚보증을 잘못 서 가산을 탕진한 뒤 오히려 전통옹기 제작법을 지키게 돼. 가마에 넣을 때 옹기 은퇴자들을 일용직으로 고용할 뿐 혼자서 작업한다. 대량생산은 수작업이 어렵다. 전통옹기를 보존하면서 내 이름으로 파는 것에 재미
과학적으로 인정받았다. 정부도 전통음식문화 키우기. 선호도가 높아졌다. 내외만 먹고 살면 되니
천연유악을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중간상인에는 못 준다. 대량 생산제품보다 1.5배 가량 비싸
경주에서 부산까지 지역 가운데 가장 따뜻한 곳. 온양면이다. 가장 추운 겨울에도 영하 5℃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
남창지역 흙이 가진 장점. 대부분 4~5년 사용하면 가마가 녹는데 흙이 내화도가 높아 20~30년째 사용 중이다. 굴방 황토로는 가장 좋다.
3년간 일당도 없다. 전문 도공이 자기 이름으로 판매. 막걸리 사러 다니고
이 양반이 성질이 유별나. 겨우 옹기를 빚나 했더니 이런 걸 왜 만드느냐며 발로 걷어 차. 부족하다는 거지. 결심을 하게 됐지
지금은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적어도 10년은 배워야 옹기를 만들 수 있어서
50~60년대 대장들 품팔이. 연봉 2500 될까 말까. 나이들수록 기술이 좋아도 인건비는 줄어든다. 힘이 없어서 많이 만들어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10년 전에는 옹기 생각도 안했다. 2000년부터 공장 정리하고 혼자 만들고 있다. 옹기마을회관에서 어린이 도예체험교실을 하며 4년간. 중간중간 수작업으로 작품을 만들었다가 판매를 했는데 재미가 있더라. 사람들이 기다렸다가도 수작업 제품을 사간다. 누군가 전통방식을 지켜야 마을에도 도움이 된다.
일본에서 정원을 만들때 컨테이너로 실어보냈다. 장사꾼들이 휴대용 김치단지를 가져가기도. 현장을 보고 자기네들이 알아서 포장해간다. 60~65년에 미국 수출도 그렇게
당시 하와이와 로스엔젤리스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주문했는데 독에 들어갈 뻔했다. 지금도 미국에서 온다. 얼마 전에는 한인이 된장 공장을 만든다며 4만개를 요구했는데 물량을 대지 못할 것 같아 거절. 부산의 미군부대나 고리원전에 근무하던 미국인 캐나다인 등이 귀국때 기념품으로 챙겨간다
택배회사에서 받아주질 않는다. 그래서 인터넷 판매도 안돼. 나무상자를 짜야 하는데 그 돈이 옹기값만큼 나갈 것. 대부분 와서 직접 가져간다. 대량구입하면 차량으로 배달
2009년 4월 울산 무형문화재로 지정. 전에는 여름에 구워놓으면 김장철 전에 청소하듯이 쓸어갔는데 요즘은 김장독 사는 사람 거의 없다. 된장 간장이나 매실주 담그는 봄이 가장 많이 팔려
이 동네 옹기장이도 김치냉장고를 쓴다. 겨울에 안쓰는 가마에 김치 보관.
소비가 줄어든 게 가장 큰 문제
만드는 날은 100만원어치는 만들어야 건조하고 유약작업하는 기간 등 빼고 현상유지가 가능
예전에는 종업원을 두고 분업을 했는데 요즘은 도공이 없어 틀로 찍는다. 하루 50개까지 가능
허진규(44)씨
중학교 진학하지 않고 옹기를 만들겠다고. 32년간 만들었어요.
10살부터 아버지를 졸랐다. 지금 고교생, 아들은 대학생인데
아버지가 양산에서 닫으며 옮겨와
대 센 도공들을 보며 옹기를 구우리라 다짐. 아버지 공방을 그대로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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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싸도 사간다. 일손이 달려 주문에 맞추지 못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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